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본 송두율 재판
지난 7월 21일 서울고등법원은 송두율에 대한 항소심 공판에서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의외의 일이었다. 여론은 양분됐다. 시대흐름에 맞는 정당한 판결이라며 환영하는 목소리와 실망스럽지만 대법원의 판단을 차분히 지켜보자는 입장으로 나뉘었다.
송두율 재판에서는 그가 반국가단체의 간부 내지 지도적 임무에 종사했는지 여부가 핵심쟁점이었다. 외형상으로는 검찰이 기소하여 피고인의 단죄를 사법부에 의뢰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거꾸로 보면, 이 재판의 실질이 잘 드러난다. 실제 피고인은 국보법이었던 것이다. 군사정권 시절 해외에서 민주화운동을 했고, ‘내재적 접근’이란 방법론을 개발해 북한에 대한 인식론적 지평을 넓혔으며, 남북학술교류를 통해 남북화해・협력에 기여한 자를 부당하게 박해하는 국보법은 ‘악법’으로 이제 폐지돼야 하는 것 아닌가. 이 점에 대한 판단을 재판부에 물은 것이었다.
문제 제기자는 송두율의 입국을 추진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였다. 일각에서는 송두율의 입국 배후에 북한이 있다고 의심하기도 한다. 북한이 남한의 민주화운동단체를 매개로 벌인 ‘기획입국’의 의혹이 그것이다. 이게 사실이라면, 북한이 국보법 철폐를 앞당기기 위해 송두율을 남한으로 들이밀어 넣은 것이라 해야 옳다. 이와 같은 가정은 남조선 혁명을 추구하는 북한의 대남전략에 비추어 신빙성이 있다.
노동당규약에서 천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 북한의 당면목표는 남조선에서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혁명 과업을 완수하는 것이다. 그동안 북한은 남조선 혁명의 최대 걸림돌로 국보법을 설정해 온 터이다. 그럴진대 우리의 민주적 사법체제와 형사증거법이 북한의 국보법 철폐기도에 장단을 맞춰선 안된다. 그것은 우리의 법으로 우리의 안보를 스스로 허무는 결과가 된다. 국가의 존립・안전 위협에 대한 대처는 국법질서의 근간을 이룬다. 국가안보는 형법보다 상위법인 헌법의 엄숙한 명령이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만큼 범죄에 대한 엄격한 증명의 요구는 일반 형사범에게 적용되는 것이지 반국가사범에게까지 기계적으로 적용할 것은 아니다. 특별사정의 고려는 모든 법체계에 내재하는 기본원칙이기 때문이다. 북한의 고위급 대남 공작원이란 강한 의심이 있는 경우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 때는 ‘완화된 증명의 요구’로 족하다고 봐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누구보다도 북한 고위층을 잘 아는 사람은 황장엽과 임동원이다. 이 두 사람이 모두 송두율을 김철수라는 가명을 사용하는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인정했다. 특히 황장엽은 나의 증언을 믿지 않는 것은 곧 내가 노동당의 국제담당 비서였고, 김일성대학 총장이었으며 주체사상을 확립한 철학자였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것과 같다고 강조한다. 그러기에 황장엽의 증언은 인적 증거로서의 고도의 증명력을 갖는 것으로 평가함이 마땅하다. 피고인의 자백이 없다고 황장엽의 귀중한 증언, 즉 전문(傳聞)증거의 증거력을 부정하는 것은 남북관계의 특수한 현실에 비춰 타당하지 않다. 게다가 공식적인 선출 및 공표 절차의 부재를 들어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보기 어렵다는 판시는 대남 공작원의 비공개성을 감안하지 않은 것이었다. 다른 지도급 인사도 만나기 어려운 김일성, 김정일을 수시로 만났고 로동신문에 김일성과 함께 찍은 사진이 게재된 사실은 송두율이 노동당 간부 내지 지도적 임무에 종사했음을 방증하는 게 아닌가. 재판부가 대남 공작활동과 관련된 수많은 정황증거의 증거력을 인정치 않은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국정원은 지난 22년간 송두율의 정체를 밝히려고 추적을 계속해 왔다. 국정원의 전문성을 무시한다면 대공수사기관은 있을 필요가 없다. 요컨대 엄격한 증명의 요구도 국가안보 사안에서는 예외를 인정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항소심 판결은 대법원에서 바로잡아져야 한다. 이번 판결이 국보법 폐지 논쟁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됐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유민주체제의 안전판인 고유의 안보 형사법은 계속 유지돼야 한다. 문제가 있다면 보완하면 된다. 폐지는 시기상조다. 그리고 송두율 재판은 재판 ‘기획자’의 뜻대로 춤추게(?) 해선 안된다. 국민적 사법감시가 필요한 이유다. (kon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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