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를 위하여
“신부님들이 최근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처럼 사회 어젠다에 개입해 콩 놔라, 팥 놔라 하는 어설픈 짓거리는 삼가야”
사형제 폐지만이 과연 용서의 길인가?
2013년 2월 경 새로운 정부의 출범을 앞두고 제가 새벽미사를 다니면서 보니 성당에서 정의평화위원회의 이름으로 사형제 폐지를 청원하기 위하여 신자들의 서명을 받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항시 ‘용서하라’, ‘7번씩 70번씩이라도 용서하라’, ‘당신이 용서하는 만큼 용서받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성경에서도 읽고 있으며 또 미사 강론 중에도 항시 들으면서 신앙생활을 해오고 있습니다. 따라서 비록 사람을 여럿 죽인 살인범이라 할지라도 하느님의 크신 사랑 안에서 이를 용서해야 하고 인간의 이름으로 인간의 목숨을 뺏는 단죄행위는 사랑과 용서를 실천해야 하는 크리스찬의 입장에서 보면 반대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럴까요?
하느님의 가르침인 이 용서가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쓰라린 체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소설 ‘부초’를 썼던 한수산 씨는 5공화국 시절 필화사건으로 서빙고동 보안사 분실에서 말과 글로써 다 표현하지 못할 만큼 모진 고문을 당하였습니다. 그는 당시 이 체험을 바탕으로 ‘용서를 위하여’라는 자전적인 책을 썼습니다. 당시 고문이 얼마나 혹독하였는가는 책을 읽는 순간 제3자인 제 자신이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그 순간 한수산 씨는 인간의 존엄성은 사라지고 사랑과 평화와 같은 이 세상의 모든 추상명사는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한수산 씨는 그후 이들을 용서하고자 하였으나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신앙에 귀의하기 위하여 천주교 교리를 수강하였으나 결국 마지막 순간에 이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세례를 포기하고 맙니다. 누가 그를 믿음이 약해서 가해자들을 용서하지 못한다고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용서는 하느님만이 할 수 있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어느 신부님의 강론에서 ‘인간은 인간을 용서할 수 없다. 오직 내 안에 있는 하느님만이 용서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하느님이 상대를 용서하는 것이다’라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1960년대 일본의 미우라 아야꼬라는 작가가 쓴 ‘빙점’이라는 소설이 공전의 힛트를 친 적이 있습니다. 이 책은 우리에게 ‘인간은 인간을 용서할 수 없다. 오로지 신만이 인간을 용서할 수있다’라는 메시지를 독자에게 던져주고 있습니다.
공권력이 바로 서야 나라가 산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1898항과 1899항을 보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1898항 인간의 모든 공동체에는 그 공동체를 다스릴 권위가 필요하다. 권위의 근거는 인간의 본성에 있다. 공권력은 국가의 단일성을 위하여 필요하다. 공권력의 역할은 가능한 한 사회의 공동선을 보장하는 것이다.
1899항 누구나 자기를 지배하는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시 않은 권위는 하나도 없고 세상의 모든 권위는 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권위를 거역하면 하느님께서 세워 주신 것을 거스르는 자가 되고 거스르는 사람들은 심판을 받게 됩니다. (로마서 13, 1-2)
우리는 국가의 공권력에 복종해야 합니다. 천주교회의 성직자 중에는 성직자의 권위가 국가권력의 권위를 초월한다는 착각과 교만에 빠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지극히 위험한 사고입니다. 한때 문민정부 시절 장기농성 중인 파업자를 진압하기 위하여 명동성당에 공권력을 투입하였다가 성당 측의 엄중한 항의를 받고 정부가 곤혹스러워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는 아주 잘못된 일입니다.
우선 사제가 교만하여 자신들이 정부의 공권력 위에 존재하는 초월적인 존재로 생각하였다면 스스로의 교만에 대하여 하느님께 참회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나라의 공권력이 제대로 서야 교회의 권위도 인정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명동성당이 한 때 재야세력, 불법파업자들, 운동권학생들의 농성장으로 몸살을 앓고 있을 때 공권력의 투입을 신자들이 요구했음에도 성역(聖域) 운운하면서 공권력의 투입을 막았던 성직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공권력 위에 교회가 있다는 성역의 존재를 자신들의 권위의 표징처럼 생각하였는지 모르겠으나 이는 세속의 권세를 지향한 한심한 작태였습니다. 이들은 지극히 높으신 지위에서 이 세상에 종의 신분으로 강생하신 하느님의 겸손을 조금도 깨닫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이들이 과연 하느님의 기도하는 집을 자신들의 권위를 위하여 희생하고 있다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했을까요? 한마디로 말하면 지금 현재 우리나라에 성역은 필요도 없고 있어서도 안됩니다. 지금은 불의한 공권력이 선량한 사람들을 잡아가고 고문하는 시대가 아닙니다.
인간이 인간을 단죄해서는 안된다?
인간이 인간을 단죄해서는 안 된다는 말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사적인 영역에서 우리가 개인적으로 남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를 국가 공권력에 그대로 적용해서 국가가 살인범을 엄정하게 판결해서는 안된다고 한다면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제가 한 가지 예를 들어봅시다. 혜진이, 예슬이 사건에서 보면 범인은 그전에도 일곱차례나 살인을 저지른 인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린소녀를 또다시 처참하게 토막 내어 죽였습니다. 경찰은 너무 비참하여 시체를 부모에게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네티즌들이 무어라 했는지 아십니까? 우리나라는 실질적인 사형폐지 국가라서 아무리 사람을 죽여도 범인은 죽이지 않아 이런 일이 벌어진다고 한탄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분노하고 범인을 단죄하는 것은 인간의 정의를 위한 심성이 있다면 당연한 것입니다. 이 순간에도 범인을 하느님의 자비로 용서해야 한다고 주장해야 할까요? 그 부모와 일가 친척들 가슴에 쌓인 그 비통함은 그냥 넘어가면서 하느님의 자비를 실현하기 위하여 범인의 죽음으로 죄값을 치루게 하는 법의 심판은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면 저는 이를 위선이라고 봅니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위대한 휴머니즘을 가진 의인이라는 것을 이웃에 과시하는 위선적인 인간들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만약 이들이 진정한 사랑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그 가족들의 아픔을 가슴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심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흉악 범죄를 저지른 인간에 의해서 또 다른 피해자가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법의 엄정한 심판을 받게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참으로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의 도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Dead man walking이라는 영화는 사형제도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고 합니다. 저도 그 영화를 보면서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헬렌 수녀는 어느 날 사형수 매튜의 편지를 받고 그를 만나면서 그에게 관심을 갖게 됩니다. 이 영화는 피해자 가족의 고통과 절규도 담고 있습니다. 매튜에게 성폭행당하고 비참하게 살해된 여자의 부모는 이혼하고 가정이 풍비박산되는 비극을 당합니다. 사형수의 마지막 사형집행 장면도 리얼하게 재현되지만 그는 사형을 당하면서 비로소 참회의 말을 피해자 가족에게 하게 됩니다.
그전까지 그는 자신의 범행을 부인하면서 끝까지 자신의 회개를 거부합니다. 오히려 죽음은 그에게 구원이었습니다. 죽음이라는 형벌이 있었기에 그는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야 참회하고 사죄의 말을 죽은 여자아이의 가족에게 할 만큼 그는 양심이 마비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꼭 가족들의 슬픔과 그 비참한 심정은 외면하고 사형수에게만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까? 이들이 세상에 나와서 모든 것을 회개하고 착한 사람이 되면 더없이 좋은 일이지만 이들은 세상에서 또다시 잔혹한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때 죄 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실현하기 위하여 마땅히 죽어야 하는 사람들입니까?
흔히들 사형폐지론자들의 말을 들으면 사형제가 범죄예방에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들이 말하는 범죄 중 아마 사기나 절도등에 해당하는 범죄는 그럴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남의 물건 훔쳤다고 범인을 사형에 처하는 나라는 북한 말고는 이 세상에 없으니까요. 북한에서는 아사직전에 놓인 사람들이 정부의 곡식을 훔치면 공개 총살한다고 합니다.
흔히들 진보주의자들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말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봅시다. ‘남을 죽이면 나도 죽는다.’ 이보다 더 확실한 살인의 예방책이 있을까요? 사람을 열명이고 백명이고 죽인 사람의 인권은 중요하고 살인의 두려움에 떠는 수많은 선량한 사람들의 목숨은 이들 진보주의자, 인권주의자들의 안중에도 없는 걸까요? 이른바 진보주의자들이 혐오하는 재벌은 사형제 있으나 없으나 주변에 경호원들을 거느리고 다니니 목숨의 위협을 받을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흉악범죄에 노출되는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워 우범지역에 거주하는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서민, 소외된 사람들, 예슬이처럼 결손가정의 아이들이 바로 흉악범죄에 취약한 계층이며 이들이 사형제 폐지의 희생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을 열명 죽이든 백명 죽이든 범인을 사형에 처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양심이 마비된 인간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것입니다. 그들이 과연 인권을 생각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의 고통이 안중에 있을까요? 이들이 남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남의 재물을 빼앗아 이를 육신의 쾌락이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육신이 없어진다면 그러한 살인의 목적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이 만약 ‘남의 목숨을 빼았으면 나도 죽는다’는 사실이 뇌리에 박히는 순간 남의 목숨을 그처럼 쉽게 빼앗을 수 있을까요?
이제 제가 생각하는 결론을 말씀드리도록 한다면 인간이 인간을 용서하는 것과 국가공권력이 엄정하지 못하고 용서를 앞세우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왜 흉악범이 날뛰고 성폭행, 살인 같은 강력한 사건이 빈번하게 벌어집니까? 그것은 나라의 공권력이 제대로 서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웬만한 살인사건은 계획적 고의적 살인이라 하더라도 기껏해야 징역 6~7년 정도의 형량에 그칩니다. 심지어 이들이 풀려나오면 이들을 고발했던 사람에게까지 보복하려고 해서 오히려 이들을 고발하였던 선량한 사람들이 이들의 보복이 두려워 공포에 떠는 공권력 부재의 상황이 지금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형선고 받는 흉악범들은 글자 그대로 사람을 10여명씩 양심의 가책없이 죽였던 인면수심의 인간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들에게까지 하느님의 용서를 앞세워야 할까요?
정의평화위원회, 그들만의 정의
저는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가 새로운 정부 출범을 앞두고 사형제 폐지라는 사회적 이슈에 개입하는 것에 대하여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떤 사회적 이슈에 대하여 세속의 입장과 교회의 가르침이 반드시 같을 수 없으며 경우에 따라 사회전반의 사정이 교회의 가르침을 수용할 수 없을 때 이를 강요하는 것은 갈등을 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교회에서는 인공적인 피임을 금하지만 일반 사회에서 이를 그대로 따를 수 없습니다. 이 경우 믿음을 가진 신자가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이를 일반사회 시민들에게까지 법제화를 요구한다면 엄청난 갈등을 일으킬 것은 불 보듯 뻔합니다.
정의평화위원회는 대선 전 12월 9일 인권주일 담화문에서 특정정파의 주장을 대변하면서 대선에 노골적으로 개입한 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정의평화위원회의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의 문재인 후보는 선거에서 지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정의구현사제단의 정의는 그들만의 정의였고 그들이 주장하는 평화는 그들만의 평화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정의와 하느님의 평화를 우리에게 전하는 성직자들이 아니었습니다.
다음은 인천교구 정의평화위원장이라는 장동훈 빈첸시오 신부가 2012년대선을 앞두고 인천교구 정의 평화지에 쓴 글입니다. 여러분은 이 글에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용서와 화해, 그리고 형제에 대한 사랑을 말씀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떠오릅니까? 아니면 광신적인 노사모의 무리들이 떠오릅니까? 하느님은 우리에게 한없는 사랑을 베푸셨으며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이웃에서 보라는 계명을 받았습니다. 이와 같은 선동과 파괴적인 언어에서 여러분은 주님의 사랑을 찾아 볼 수 있겠습니까?
고통이 범람하여 들판과 도성, 골목 어귀까지 차올랐다. 엔간한 곡소리에는 이미 내성이 생긴 불감증의 시대, 돈이 기어코 신의 자리까지 찬탈해버린 약육강식의 야만의 시대. 이 끝자락에서 세상을 살릴 방도는 무엇일까?
이것이 흉악범들도 사형시켜서는 안 된다는 사랑으로 가득 찬 신부의 글입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정의평화위원회 주교님과 신부님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제는 신부님들이 최근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처럼 사회 어젠다에 개입하여 콩 놔라, 팥 놔라 하는 어설픈 짓거리는 삼가하여 주십시오. 과거 노무현 대통령 참여정부 시절에 노사모가 주축이 된 정치세력들이 행한 짓거리를 기억하십니까? 그들은 가난한 자와 부자, 기득권자와 소외된 자, 강남사는 사람과 강북사는 사람, 노동자 ∙ 농민과 재벌의 이분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로지 “우리편 모여라”라는 진영논리에 빠져 화합을 이루지 못하고 허덕였습니다. 지금 정의평화위원회의 신부님들이 하는 짓거리가 바로 그들과 똑같은 행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편 가르고 미워하면서 세상을 구하겠다는 메시아의 환상에 빠져 있다면 지금이라도 이에서 벗어나십시오.
사형제 폐지 운운하면서 자신들만이 진리를 독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교만함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최소한 사형제의 유지를 원하는 사람들도 당신들만큼 가난한 사람을 생각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가져주십시오.
참된 용서를 보여 주였던 한수산 씨
고문의 아픈 기억으로 괴로워하며 가해자를 용서할 수 없었던 한수산 씨는 나자로 마을의 이경재 신부님을 만나고 백두산에서 천지를 바라보면서 이들을 용서함과 동시에 세례를 받습니다. 그리고 가톨릭 신문에 연재하고 있는 ‘아! 최양업’등과 같은 가톨릭에 관련되는 글만을 쓰기로 결심합니다. 그 후 그는 하느님께서 자신을 당신의 도구로 쓰시기 위하여 자신에게 그와 같은 시련을 주셨다는 것을 깨닫고 그 순간 전율을 느꼈다고 그의 책 ‘용서를 위하여’에서 썼습니다. 저는 이 책에서 한 사람의 깊은 성찰과 이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용서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정의평화위원회의 사제들이 펼치는 사형제도폐지 운동에 어떠한 공감도 느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표피적이고 천박하며 교만한 그동안의 행태에서 말할 수 없는 환멸을 느껴왔기 때문이지요. 최근에 정의평화위원회는 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면서 또다시 그들만의 정의와 그들만의 평화에 갇힌 편향된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이제 평신도들은 그들이 어떤 주장을 하더라도 그들이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사제라는 점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konas)
김원율(대한민국수호천주교인모임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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