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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은 1차 세계 大戰 100주년

Written by. 조갑제   입력 : 2014-01-01 오전 9:4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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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가들은 1차 대전 발발 과정을 많이 연구해왔다. 오스트리아를 제외하곤 진정으로 전쟁을 원하는 나라가 없었다. 그럼에도 동맹조약과 미리 짜놓은 군사전략이 서로 얽히면서 전쟁으로 끌려들어갔다.

 2014년은 1차 세계 대전 발발 100주년이다. 1914년 6월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帝國(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드와 부인 소피아가 보스니아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하였을 때 이웃한 세르비아의 암살단이 잠복해 있다가 황태자 부부를 사살했다.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의 동맹국인 세르비아를 이 기회에 정리하려고 결심, 무리한 요구를 했다.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의 요구를 거의 다 받아들였다. 오스트리아는 이를 무시하고 7월28일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 직전, 독일제국의 빌헤름 2세는 오스트리아가 모험정책을 펴도 적극 지원하겠다는 일종의 백지수표를 발행하였다.

 러시아는 보호국인 세르비아를 위하여 다음 날 부분적인 동원령을 내렸다. 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인 독일도 7월30일 러시아에 대응, 총동원령을 내렸다. 그러면서 프랑스에 대하여는 중립을 지킬 것을 요구하였다. 이는 속임수였다. 독일이 세워놓은 전쟁계획-슐리펜 플랜에 따르면 독일의 전략은 프랑스를 먼저 쳐서 항복을 받은 뒤 러시아 전선으로 병력을 이동시키는 것이었다.

 독일은 8월2일 러시아에 선전포고하고 동시에 프랑스를 치기 위하여 길목의 벨기에를 침공했다. 벨기에를 지키기로 약속했던 영국이 독일에 공격중단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자 이틀 뒤 독일에 선전포고한다. 유럽의 강국들이 연쇄적으로 전쟁으로 말려 든 것이다.

 1917년엔 미국까지 프랑스-영국-러시아의 연합군 편에 참전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제국, 그리고 오스만 터키가 한 편이었다. 각 7000만 명 정도의 병력을 동원했다. 약 1000만 명의 군인이 죽었다. 主전선은 프랑스-독일 전선이었다. 기관총과 대포를 동원한 참혹한 진지전이었다. 1km 전진하는 데 수만 명이 죽었다. 베르당 요새 전투에선 독일과 프랑스軍이 작은 野山(야산)을 놓고 근 6개월간 격돌, 40만 명 이상이 戰死(전사)했다.

 1차 세계대전은 20세기 역사, 그리고 한국인의 운명에도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1. 이 전쟁의 여파로 러시아에서 공산혁명이 일어났다. 1917년의 일이었다. 러시아는 독일과 강화조약을 맺고 연합국 대열에서 이탈하였다. 이는 서구 자유민주주의-자본주의의 대열에서 이탈하는 것을 뜻했다. 러시아 공산혁명의 성공은 1945년의 한반도 분단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

 2. 러시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 터키 등 3大 제국이 붕괴되었다. 제국주의 시대가 종언을 고하는 것이다. 러시아 제국의 붕괴로 공산국가가 최초로 등장한 데 이어 오스만 터키가 무너지자 지배하에 있던 中東에서 여러 나라들이 독립하였다. 한때 세계의 화약고로 불렸던 중동 문제의 근원이 여기서 비롯된다.

 3. 미국이 참전, 연합국의 승리를 결정지음으로써 세계최대 强國(강국)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고, '미국의 세기'를 연 것이다. 일본은 연합국 편에 섰으나 戰後(전후)에 英日(영일)동맹을 해체, 서구 자유민주주의 대열에서 이탈, 만주와 중국 침공에 열중하고, 태평양의 제해권을 놓고 미국과 대결하게 된다. 태평양 전쟁과 한국 독립의 길로 가는 길을 연 것이다.

 世界史를 바꾼 직접적인 요인은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 암살이었지만, 이것이 뇌관을 터뜨릴 수 있었던 것은, 오랫동안 유럽에서 축적된 경제적, 외교적, 사상적 모순이었다. 특히 독일이 1880~81년의 普佛(보불)전쟁에서 승리, 유럽의 패권국가로 등장, 경제력을 바탕으로 해군력을 증강시킨 것이 영국을 자극하였다. 세계 시장을 경영하는 무역국가 영국은 制海權(제해권)을 양보할 수 없었다. 그들은, 전통적인 경쟁국 프랑스와 화해하고 독일을 主敵(주적)으로 삼게 된다. 요사이 미국이 중국에 대하여 취하는 외교전략과 일맥상통한다. 어느 강대국이 그 힘을 국제질서의 현상타파에 쏟으면 전쟁이 나는 수가 있다.

 1차 세계 대전의 終戰(종전)과정에서 연합국은 패전국 독일을 너무 몰아붙인다. 1918년 독일이 항복할 때 독일本土(본토)는 거의 침공당하지 않은 상태였다. 보불전쟁의 패전국 프랑스가 戰勝國(전승국)이 되어 가혹한 배상금을 물리는 등 복수를 하는데 이게 독일국민들에게 원한을 심는다. 이런 원한과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심을 이용하여 집권한 것이 히틀러였다. 히틀러의 등장으로 2차 대전으로 가는 길이 열린다. 1차 대전은 더 참혹한 2차 대전의 産母(산모)였던 셈이다.

 역사가들은 1차 대전 발발 과정을 많이 연구해왔다. 오스트리아를 제외하곤 진정으로 전쟁을 원하는 나라가 없었다. 그럼에도 동맹조약과 미리 짜놓은 군사전략이 서로 얽히면서 전쟁으로 끌려들어갔다. 6월의 총성이 8월의 전쟁으로 진행되는 과정은 그래서 한반도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미쳐 날뛰는 김정은이 곧 核미사일 발사 단추를 누르는 힘을 갖게 될 것이고, 일단 누르면 그 미사일이 운반한 원자폭탄이 7분 만에 서울 상공에서 터지는데, 한국은 그것을 막을 수단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오늘 대한민국 국회는 核미사일 발사 여부를 탐지하는 임무를 진 국정원을 無力化(무력화)시키는 법안에 합의하려 한다. 정치와 민주주의가 自害(자해)의 수단이 될 때는 국가적 자살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조갑제 (조갑제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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