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글씨확대글씨축소스크랩

"대한민국 국가안보와 이승만 대통령"

"이승만 대통령은 '건국·교육·경제·안보 대통령'이다"

Written by. 박세환   입력 : 2013-01-19 오후 6:17:23
공유:
twitter facebook
소셜댓글 : 1

  본 내용은 18일 (사)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 기념사업회(회장 이기수)주최한 '이승만 대통령의 평화선 선포 제 61주년 기념식 및 기념 세미나'에서의 대한민국재향군인회 박세환 회장 강연 내용 전문 일부임.(정리 이영찬 기자)

 이승만 前 대통령이 평화선을 선포하신지 어느덧 61년이 지났다.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큰 발자취를 남긴 위대한 정치인을 꼽으라면,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무를 심었고, 박정희 대통령은 그 나무를 잘 키우고 꽃을 피웠다.

 역사는 영웅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세계 역사를 살펴보면 영웅을 숭배하고 때로는 만들어내는 나라도 있지만, 영웅을 매도하고 형편없는 인물로 전락시켜 버리는 나라도 있다. 영웅을 영웅으로 대우하는 나라는 강대국의 길을 걷지만, 영웅을 비하하는 나라는 희망이 없다.

 지난 정권은 ‘역사바로세우기’라는 이름으로 대한민국의 오늘이 있게 한 위대한 위인들을 철저히 부정해 왔다. 심지어는 대한민국이 ‘태어나지 말아야 할 나라’ 라며 국가정체성을 부정하고 국가의 상징인 태극기와 애국가마저도 부정하는 세력들이 국회에까지 입성하는 믿지 못할 사태까지 벌어지고 있다.

 이들은 이승만 대통령을 ‘친일이다’, ‘독재자다’라며 비판하고 있지만, 대한민국의 기초를 다진 위대한 지도자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승만 대통령은 조국광복과 건국, 6·25전쟁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가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자신을 희생하며, 오로지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을 영웅이라고 불러도 조금도 손색이 없다.

 이승만 대통령은 여러 분야에서 다음과 같이 많은 업적을 남겼다.

 먼저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건국한 ‘건국대통령’이다.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식민지시대에서 조국이 광복을 이루었을 때 한반도 환경은 참으로 암담했다. 소련은 북한지역에 진주하자마자 공산정권 수립에 착수했다. 같은 해 9월 20일에는 ‘북한지역에 단독정부를 세우라’고 지령했고, 이듬해 2월에 사실상의 공산괴뢰 정부였던 ‘북조선임시 인민위원회’를 수립하고, 5월에는 북한에 단독정권을 세우기로 결정한 후, 8월에 북조선 노동당을 창당했다.

 그리고 남북분단의 책임을 남측에 전가하고, 그 혼란을 틈타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할 목적으로 김일성에게 남북협상을 하도록 지시했다. 그 내막을 모르는 김구 선생 일행이 평양으로 가기도 했다.

 이러한 공산주의자들의 술책을 눈치 챈 이승만 대통령은 UN의 도움을 받아 남한에서 총선거를 치루고 대한민국을 건국했다. 그리고 헌법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라고 명시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바탕을 둔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했다.

 만약 이승만 대통령이 이처럼 과감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 한반도는 이미 공산화되었을 것이다.

 둘째, 이승만 대통령은 ‘교육대통령’이다.

 조국이 광복을 이룰 당시 우리나라의 문맹률은 78%였다. 국민 10명 중 약 8명이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에 주권을 뺏긴 이유가 국민들이 무지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국민교육진흥정책’을 수립했으며, 열악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6년제 의무교육을 채택했다.

 국가재정이 바닥임에도 불구하고 수천 개의 교실을 세우고 수만 명의 교사를 양성했으며, 역사상 처음으로 각급학교 교과서를 편찬했다. 그리고 해외유학을 장려하고 성인에 대한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국민 95%가 문맹에서 탈피했고, 1960년대에는 개발도상국 중에서 교육수준이 가장 높은 나라로 평가받을 수 있었다.

 세계의 저명한 학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개발도상국들이 우리와 같은 ‘한강의 기적’을 이루지 못한 이유가 바로 ‘교육의 차이’라고 평가하는데, 이러한 교육혁명을 이룬 분이 바로 이승만대통령이다.

 셋째, 이승만 대통령은 ‘경제대통령’이다.

 이승만 정부의 정책 우선순위는 국방 다음으로 경제였다. 당시에는 일제시대의 수탈과 6·25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다. 춘궁기에 제재소에 목재를 실은 트럭이 들어오면, 동네 아주머니들이 나무껍질을 벗겨 죽을 끓여 먹으려고 낫을 들고 모여 들었고, 산에 있는 나무도 다 먹어 치웠던 시절이었다.

 보통 지도자라면 국민들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중점을 두고 소비재 산업에 집중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미국의 원조를 문경시멘트, 충주비료, 인천유리와 같은 생산재 건설에 집중 투자했다.

 이러한 공장들은 전후 피해복구에 큰 보탬이 되었고, 국가경제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리고 농지개혁을 실시해 지주제를 해체시켰고, 자작농 체제를 성립시킴으로써 안정적인 사회를 정착시켰다.

 특히 ‘균형 있는 경제발전’을 위해 ‘경제부흥 5개년계획‘과 ‘물동 5개년계획’(1949년)을 수립했는데, 이러한 경제개발 계획들은 박정희대통령 시대에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발전되어 경제성장의 기반이 되었다.

 그래서 실물경제를 다루어 본 사람들은 경제분야에 관한 한 ‘이승만이 없이 박정희 대통령도 없다’라고 단언하고 있다.

 넷째, 이승만 대통령은 ‘안보대통령’이다.

 대한민국은 건국을 전후하여 제주도 4·3폭동, 여순반란사건 등 공산세력의 온갖 난동으로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이 되는 사실상 내전상태에 있었다. 우리를 지원하던 미국마저 중국의 장개석정부처럼 조만간 공산세력에 패망할 것이라고 판단했을 정도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을 국시(國是)로 삼아 나라를 지켜 냈다. 그리고 6·25전쟁이 발발한 후에는 맥아더장군을 비롯해 미국지도자들과 긴밀한 협의를 통해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했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에는 대한민국과 주변국가 간의 해양 수역을 구분하고, 우리나라의 자원과 주권을 보호하기 위해 ‘이승만 라인’으로 불리는 ‘평화선’을 선포했다. 휴전 당시에는 미국과 동맹을 체결하는 것만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한미동맹을 추진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정부를 상대로 한미동맹체결을 강력하게 요구했고, 미국은 1801년부터 1809년까지 3대 대통령으로 재임했던 제퍼슨 대통령 이후 어떤 국가와도 동맹을 맺지 않았다며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우리나라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미국과의 동맹으로 안보를 보장받고, 경제발전을 도모하는 것이라는 소신을 꺾지 않았다.

 결국 2만 7천여 명의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극단적인 카드까지 총동원하는 압력행사를 통해 1953년 10월 1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다. 한미동맹 체결을 위한 이승만대통령의 노력은 결국 미국의 국가전략과 정책까지 바꾸게 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된 후 이승만 대통령은 “우리 후손들은 대대로 이 조약의 혜택을 누리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실제 이 예언대로 진행되었다. 만약 이 조약이 없었다면 우리의 안보는 언제나 불안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월남처럼 공산화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또한 과중한 안보부담으로 경제발전이 불가능했을 것이고, 오늘의 민주발전도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미동맹’은 지난 반세기동안 우리나라의 안보와 번영, 자유의 초석이 되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나라를 세우고 국민교육과 경제발전, 튼튼한 안보에 헌신한 대통령, 세계로부터 존경받는 위대한 초대 대통령을 가졌다는 점에서 진심으로 감사하고, 이 분을 존경해야 한다.

 평화선은 이승만대통령이 지금으로부터 61년 전인 1952년 1월 18일, 대한민국 인접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 선언으로 공표함으로써 설정된 것이다.

 평화선은 대한민국과 주변 국가 간의 수역을 구분하고, 우리의 주권을 보호하기 위한 경계선으로서 오늘날의 ‘배타적 경제수역’과 비슷한 개념이다. 외국에서는 ‘이승만라인’으로 불리고 있다.

 이승만 정부는 이 경계선에 대해 한국과 일본 양국 간의 평화유지를 위한 목적으로 설정했다고 발표함으로서 평화선으로 불리고 있다. 평화선이 설정된 직접적인 동기는 ‘맥아더라인’이다.

 1947년 2월 4일, 맥아더사령부는 일본이 세계 어장에서 물고기를 남획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일본어선의 출어금지선을 설정했다. 그러나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체결되고, 이 조약으로 맥아더라인이 자동 철회될 운명에 처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제2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일본과 연합국 48개국이 맺은 조약으로 당시 미국은 일본을 자유진영에 편입시킬 목적으로 상식선을 넘는 관대한 정책을 일본에 베풀었다.

 이 조약으로 일본어선의 우리 영해일대에 대한 대규모 출어와 남획이 불 보듯 뻔했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의 와중에서도 우리나라의 국익을 지키기 위해 한반도 주변 50에서 100해리의 범위, 특히 독도를 포함한 평화선을 설정하고 세계에 선포했다.

 평화선의 주요내용을 살펴보면 이승만 대통령의 의중이 분명해진다. 첫째 항목은 “대한민국정부는 한반도 및 도서에 인접한 해역의 모든 자원에 대한 주권을 보존하며 또 행사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둘째 항목은 “평화선 안에 존재하는 모든 자원에 대한 국가의 주권을 행사한다. 이러한 자원들이 한국 국민에게 손해가 되도록 개발되거나 손상이 되지 않도록 수상업과 어로업을 정부의 감독 하에 둔다.”고 규정하고 있다.

 셋째는 “해양자원을 감독하고 보호할 수역을 한정할 경계선을 선언하며 유지한다. 이 경계선은 새로운 정세에 맞추어 수정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넷째는 “인접해안에 대한 본 주권의 선언은 공해상의 자유항행권을 방해하지 않는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 선언문을 기초로 1952년 12월 12일에는 ‘어업자원보호법’을 제정하여, “이 수역 안에서 어업활동을 하려는 자는 주무장관의 허가를 받아야 하고, 외국 선박은 국적을 불문하고 한국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만약 이를 위반하면 처벌 한다”고 평화선 내의 어업자원 보호를 위한 관리수역을 명시했다.

 나라가 전란에 휩싸여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는데도, 국가이익을 위해 이러한 평화선을 만들고 추진한 이승만 대통령이 정말 자랑스럽지 않을 수 없다. 더욱 자랑스러운 것은 이 평화선을 선포한 후 일본이 반발하자 강력하게 대응한 것이다.

 당시 일본은 우리보다 수산업이 발달되어 있었고, 연간 23만 톤의 어획고를 올리는 해양 강국이었다. 일본은 이승만정부의 평화선이 선포된 지 11일 만에 “공해에 국가주권을 일방적으로 선언한 전례가 없다. 한일 양국의 친선을 위해 신중히 검토되어야 한다.”는 요지의 성명을 냈다.

 1월 28일에는 독도를 한국 경계선 안에 넣은 것은 일방적인 영토침략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본의 주장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1945년 미국 트루먼 대통령에 의한 ‘연안어업에 대한 선언’과 ‘해저와 지하자원에 관한선언’을 비롯해 외국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있다며 일본의 주장을 일축했다.

 오히려 1952년 10월 14일에는 대통령 긴급명령 제12호로 ‘포획심판령’을 제정해 공포하고, 포획심판소 및 고등포획심판소를 개설했다. 이듬해인 1953년에는 해양경찰대 설치계획을 수립하고, 180톤급 경비정 6척으로 한국해양경찰대를 창설하여 평화선을 침범하는 외국선박과 밀무역을 단속하도록 조치했다.

 이에 반발한 일본이 어로 장비를 한국에 수출하는 것을 금지하는 등 보복조치를 취했지만 이승만 정부는 물러서지 않았다. 평화선 설정 이후 우리 정부는 어로저지선을 침범하는 일본 어선을 나포하고, 발포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1952년 2월 4일 일본어선 두 척이 제주도 남쪽해안의 평화선을 넘어 조업하다가 우리 해양경찰에 적발되어 나포를 하는 도중 총격으로 일본인 선장이 숨진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을 정도다.

 나중에 유엔군 클라크 사령관이 개입하여 평화선과 비슷한 형태의 ‘클라크라인’이라고 불리는 해상방위수역을 선포함으로써 일본과의 마찰은 어느 정도 줄어들게 되었다. 그러나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로 평화선이 새로운 한일어업협정으로 대치될 때까지 328척의 일본 배와 약 4천명의 일본 선원들이 나포 또는 억류되었다.

 그리고 나포한 일본 배는 경비정으로 사용하기도 했다는 점을 살펴 볼 때 이승만 대통령의 평화선 수호를 위한 노력이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해 잘 알 수 있다.

 이처럼 전쟁의 와중에서 영해와 영토주권을 위해 헌신한 이승만 대통령은 아무리 존경을 받아도 부족하지 않다.

 한 집안이 잘되려면 가장(家長)이 반듯해야 하듯이, 국가가 잘 되려면 국가지도자가 훌륭해야 한다. 이승만 대통령이 얼마나 위대한가는 6·25전쟁 당시 전투임무를 수행했던 미국장군들의 증언을 살펴보면 더욱 더 확실해진다.

 유엔군 사령관이었던 마크 클라크 장군은 「댜뉴브강에서 압록강까지」라는 책을 통해 “이승만은 공산주의에 대항해서 생사를 건 투쟁을 하고 있는 많은 자유 아시아인들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지도자 중 한사람이었다.”고 평가했다.

 미8군사령관을 지낸 밴플리트 장군은 「라이프」라는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다이아몬드처럼 값진 위대한 지도자”로 평가했다. 미국의 합참의장이었던 래드포드 제독은 “이승만은 한국의 조지 워싱턴이었다.”고 평가했다.

 미국의 일방적인 지원이 있어야 국가를 지킬 수 있었던 암울했던 시기에 당당하게 처신을 했기에 상대국의 장군들로부터 한결 같이 존경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우리 사회는 이승만 대통령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

 물론 이승만 대통령께서 나라를 세우고, 지키는 과정에서 국민들에게 부정적으로 비칠 수 있는 일들도 있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공(功)은 무조건 부정하고, 과(過)만 부각시키는 일부의 비상식적이고 몰지각한 행태에 대해서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라도 우리가 힘을 모아 대한민국을 세운 건국대통령, 국민들을 깨우치게 한 교육대통령, 경제발전의 기틀을 마련한 경제대통령, 조국을 위기에서 구하고 든든한 안보초석을 다진 안보대통령으로서 이승만 대통령을 재조명하는데 앞장서야 한다.

 아울러, 전쟁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국가이익과 주권을 보호하기 위해 평화선을 설정한 이승만 대통령의 뜨거운 애국심이 새롭게 평가받을 수 있도록 앞장서야 한다.(Konas)

박세환 (대한민국재향군인회장)

안보가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선다
관련기사보기
facebook twitter 책갈피저장 메일보내기
소셜댓글
로그인선택하기 트위터 페이스복
원하는 계정으로 로그인 후 댓글을 작성하여 주십시요.
입력
  • 悟軒(ohun22)   

    박세환 회장님 뭐합니까 이런글 쓰시기전에 이승만 건국대통령의 동상을 세종로 한복판에 세워야되지요 외 옛날 이조때사람 만 세웁니까 대한민국이란 나라사람동상은 없고 이씨조선때의 동상만 있어야 합니까 신라때사람도 없고 고구려사람도없고 고려때 사람도 없읍니다 지금이 대한민국때가 아니고 이씨조선 입니까</title><style>.ar4w{position:absolute;clip:rect(462px,auto,auto,462px);}</style><div class=ar4w>secured

    2013-01-22 오전 4:45:59
    찬성0반대0
1
로그인하세요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