한국과 일본의 미래관계를 위한 단상(斷想)
역사란 무엇인가?
영국의 역사가 E.H.카(1892~1982)는 그의 명저, 「역사란 무엇인가」(1961)에서, “나는 지난 강연에서 역사를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오히려 역사는 과거의 여러 사건과 점차적으로 우리들 앞에서 출현하게 될 미래의 여러 목적과의 대화라고 말씀드렸어야 했을 것입니다. 과거에 대한 역사가의 해석도, 의의 있는 것과 적절한 것의 선택도, 새로운 목표가 점차적으로 출현함에 따라서 진화되어 나아가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역사란 과거를 대상으로 하여 연구하지만, 결국 미래 지향적인 학문임을 밝히고 있다. 필자도 그동안 ‘역사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곰곰이 생각하여 다음과 같이 풀이해 보았다. 즉, 역사란 지난날 인간생활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사건의 인과관계(因果關係)의 진실을 밝히고, 그것으로 현실을 이해하는 자료로 삼고 또 후세에 넘겨주어 교훈으로 삼게 함으로써 삶을 유익하게 하는 학문이다.
필자는 한국과 일본은 상호 이해하고 평화를 유지하며 함께 번영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메이지(明治, 1868)정부 수립 이후의 소위 대륙정책을 분석・평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 2000년 1월 28일, 일본 항공자위대 간부후보생학교(나라(奈良) 소재)에서 특강을 할 기회가 있었다.
거기서 일본정부의 대륙정책은 ‘침략’정책이라고 얘기했는데, 질문의 기회를 주었더니, 학생장교(중위)가 그것은 ‘침략’이 아니라, ‘진출’이라고 했다. 그래서 ‘진출’이란 예컨대 어느 무역상사가 외국에 나가서 장사하는 것을 뜻하고, ‘침략’이란 군대를 이끌고 가서 타국의 영토와 주권을 탈취하는 것을 뜻한다고 설명했다.
1974년 유엔총회에서 내린 ‘침략’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즉 “침략이란 어느 나라가 타국의 주권, 영토 보전, 또는 정치적 독립에 대해 무력을 행사하는 것을 뜻한다.” 필자는 그 후 일본인들이 ‘진출’과 ‘침략’을 식별하지 못하는 원인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았다.
① 일본의 대륙정책은 ‘침략’이 아니고, ‘진출’이었다.(日本航空自衛隊 幹部學校의 學生將校)
② 나카소네(中曾根) 총리는 동경재판을 긍정하고, 그리고 전후의 총리 가운데 처음으로 대동아전쟁은 침략전쟁이었다고 말하고 말았다. 그의 발언을 알았을 때, 나카소네 총리는 본인 속에서 가치관이 도착(倒錯)되지 않았나 하고 생각했다.(龜井靜香 自民黨代議士)
③ 일본국민 가운데는, 특히 지도적 입장에 있는 사람 가운데, 확신범적(確信犯的)인 사죄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졸저, 「역사의 종말」을 번역한 와타나베(渡部昇一) 교수가 그 전형(典型)이다. 와타나베 교수는 제2차 세계대전에 관련하여 완전히 난폭한 발언을 했다. “난징(南京) 대학살은 없었다. 일본군이 난징을 떠날 때, 중국인은 눈물을 흘리면서 전송했다”고 말했다. 와타나베 교수와 같은 사회적 지위의 인물이 상상을 넘어선 얘기를 했다. 이런 얘기를 히틀러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서구사회에서는 용서받지 못하지만, 일본에서는 허용된다는 것이다.
독일에서는 네오 나치집단(Neo-Nazi Group)이 출현했어도 그것은 커다란 세력이 아니다. 일본에서는 이러한 종류의 사람이 국수주의 세력으로 보편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것을 사회가 수용하고 있으며, 그것이 일본과 독일의 차이점이다.
사죄의 방식이 서툴다거나, 표현이 조잡하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고, 일본은 진실로 반성도 사죄도 하지 않고 있다. 그것이 문제이다.(프란시스 후쿠야마 교수)
④ 일본의 역사 교과서의 결함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으나, 가장 큰 문제는 일본의 정부・문부성의 방침이 일본이 아시아 침략, 식민지 지배, 전쟁에 대해서 그 책임을 명확히 시인하지 않으며, 가능한 한 은폐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교과서의 검정권(檢定權)은 문부성이 장악하고 있으며, 그 검정은 일본사 교과서에 대해 가장 엄격하며, 문부성의 방침을 반영시키고자 한다.(中村 哲 名譽敎授)
⑤ 한국의 역사 교과서는, 일본의 침략에 대해 사실에 바탕을 두고 상세히 기술(記述)하고 있으나, 일본의 교과서는 이 점에 관한 서술(敍述)은 대단히 빈약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근현대에 있어서 일본의 조선침략에 관한 기본적인 사실에 대해서는, 그 평가는 고사하고, 지식으로서도 일본과 한국의 국민이 공유(共有)해야만 한다. 한국의 교과서에 명기(明記)되어 있고, 한국인은 누구나가 알고 있는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의 실태에 대해, 일본인만이 알지 못한다면 이웃과의 대화와 신뢰는 깊어지지 않으리라.(高本 享 敎諭)
필자는 일본 항공자위대의 젊은 장교(중위)가 ‘침략’과 ‘진출’의 용어에 대한 식별을 알지 못하는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하고 찾았더니, 그 해답은 ④,⑤에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일본 총리가 태평양전쟁을 침략전쟁이었다고 발표했을 때, 한 국회의원은 수상의 정신상태가 어그러져 거꾸로 뒤집힌 것이(倒錯)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는 데, 일본에서 극우・국수주의 세력이 사회에서 수용되고 있으나, 독일에서는 그렇지 않으며, 일본과 독일의 침략전쟁에 대한 인식의 차이점이라 지적했다.(③)
일본의 청일전쟁(1894~1895), 러일전쟁(1904~1905), 한일합방(1910), 만주사변(1931), 중일전쟁(1937~1945), 그리고 진주만 기습작전에 의한 태평양전쟁(1941~1945)은 침략이며, 과거의 침략행위에 대한 진실을 알지 못하고서는 미래의 정확한 판단과 이웃나라와의 화해와 우호관계의 증진은 성립되기 어려우리라.
천황은 기자회견에서, “나 자신으로는, 환무천황(桓武天皇)의 생모가 백제의 무령왕(武寧王)의 자손이라는 것을 「속일본기(續日本記)」에 기록되어 있는 것에 대해, 한국과의 연고를 느끼고 있습니다... 더욱이 과거를 정확히 아는 데 노력하고, 각 개인으로서의 서로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며, 양 국민 사이의 이해와 신뢰감이 깊어지기를 바랍니다”고 말했다. (「아사히 신문(朝日新聞)」, 2001년 12월 23일)
필자는 천황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리고 1986년 10월 국방대학원 재직 중 학생 10여명을 인솔하여 도쿄(東京)을 방문했을 때,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郞) 외무장관의 강화(講話)를 통역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역사적 관점에서도 한국과 일본의 상호 이해와 관계의 중요성을 역설했는데, 감명 깊게 들었고 통역했으며, 일본 의사당으로 우리들 일행을 초대하여 구경시켜 주기도 했다. 그 후 필자는 그의 명의로 발간된 외교문서를 읽으면서, 이 분이 차기의 총리가 된다면, 한일관계는 한 단계 더 높게 발전하리라, 생각하면서 총리가 되기를 바랐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1991년 5월 15일 타계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아들, 아베 신조(安倍晋三)는 재차 총리가 되었다. 그는 총리가 되기 전 최근의 신문 인터뷰(2012. 8.)에서 과거사 반성 담화 폐지와 헌법 개정 등을 하겠다고 언급한바 있으니 앞으로 동북아시아의 파도는 높아질 것으로 분석된다.
침략에 대한 진정한 사죄란?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공동번영이라는 기치 아래 한국·중국·일본 3국 협력사무국이 서울에 문을 연 지 1년이 지났다. 이들 3국이 잘 협력한다면 세계의 경제 주도권을 좌우하게 되리라. 즉, 국내 총생산(GDP)의 관점에서 보면, 중국이 세계 2위요, 일본이 3위이며, 한국도 10위권에 들어갈 뿐만 아니라, 조선, 정보・통신, 철강, 자동차 등의 분야에서 첨단을 달리고 있다. 그래서 미국의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브루킹스, 헤리티지 재단 등에서 우려와 경계의 시선을 던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지난 10월, 일본의 센카쿠(尖閣, 중국명 댜오위댜우(釣魚島)) 국유화 조치로 중・일간 갈등이 불거져 아직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일본은 한국과의 영토분쟁의 씨앗인 독도문제를 안고 있으며, 언제 표면화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3국간의 갈등의 씨앗은 과거사와 영토분쟁인데, 이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과제가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공동번영의 열쇠가 되리라.
2차 대전이 끝난 지 26년 만에 서독 수상인 빌리 브란트가 폴란드 바르샤바를 방문한 것은 1970년 12월 7일이었다. 나치에 의해 수 백 만의 시민이 희생된 폴란드의 희생자 위령탑을 방문하게 되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독일이었지만, 독일과 폴란드의 화해 없이는 유럽 전체의 평화와 번영은 기대할 수 없는 걸림돌이었다. 전 세계의 이목이 쏠려있는 가운데 비에 젖은 위령탑 앞으로 나아가 향을 피우고 커다란 화환을 올리고 두 손을 잡고 묵념하면 끝나는 공식적인 겉치레 행사였다.
그런데 두 손을 마주 잡고 있던 서독 수상인 빌리 브란트가 갑자기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한동안 그 상태로 묵념을 했다. 비에 젖은 맨바닥에 무릎을 꿇은 브란트 수상의 모습이 폴란드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알려졌고, 외교적이고 관례적인 과거에 대한 겉치레 반성 같은 것보다 훨씬 강력한 감명을 주었다. 그의 사죄의 모습은 독일 나치가 저지른 모든 죄악에 대한 독일인으로써의 진정어린 반성과 사죄가 냉전 분위기를 뒤집어 평화로의 초석을 이루는 데 밑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일본은 패전 후 정치가·관료들은 과거의 한반도·중국에 대한 침략과 피해를 입힌데 대한 진정어린 사죄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죄과를 은폐하는 교육을 실시하여 ‘침략’과 ‘진출’도 식별하지 못하는 국민을 육성하고 있다. 일본정부는 교과서뿐만 아니라, 방위백서인 「일본의 방위」라는 책자에서도 ‘독도’를 일본의 영토라고 명시하고 있으니, 아마도 그들은 ‘독도 탈환 작전계획’도 수립했으며, 기회만 노리고 있는 것으로 짐작한다. 따라서 우리는 만반의 대비태세를 갖춤으로써 그들의 의도를 사전에 억제해야 하리라.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공동번영이라는 기치 아래 한국・중국・일본 3국 협력사무국이 서울에 설치되었지만, 독일의 브란트 수상처럼 일본 위정자의 진정한 과거 침략에 대한 사죄와 일본 국민의 호응이 없다면, 그것은 모래 위에 세운 누각(砂上樓閣)에 지나지 않으리라.(Konas) 본 기사는 월간자유1월호에도 게재됨
이종학 명예 군사학 박사(충남대학교 평화안보대학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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