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4일과 5월 18일
프랑스에서는 1789년 7월 14일, 부르봉 왕조에 대해 극심한 불만과 반감을 품은 한 떼의 젊은이들이 파리에 있는 국영 형무소(Bastille)의 문을 부수고 쳐들어갔습니다. 이날 경비를 맡은 간수들은 총알이 들어있는 장총을 들고 경비대장의 발포명령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경비대장은 “발포”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고 그 대신 “총대 내려”라는 명령 아닌 명령을 내렸고, ‘폭도들’은 감옥 안으로 난입했으나 한 때 볼테르를 수감했던 이 감옥에는 죄수가 몇 명 없었다고도 하고 더욱이 정치범은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합니다.
다만 ‘폭동’의 직접적 동기는 루이 16세가 당시 인기가 절정이던 네케르(Necker, 1732~1804) 수상을 왕실과의 불화설 때문에 해임시킨 사실에 일부 시민이 격분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바스티유 감옥을 ‘폭도들’이 치고 들어가서 닭 도둑, 소 도둑이 몇 명 석방됨을 계기로 프랑스 대혁명이 터지고 이는 유럽의 모든 왕조들을 벌벌 떨게 하는 거창한 변혁을 가져온 것입니다.
길로틴이라는 무서운 단두대가 설치되어 수없이 많은 저명인사들이 처형되는 가운데, 국왕 루이 16세는 물론 왕후 마리 앙뚜아네트의 아름답고 희고 가냘픈 목도 그 단두대에서 떨어졌습니다. 그 혁명은 한 10년 이어졌고, 뒤에는 ‘공포정치’가 불가피했지만 나폴레옹이라는 포병장교의 등장으로 ‘파리의 폭동’은 진압되었고 드디어 1804년 나폴레옹이 황제 대관식을 올림으로 15년 만에 프랑스 대혁명의 막은 내려진 셈입니다.
한국의 5·18은 성격이 다릅니다. 5·18은 새로 등장하는 신군부를 타도하지도 못했고 그 주동자들을 처단하지도 못했고 오히려 군사정권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습니다. 전두환·노태우·김영삼이 5·18을 처참하게 진압한 그 힘과 질서를 바탕으로 정권을 창출하였고, 호남출신의 정치인 김대중이 등장하여, “5·18은 폭동이 아니라 민주화운동이었다”고 방망이를 세 번 내리쳐, 이젠 누구도 5·18이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폭동이라고 나서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대한민국 땅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4·19는 어떻게 할 것인가 - 이것이 문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바꾸고 역사를 바꾸는 것이 혁명이라면 7월 14일과 5월 18일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시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김동길(www.kimdonggill.com) ‘자유의 파수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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