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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

Written by. 윤상호   입력 : 2015-09-17 오전 9:4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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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해 전 인천상륙작전 기념식에서 백발의 미국인 참전 노병을 만났다. 자신을 제임스 메이주어 예비역 해병중사라고 소개한 그는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 그날이 어제처럼 생생하다”며 감회 어린 표정을 지었다. “한국의 자유와 평화를 지킨 영웅들의 공을 잊지 말아달라”는 당부도 했다.

 작전명이 ‘크로마이트’였던 인천상륙작전은 제2차 세계대전의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함께 20세기 전쟁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상륙작전으로 평가된다.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 전력은 미국 함정 261척, 영국과 호주 함정 18척, 한국 함정 15척에 병력은 미 해병 1사단과 미 보병 7사단, 한국군 제1해병연대와 제17보병연대 등 7만5000여 명에 달했다. 작전을 총지휘한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6·25전쟁의 최고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적의 허를 찌른 인천상륙작전의 대성공은 6·25전쟁의 판도를 일거에 바꿨다. 인천에 상륙한 연합군은 경인가도를 따라 진격해 북한군을 격멸하고, 9월 28일 서울을 수복했다.

 이 작전은 대한민국의 꺼져가는 국운을 살려낸 ‘절대 묘수’였다. 만약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 대신 낙동강전선에서 반격작전에 나섰다면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하고 한반도 전체가 황폐화됐을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이 작전은 대한민국 건국사에 기념비적 사건이기도 하다. 만약 작전이 실패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게 많은 학자들의 견해다. 아울러 16개 회원국이 참가해 유엔군 주도로 추진된 집단안전보장체제의 첫 성공 사례라는 의미도 크다. 6·25전쟁을 계기로 약소국이 무력에 의해 병합되거나 정치체제를 강요받아선 안 된다는 원칙이 국제정치무대에 정립됐으며 이 원칙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확인됐다.

 세계 전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인천상륙작전이 예상보다 훨씬 적은 사상자를 내고 완수될 수 있었던 데는 한국군의 공이 컸다. ‘D데이’ 한 달 전부터 수행된 한국 해군과 해병대의 치밀한 작전이 주효했다. 한국 해군과 해병대는 8월 16일부터 함정 8척과 장병 110여 명으로 영흥도와 덕적도 상륙작전을 감행해 인천 수로를 확보하고, 적의 무장상태와 경계병력 규모 등을 상세히 파악해 연합군에 알려줌으로써 작전 성공에 기여했다.

 올해로 65주년을 맞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과와 의미를 더욱 뜻깊고 특별하게 되짚어봐야 한다고 본다. 2009년 6월 프랑스의 미군 전사자 묘역에서 열린 제65주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기념식에서 당시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프랑스는 당신들에게 자유를 빚졌다”고 선언했다. 한국도 메이주어 씨를 비롯한 그날의 영웅들에게 오늘날의 자유와 평화를 빚진 셈이리라. 그날의 영웅들이 목숨 걸고 지켜낸 한국이 기적 같은 발전을 이룬 것이 작은 위안이 됐으면 한다. 인천상륙작전은 한국의 평화와 번영의 상징이자 한미동맹의 소중한 가치를 일깨우는 상징으로 영원히 기억돼야 할 것이다.

윤상호 (동아일보 군사전문기자)

* 국방일보 9월17일 ‘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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