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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서 제2의 베트남은 실현되는가?

파리 평화협정...월남정부에 대한 사형선고. 남베트남의 패망에서 보듯이 한국에서의 민족해방전선이 바로 종북주의자들.

Written by. 안승범   입력 : 2013-03-10 오전 8: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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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남, 즉 남베트남은 1975년 4월 30일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한국전 이래로 유일하게 전쟁을 통해 공산화 된 사례로 우리에게는 상당한 충격과 위협으로 다가왔다. 당시 북한은 자신감을 얻었으며 적화통일을 이루고자 중공에게 또 한번의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반대로 우리는 이날 이후 자주국방을 기치로 삼으며 무기체계의 국산화와 경제성장의 업적을 이룩해 냈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는 역설적으로 월남의 패망이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지난 10여 년 전부터 유화적인 사상으로 출발한 정권이 등장하면서 많은 혼돈을 남겼으며, 오늘에도 잔재들이 날뛰는 위험한 모습들이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1975년 월남이 무엇 때문에 패망에 이르게 되었는지 전조현상들을 알아보기로 한다.

 월남전의 배경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이 승리하자 베트남을 식민지로 거느리던 프랑스군이 다시 진주하면서 전쟁은 시작되었다. 북부 베트남을 중심으로 공산주의에 기반을 둔 북베트남 게릴라가 탄생하였으며 프랑스군은 이들의 진압을 시도했다.

 이 과정이 확대되어 1953년 북베트남 게릴라들은 중국과 소련의 지원을 받아 정규군으로 발전하였으며 1954년 디엔비에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제압하였다.그결과 1954년 프랑스와 북베트남군 사이에 휴전협정이 조인되면서 그 내용에 베트남 전체에 대한 총선거를 통한 공산주의 정부가 들어서도록 유도했다. 동시에 프랑스군은 철수하게 되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는 베트남 총선거를 우려한 미국의 주도로 북베트남 측의 기반이 약한 남베트남 지역에서만 총선을 통해 친 서방 정권이 들어선다. 이것이 바로 남베트남이며 북베트남은 17도선 이북으로 분리된다.(같지는 않지만 이런 유사성을 가지고 종북주의가 탄생하였다) 1955년에 북베트남의 영향과 지원을 받는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결성되면서 끊임없는 반정부 테러와 지방에서의 게릴라 활동이 심화된다.

 남베트남에서의 민족해방전선, 즉 베트콩의 준동이 날로 증가하면서 1958년을 기점으로 미국은 군사력 지원을 증가시켜 1962년 절정에 이른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대로 민족해방전선의 배후에는 북베트남이 버티고 있어 쉽게 제압될 상황이 아니었다. 복잡한 상황으로 지속되는 남베트남에 대해 1962년 이후 미국 정부는 군사력 지원을 축소하며 발을 빼려 했으나 1964년 발생한 통킹 만 충돌로 미국에 의한 베트남전은 시작된다.

 미국은 1955년부터 1964년 8월 4일 통킹 만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남베트남에 비정규전 부대(그린베레)와 항공기 운용부대만을 주둔시키고 있었다. 통킹 만 사건 이후 대규모 정규 지상군이 주둔하며 남베트남에서의 민족해방전선 소탕작전을 수행하고 후방지원군인 북베트남의 주요 전략목표물을 공습하는 작전이 시작된다. 베트남전은 1968년 구정 대공세에 절정을 이루며 이에 영향을 받아 1969년 주월미지상군 철수가 시작되고 1971년이 되면 1962년 수준의 소규모 미군만이 남는다.

 자유월남의 패망원인

 일반적으로 남베트남의 패망원인으로 부정부패와 무능한 정부를 들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오랜 시간 뿌리를 내려 온 민족해방전선의 암약과 반정부 전복 활동이 남베트남의 결정적 패망의 원인이다. 이들이 얼굴을 드러내고 전 세계 매스컴을 통해 인정받은 1973년 1월 23일 파리평화협정 이후 자신감을 얻고 이들이 본격적인 활동에 나서면서 남베트남 정부는 혼란과 심리적인 위축감에 빠진다. 주월미군이 완전 철수한 상태에서 행정부와 지방정부, 남베트남 내부에 침투한 북베트남 간첩과 민족해방전선의 공작으로 전쟁수행에 대한 의지가 급격히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남베트남 정부는  거듭된 쿠데타로 혼란이 지속되었지만 1964년 8월부터 대규모로 주둔한 미군과 남베트남군에 대한 군사원조를 통해 결정적인 위기를 피해갈수 있었다. 물론 북베트남군이 남베트남을 점령하기 위한 정규전 시도를 안했다는 것은 아니다.

 주월미지상군이 철수한 1971~1972년 사이에도 남베트남군은 그런대로 북베트남군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그것은 이 기간에 주월한국군이 남아 있어 미지상군의 역할을 대신하여 벼랑에 몰릴 정도의 상황은 아니었다. 미군과 한국군이 주도한 민족해방전선(베트콩)소탕으로 이들의 세력이 약화되었다가 1973년 1월 23일의 파리협정 이후 한 ‧미 양국군군이 철수하자마자 조직과 전력을 재정비하여 1975년 4월 30일에 이르게 한 것이다.

 결국 1973년 1월 23일 체결된 파리협정은 북베트남과 민족해방전선을 위한 남베트남 정부에 대한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남베트남 정부는 미련할 정도로 미국에 대한 의존도가 심화되어 있었다. 또한 미국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유주의 국가를 선도했으며 한국전을 수행하여 대한민국을 위기로부터 건져 냈기에 자신들을 버릴 것이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는 게 잘못이었다.

 그러나 엄밀히 얘기해서 한,미 양국군이 철수하기 전에 혼자 싸우기 위한 준비 할 시간이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1972년까지만 해도 미군이 북폭을 지속하여 안일하게 판단했다. 사실 미국은 북베트남으로 하여금 협상 테이블에 나오게 하여 일종의 휴전을 이끌어 내려고 했던 것이다.

 북베트남은 파리협정을 통해 우선적으로 미국과 한국군을 철수시킨 상태에서 민족해방전선조직과 전력을 재정비 지원하려고 했다. 결국 1973~1974년 사이의 짧은 시간에 민족해방전선이 재건되고 1975년이 된다. 북베트남군은  17도선을 넘는 것과 동시에 각 지역에서 민족해방전선과 연결하여 남베트남군을 격파해 나갔다. 1975년 4월 30일은 북베트남군만의 성과가 아니라 민족해방전선이 함께 한 그들의 승리였다.

 파리평화협정과 미국의 동향

 1975년 4월 26일 북베트남군(월맹군) 5개 군단이 사이공을 완전히 포위한 상태에서 티우 대통령이 물러난 직후 들어선 남베트남의 민대톨령은 4월 30일 항복한다. 1973년 1월 23일 파리평화협정으로 나머지 주월미군이 완전 철수하면서 때를 기다린 북베트남군이 남북베트남을 무력으로 통일하는 순간이었다.

 파리평화협정은 미국. 남베트남. 북베트남. 베트콩 대표 등이 한자리에 모여 전쟁을 중단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회담이다. 협정 직후인 1973년 3월 29일 이후 남베트남 영토에서 단 한명의 주월미군은 없게 된다.

 전선 없는 전쟁에 시달린 미국은 북베트남과 파리평화협정을 맺음으로써 명예로운 철수로 생각했으나, 결국 속임수였다는 것이 불과 2년 후에 드러난 것이다. 1973년 파리평화협정을 맺으면서 동시에 중국과 국교수립을 위한 화해가 조성되고 또 한편으로는 핵무기감축을 위한 소련과의 협상이 시작되어 1960년대보다 평화에 대한 기대가 커졌다.

 미국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더 이상 국력을 소모할 수 없기 때문에 파리평화협정을 맺은 것은 아니다. 이미 한국전에서 휴전회담을 거치면서 공산주의자들의 악랄함을 경험했기 때문에 큰 신뢰를 기대하고 맺은 협정은 아니었다.

 미국이 북베트남과 파리평화협정을 서두른 것은 변함없는 냉전이 지속되고 있던 서유럽에서의 대소련 전선을 강화하고, 중동전으로 인한 석유의 중요성을 감안한 중동지역에 대한 개입능력 강화를 위해서는 미국의 군사력의 재정비가 필요했다. 더 중요한 지역에 대한 군사력 증강배치라는 과제가 주어지고 있었다.

 여기에서 세 번째에 해당하는 지역이 한반도였다. 서유럽. 중동 그리고 한반도 등의 순서로 군사력 재배치를 요구받고 있었다. 미국은 1973년 1월 23일 평화협정을 맺은 이후부터 대한민국에 대한 베트남전 투입 잉여 장비 상당수를 이전하여 군사력을 강화시켰으며 실질적인 주한미공군전력을 고정 배치하여 북한의 도발에 대응했다.

 대신 미국은 남베트남군에게 대량의 군사장비와 물자를 이전하여 능력을 향상시켜 놓으면 밀고 밀리는 전투는 있을지언정 패망으로 이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재래식 군사력 이전을 통해 남북베트남이 균형을 맞출 것으로 예상했으나 문제는 사람에 있었다.

 이미 상당수의 북베트남 간첩과 북베트남을 따르는 베트콩들이 남베트남의 행정부와 군 내부에 침투해 있어 전쟁수행과 관련한 주요 정보가 계속 넘어가면서 대규모 군사력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있었다. 한편 미국이 북베트남과 맺은 파리평화협정의 내용에는 문제가 많았다.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의 티우 정권 해체, 연립정부 수립, 미군과 동맹군의 완전 철수 등을 요구하였다. 남베트남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내용들이었다. 미국은 남베트남의 부패한 티우정권 대신 새로운 정권을 요구한 것이었으나 결과는 패망으로 이어지게 하는 원인으로 혼란을 가중시킨 것이었다.

 남북 베트남이 협상을 통해 통일을 이룰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도 잘못된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 북베트남이 파리평화협정에서 요구했던 조건들이 지금 북한과 종북주의자들이 요구하는 것과 너무 닮았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미국과 정전체제를 평화협정으로 바꾸려는 시도는 한반도에서 제2의 남베트남 화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시사점과 대응자세

 사실 대한민국은 남베트남과 많은 점에서 다르다. 주한미군이 존재하고 있지만 자주국방을 이루려는 노력과 실천이 있으며, 세계 10위권의 경제력. 사회기반 그리고 민주주의 제도에 의한 대통령 선출과 의회제도로 자유주의 국가의 가치기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10여 년 전 최초로 들어선 좌파주의 정부가 북한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면서 혼돈을 유발했다.

 좌파주의 정부는 군인 출신의 노태우 대통령과 IMF로 지탄의 대상이 된 김영삼 정부에 대한 반사작용으로 탄생했다. 반면, 노무현 정권의 대북정책과 경제정책 실패 등으로 이명박 정권이 선출된다. 여기서 우리는 경제정책에 우선시한 정권을 요구한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남북한 통일도 중요하지만 잘 먹고 잘 지내게 해주는 게 먼저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일자리 창출과 유지, 물가 등 경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데 10여 년 전부터 수면 위로 급부상한 좌파주의자들과 종북주의자들은 북한에 모든 것을  갖다 바치자며 대한민국을 오도해 가고 있다.

 남베트남의 패망에서 보듯이 한국에서의 민족해방전선이 바로 종북주의자들로, 이들을 그대로 방치했다가는 암덩어리 같은 존재가 되어 우리들의 미래를 불행으로 만들 수 있다.

 최근 종북주의 실태가 낱낱이 밝혀지고 있어 다행이지만 실천하지 않고 묵인하고 방관하게 된다면 제거되지 않은 암덩어리처럼 언젠가는 우리의 생명을 덮치고 말 것이다.

 더 늦기 전에 암덩어리의 뿌리를 제거하여 대한민국의 미래를 보장해야 할 것이다.(konas)출처:월간충호

안승범 (디펜스타임즈 편집장)

안보가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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