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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무장봉기인가, 무장폭동인가?

Written by. 조갑제닷컴   입력 : 2014-03-30 오전 10:4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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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중 발췌

 * 보고서 서문 :

 제주4.3건은 우리 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많았던 참으로 비극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해방정국의 혼란기에 빚어진 이 사건으로 제주도민들은 엄청난 인명피해 뿐만 아니라 재산 손실을 입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세기가 넘도록 사건의 진상에 대한 규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많은 분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여야 합의로 마침내 지난 2000년 1월에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이제정‧공포됨으로써 정부차원의 진상규명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정부는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한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를두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활동을 해 왔습니다. 그리고 위원회 산하에 ‘진상조사보고서작성기획단’을 설치하여 진상규명을 위한 관련자료를 국내‧외에서 수집해 분석하였습니다.

 이런 작업의 결과, 위원회는 2003년 3월 29일에『제주4.3건진상조사보고서』를 조건부로 채택했습니다. 위원회는 새로운 자료나 증언이 나타나면 추가 심의를 거쳐 수정할 수 있도록 6개월의 시한을 두어 객관성과 공정성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 후 접수된 의견들을 검토, 일부 내용을 반영하여 지난 10월 15일 진상조사보고서를 최종 확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진상조사보고서는 ‘제주4.3특별법’의 목적에 따라 사건의 진상규명과 희생자‧유족들의 명예회복에 중점을 두어 작성되었으며, 4.3사건 전체에 대한 성격이나 역사적 평가를 내리지 않았습니다. 이는 후세 사가들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쪼록, 이 보고서가 ‘4.3특별법’이 제시하고 있는 인권신장과 민주발전, 국민화합에 이바지함으로써 미래로 나아가는 소중한 자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2003. 12.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위원장 국무총리

* 제주도당 내부에서 무장투쟁이 결정된 것은 1948년 2월 신촌회의에서 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신촌회의에 직접 참석하고 무장투쟁에 참여했다가 일본으로 피신, 현재 도쿄에 살고 있는 이삼룡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무장봉기가 결정된 것은 1948년 2월 그믐에서 3월 초 즈음의 일이다. 신촌에서 회의가 열렸는데, 도당 책임자와 각 면당의 책임자 등 19명이 신촌의 한 민가에 모였다. 참석자는 조몽구, 이종우, 강대석, 김달삼, 나(이삼룡), 김두봉, 고칠종, 김양근 등 19명이다. 이덕구는 없었다. 이 자리에서 김달삼이 봉기 문제를 제기했다. 김달삼이 앞장선 것은 그의 성격이 급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강경파와 신중파가 갈렸다. 신중파로는 조몽구와 성산포 사람 등 7명인데, 그들은 “우린 가진 것도 없는데, 더 지켜보자”고 했다. 강경파는 나와 이종우, 김달삼 등 12명이다. 당시 중앙당의 지령은 없었고, 제주도 자체에서 결정한 것이다. 오르그는 늘 왔으며, 김두봉의 집이 본거지였다. 해방 후 강문석은 한번도 제주에 오지 않았다. 김달삼은 20대의 나이이지만 조직부장이니까 실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장년파는 이미 징역살이를 하거나 피신한 상태였다. 안세훈, 오대진, 강규찬, 김택수 등 장년파는 이미 제주를 떠난 뒤였다.

 그런데 우린 당초 악질 경찰과 서청을 공격대상으로 삼았지 경비대는 아니었다. 미군에게도 맞대응할 생각이 없었다. 미군에 대해 다소 감정이 있었지만 그들은 신종 무기가 많은데…. 우리가 공격한 후 미군이 대응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우선 시위를 하면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정도의 생각이었다. 장기전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김익렬(9연대장)과도 회담한 것이다.

 아무튼 우리의 지식과 수준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우리가 정세 파악을 못하고 신중하지 못한 채 김달삼의 바람에 휩쓸린 것이다. 그러나 봉기가 결정된 후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니까 ‘우리의 결정이 정당한 것 아닌가’하는 분위기였다. 김달삼은 “내가 군사총책을 맡겠다”며 날짜를 통보했다. 사건 발발 10일전쯤에 날짜가 결정됐다. 노출이 안된 것은 그래도 조직이 지켜진 것이다. 4.3 발발 후 나는 정치위원으로서 김달삼과 함께 대정면 신평리에 소재한 도당 아지트에 있었다.

* 남로당 제주읍당 세포로 활동하다가 일본으로 피신한 김시종은 “나는 ‘4𔆉’을 한 3개월 정도 봤다. 6개월이면 조천까지는 해방구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본토의 군대가 반란을 일으켜 호응해 올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당시 제주성내는 습격하지 않았는데, 이는 조천 등 외곽을 장악해 읍내를 고립시키면 자연스럽게 접수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낭만적인 생각들이었다”고 증언했다.

* 남로당 제주도당 조직부 연락책으로 활동하다가 전향, 경찰관 생활을 했던 김생민은 “우리는 북한이 1949년에 쳐들어올 것으로 예상했다. 남‧북에서 양군이 철수를 하면 이젠 국내문제이고, 그러니까 미군이 철수하고 남로당 세력이 강하고 이북에는 팔로군이 들어와 있어서, 국제정세나 국내정세나 모두 유리하다고 보았다. 강경파들은 그래서 무장투쟁을 하며 조금만 견디면 된다고 본 것이고, 온건파들은 ‘우리만 고립된다’고 반대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시작된 무장투쟁 결행방침은 1948년 3월 15일께 전남 도당 조직지도원(오르그)까지 참석한 가운데 열린 남로당 제주도상위(島常委)에서 최종적으로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를 전후해 한라산 중허리 오름마다 봉화가 붉게 타오르면서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무장봉기의 신호탄이 올랐다. 350명의 무장대는 이날 새벽 도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했다. 또한 경찰, 서북청년회 숙소와 독립촉성국민회, 대동청년단 등 우익단체 요인의 집을 지목해 습격하였다. 이는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6년 6개월간 지속된 유혈사태의 시발이었다.

* 4월 3일 무장봉기 때 동원된 무장대 인원수는 350명이었고, 병기로는 99식 소총 27정, 권총 3정, 수류탄(다이너마이트) 25발, 연막탄 7발, 나머지는 죽창이었다.

* 이날 사건 중에서 신엄지서 관내 마을인 북제주군 애월면 구엄리는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구엄리는 우익인사의 영향력이 큰 마을이었다. 무장대 측 자료에 의하면 이날 구엄리 습격에 모두 120명이란 인원이 동원됐으며, 무장은 소총 4정, 다이너마이트 5발, 나머지는 죽창이었다고 한다. 지서 주변에 40명을 배치해 습격하려는 순간, 이웃 애월지서를 공격하는 습격조가 예정시간보다 30분 가량 앞당겨 행동에 옮기는 바람에 사전에 발각되어 지서 측으로부터 응전을 받아 지서 점령에는 실패했다고 한다. 그러나 송원화(宋元和) 순경이 숙소에서 피습을 받아 칼과 죽창에 열 네 군데나 찔리는 부상을 입고도 지서로 달려가 구사일생했다. 무장대는 이날 우익인사 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까지 공격해 우익활동을 하던 문영백(文永伯)의 10대 딸 두 명을 살해했다. 결국 이날 구엄리에서는 우익인사와 그 가족 5명이 숨지고 10여 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경찰관 1명이 중상을 입었고, 교전 과정에서 무장대 2명이 사살됐다.

애월지서에는 지서 마당에 폭발물이 던져졌으나 불발하여 피해를 입지 않았다. 지서 마당에는 전날 내린 비가 고여 있었는데 사제 폭발물이 성능이 좋지 않아 터지지 않았다고 한다. 애월지서 습격에는 무장대 80명이 동원됐다.

제주읍 외도지서에서는 이북출신의 선우중태(鮮于仲泰) 순경이 무장대가 쏜 총에 맞아 숨졌다. 외도지서 습격에는 무장대 14명이 동원됐으며, 총은 99식 소총 1정이었다고 한다.

조천지서는 약 한 달 전인 3월 6일 고문치사 사건이 벌어지는 바람에 경찰관 대부분이 교체돼 상대적으로 방어하기에 불리한 상태였지만, 4월 3일 새벽 무장대의 공격을 받았을 때 한 사람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에 대해 당시 조천지서에 근무했던 정도일은 “어떤 순경이 우연히 밖을 내다보다가 은밀히 지서로 접근하는 무리를 발견해 한 발의 공포탄을 쏘았는데 모두 도망갔는지 그것으로 상황이 끝났다”고 증언했다. 무장대 측 자료는 “40명이 99식 총 2정으로써 포위전은 완전히 성공했으나 사전 발각으로 퇴각”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 이날 한림지서는 습격을 받자 지서를 지킬 뿐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못했다. 무장대도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않아 지서 안에서의 피해는 없었다. 그러나 이북출신 김록만(金祿萬) 순경이 숙소인 여관에서 무장대의 공격을 받아 숨졌다. 또 다른 경찰관 2명도 각기 숙소에서 잠을 자다 기습을 받아 부상을 당했다. 한편 무장대는 경찰을 지서 안에 묶어 놓은 후 지목했던 우익인사의 집을 찾아다니며 공격했다. 독립촉성국민회 제주도 감찰위원장 겸 한림면 위원장을 맡았던 현주선(玄周善) 등이 부상을 당했다. 이로써 이날 경찰 1명이 숨지고 2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국민회와 서북청년회 등 우익단체원 6명이 부상을 당했다.

* 이날 화북지서도 피해가 심했다. 특히 화북지서는 무장대의 방화로 불길에 휩싸여 전소되었고, 이 때 지서 안에서 숙직을 하던 사환이 불에 타 숨졌다. 또한 민가에 세들어 살던 김장하(金章河) 순경과 그의 아내가 무장대의 습격을 받고 살해되었다. 결국 화북에서는 경찰관 1명, 경찰관가족 1명, 경찰사환 1명 등 3명이 숨지고, 지서가 전소되는 피해를 입었다. 화북 공격에는 무장대 14명과 99식 소총 1정이 동원됐다.

* 제2구경찰서 관할인 남원지서를 습격한 무장대는 10명이었으며, 99식 총 2정과 일본도, 죽창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무장대에게 첫 희생을 당한 사람은 대청단원으로서 지서 경비를 거들던 협조원들이었다. 협조원 방성화는 무장대가 지서 안으로 뛰어들면서 쏜 총알에 복부를 맞아 숨졌고, 또다른 협조원 김석훈은 각목과 칼에 맞았으나 가까스로 도망쳤다. 이어 무장대는 고일수 순경을 붙잡아 칼로 살해했다. 무장대는 마지막으로 지서 무기고를 부숴 미제 카빈총과 공기총, 그리고 탄알 등을 탈취한 후 사라졌다. 이로써 이날 남원지서에서는 경찰 1명과 협조원 1명이 숨지고, 협조원 2명이 부상을 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 대정골에 위치했던 대정지서에서도 무장대의 습격을 받아 경찰관 1명이 중상을 당했다. 보성리 향사를 사무실로 쓰고 있었던 대정지서는 경찰관이 3명뿐인 소규모 지서였다. 이날엔 2명의 경찰관이 지서를 지키고 있었는데, 그 중 이무웅(李武雄) 순경이 총탄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그러나 무장대 측 자료에는 이날 7명이 습격에 참여, 2발의 사격으로 경찰관 1명을 즉사시켰다고 기술돼 있다.

* 모슬포지서 소재지인 모슬포는 경비대 제9연대의 주둔지이기도 했다. 그 때문인지 모슬포지서는 습격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이날 무장대는 대동청년단 대정면 책임을 맡고 있던 강필생(姜必生)의 집에 폭발물을 투척하였다. 강필생은 폭발물 파편이 몸에 박히는 부상을 당했지만 목숨을 구했다. 이후 강필생은 경찰에 투신했다.

* 성산포지서에는 14명의 경찰관이 있었으나 이날 밤 근무자는 3명뿐이었다. 40명의 무장대가 99식 총 2정을 갖고 습격을 시도했으나 경찰이 발포하자 모두 도망가버려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 무장대 측 자료는 2정의 총이 모두 고장이 나는 바람에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히고 있다.

* 한편 함덕지서에는 이날 무장대에 의한 직접적인 공격이 없었지만, 경찰관 2명이 행방불명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관해서는 무장대와 연계된 경찰관 1명이 다른 경찰관 1명을 납치해 무장대에 합류했다는 설이 있는데, 무장대 측 자료에도 그렇게 표현되어 있다.

 이상 현지 확인을 통해 살펴본 바, 4월 3일 하루동안에 △경찰=사망 4명, 부상 6명, 행방불명 2명 △우익인사 등 민간인=사망 8명, 부상 19명 △무장대=사망 2명, 생포 1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이 피해상황을 지역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

△화북=경찰 사망 1명, 민간인 사망 2명, 지서 전소
△신엄‧구엄=경찰 부상 1명, 민간인 사망 5명‧부상 10여 명, 무장대 사망 2명, 민가 방화 4채
△남원=경찰 사망 1명, 민간인 사망 1명‧부상 2명
△한림=경찰 사망 1명‧부상 2명, 민간인 부상 6명, 무장대 생포 1명
△외도=경찰 사망 1명
△함덕=경찰 행방불명 2명
△세화=경찰 부상 2명
△대정=경찰 부상 1명, 민간인 부상 1명

그런데 이 통계는 무장대 측 자료와 차이가 있다. 무장대 측의 자료는 4월 3일 공격에서 경찰관 10명이 사망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함덕지서에서 행방불명된 2명 중 납치해간 1명을 살해했다고 해도 5명이나 차이가 난다. 그런데 세화‧대정지서 등의 사례에서 보듯 무장대는 지서 밖에서 총격을 가해 경찰관이 쓰러지면 상부에는 ‘즉사’로 보고한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로는 죽지 않고 부상을 당했다는 증언들이 있었다. 또 무장대 측 자료에는 ‘서청 사망 7명’이란 표현이 있으나, 확인할 길이 없다.

 이날 숨진 경찰관들은 마을마다 순직비가 세워져 있다. 이 때 사망한 경찰관들은 방침에 따라 순경은 경위로, 경사는 경감으로 모두 2계급 특진되었다. 이날뿐만 아니라 제주4𔆉사건이 전개되는 동안 희생된 모든 경찰관들은 2계급 특진되었다.

조갑제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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