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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독립운동가 황학수

평생을 조국의 독립에 몸 바친 참군인

Written by. 이영찬   입력 : 2013-09-02 오전 11:4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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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황학수 선생을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선생(1877.7.20∼1953.3.12)은 대한제국 군인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고, 만주에서 한국독립군 부사령관으로 활약하였으며, 한국광복군사령부 총사령 대리 및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조국 광복을 위해 헌신하였다.

 1900년 대한제국 육군 무관학교 졸업 후 육군 참위로 임관했다. 1907년 8월 대한제국 군대가 일제에 의해 해산 당하자, 제천으로 내려가 보명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활동에 전념했다.

 이후 1919년 3·1운동 발발 후 중국으로 망명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으로 활동을 시작으로 그해 11월 군무부 육군무관학교 교관으로 군사간부를 양성했다.

 이듬해 12월에 군사간부학교가 문을 닫게 되자 임시정부의 직책을 사임하고, 북경 군사통일회의에 참석하여 군사위원으로 선임되어 군사단체의 통일을 모색했다.

 군사통일회의 결렬 후 선생은 서로군정서 군무부장으로 이상룡, 여준 등과 함께 군사조직재건에 주력하였고 이후 북만주 지역으로 이동하여 신민부 참모부 위원으로 군구(軍區)를 확대시키는데 크게 활약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신민부의 군구가 돈화를 비롯하여 동만주 일대까지 확대되었다.

 이후 김좌진과 함께 마적단 본부를 찾아가 교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약탈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였으며 또한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 3부통합운동이 일어나자 김좌진 등과 신민부 대표로 참여하였다.

 또 선생은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고 한국독립군 부사령관으로 길림구국군과 함께 한중연합토군을 편성하여 대일항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33년 10월 오의성부대의 기습으로 독립군 대부분이 와해되자 선생은 만주를 떠나 1938년 장사에서 임시정부에 합류해 광복군 창설을 추진했다.

 당시 병력을 모집하고 부대를 편제하는 실질적인 책임을 맡았으며 조국 광복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최전방에서 광복군을 지휘하였다.

 이에 정부에서는 1962년 선생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하였다.(Konas)

코나스 이영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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