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은 현미경이 아닌, 망원경(望遠鏡)을 들어라

세계질서가 미국 주도 아래 발 빠르게 재편되어가고 있는 시기에 유독 한국의 시계는 거꾸로 돌고 있다. 집권세력은 '안보환경의 변화' '경제 살리기' '중장기 비전 가다듬기' 등은 애써 외면하고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는 일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21세기 초입에서 국운(國運)을 열어 나가자면 성능이 좋은 망원경(望遠鏡)을 들어야 하는데도 50년 전의 과거사(過去事)를 미주알 고주알 들여다볼 수 있는 현미경(顯微鏡)만을 고집하고 있다.
정치판의 미룰 수 없는 과제로 떠오른 '친일·반(反)민족행위 진상 규명을 위한 특별법 개정안 작업' 등 15개의 과거사 진상규명 특별법 추진이 바로 그것이다. 국회 내 '제 1당'으로 부상한 집권여당이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명분 아래 살풀이를 고집하고있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과거사 청산작업'이 말처럼 쉬울 까닭이 없다. 그것은 결국 우리의 근대사와 현대사에 대한 재평가작업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는 어려운 작업이다. 객관적이고도 중립적인 안목 아래 지속적으로 추진되어야 할 학문적 과업이기도 하다. 또한 어떤 경우라도 이로 인해 미래 한국의 발전에 장애가 되어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학계의 소임(所任)이자, 사가(史家)들에게 주어진 역할일 뿐, 정치계가 주도적으로 개입하여 나설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이 더더욱 정부나 집권여당이 감당할 일일 수는 없다. 정부는 그 일이 학계에서 엄정하게 진척될 수 있도록 지원하고 관리하는 것으로 족하다. 이 과업이 정파적(政派的) 이해에 따라 선악의 의미가 달라져야 할 일은 아니질 않은가.
'역사 바로 세우기'만 해도 그렇다. 그것이 순수한 학문적 필요성에서 출발하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다. 작은 흠집이라도 발견하여 마치 뿌리 전체가 썩어있는 양 부풀려 정략적 이득을 챙기기 위한 속셈이 전제되어 있거나 '정치적 목적'이 개입되어있을 경우 정치판은 시시비비를 가리기도 전에 이전투구(泥田鬪狗)의 장터로 변모하고 말 것이다.
정치의 세계에서는 매사 한쪽은 옳고 다른 한쪽은 그른- 이분법적인 결말을 요구한다. 내가 '선'(善)일 때 상대방은 '악'(惡)이어야 하는 곳이 정치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한가지 특정한 정답만이 존재하는 '단답형(單答型) 사회'가 아닌데도 정치판은 선(善)과 악(惡)- 어느 하나만을 강제한다.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 승자와 패자가 판가름나고 만다.
같은 이유로 '절대 선(善)'과 '절대 악(惡)'이 공존할 뿐, 차선(次善)은 존재하지 않는 곳이 정치판이다. '사회정의'나 '공동선(共同善)' 역시 상대방을 선제(先制)할 수 있어야 생존 가능한 개념일 뿐이다. 민초(民草)들의 관심권 울타리 밖에서 격렬한 시비와 입씨름 및 주먹다짐이 오가기도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이다.
친일(親日)청산문제 역시 바로 그 꼴이다. 세계가 촌각을 다투어가며 경쟁하는 21세기 초에 반세기 너머 59년 전의 과거사(過去事)를 까뒤집어 '역사 바로 세우기'에 나서자고 하는 나라가 또 있을까. 대한만국 역사의 수레바퀴는 분명 거꾸로 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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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처음 공개된 상해임정(臨政) 당시 국무위원을 역임한 김승학이 백범(白凡)의 지시를 받아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반민특위' 살생부(殺生簿) 초안에서 거론된 친일파 족보 역시 고작 263명이었다.
그러나 현재 국회가 추진중인 ‘일제 강점 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개정안'에서는 친일행위가 21개 범주에 걸쳐 망라되어있고, 조사 대상자가 어림잡아 10만명을 넘으며, 조사위원회의 활동기간도 현행법상의 3년을 뛰어넘는 장기간(長期間)이 될 것으로 알려졌다.(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시민연대와 '민족 정기를 수호하는 국회의원 모임' 주최 '특별법 개정안'설명회에서 시민연대의 한상구 개정안 기초소위 위원 언급)
이번 '친일·반민족행위 진상 규명작업'이 '민족의 정통성 되찾기' 또는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이 아닌, '역사 뒤집기'를 겨냥한 '한(恨) 풀이'차원에서 계획되고 추진되고 있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우리의 정치판이 21세기 들어서도 여전히 국가안보와 민초(民草)들의 삶을 담보로 '죽기 아니면 살기' '아군(我軍)이 아니면 적(敵)'이라는 투의 이분법적 사고(思考)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있는 현실이 통탄스럽고 부끄럽기만 하다.
우리 정치판이 언제쯤에나 '삼류(三流)정치 때깔의 헌옷'을 벗어 던질 수 있을 것인가. (konas)
정 준(코나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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