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라는 감상적 이데올로기의 虛와 實
'표류하는 한국군(軍)'이란 제하의 외신기사가 있었다. "정치와 (군 내부)추문이 군(軍)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는 것이 주된 메시지이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스위크가 최신호(1월 17일자)는 바로 이런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이런 구절도 보인다.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북한과 더 긴밀한 우애를 나눠야 하고, 미국으로부터는 보다 자주적이어야 하며, 군(軍)을 포함한 모든 한국인은 북한과 평화 공존하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이 기사는 이렇게 결론짓고 있다. "이런 혼전(混戰) 속에서 첫 번째 사상자는 총을 든 사람들(軍)인 것 같다"
뉴스위크지는 최근 몇 년 사이 우리사회(남한)에 불어닥친 '좌파(左派)민족주의'의 흐름을 꼬집고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근년 들어 '민족주의' '반(反)민족적' '민족공조'- 이런 어휘들이 넘쳐나고 있다. 개개인의 이념적 성향을 구분하여 편가르기 하는 데에도 서슴없이 동원된다.
우리 주위에는 '민족주의'를 좌파(左派) 고유의 이념으로 알고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적지 않다. 그래서 '민족주의'라는 어휘 앞에는 통상 '좌파(左派)'라는 말이 붙어 다닌다. 이 말에는 '민족주의자는 모두 좌파(左派)다' '좌파사상은 민족주의에서 발원한다'라는 암묵적인 의미가 실려있다. 과연 그런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공산주의의 표징과도 같은 슬로건이다. 마르크스의 묘(墓)에 새겨져 있는 이 비명(碑銘)은 그가 엥겔스와 함께 펴낸 저서〔선언〕의 대미를 장식하는 글귀였다. 바로 이 슬로건이 말해주듯이 공산주의자들은 '민족주의' 아닌, 국제주의를 표방해왔다.
공산주의 이론 가운데 "자본주의 열강의 민족주의 구호에 속아 자신의 계급을 배신하지 말라"는 말이 이를 뒷받침한다. 레닌을 포함한 좌익사상의 원조들은 이처럼 민족주의를 자본주의의 전유물(專有物)로 보았다.
좌익사상가들은 자본주의 열강들이 19세기말∼20세기초 열강들이 민족주의로 무장하고서 서로 살상과 파괴행위를 '마다 않는 세(勢)다툼을 편협하다고 보고 철저한 국제주의를 지향했다. 열강들의 각축 현장을 목격하면서 국제주의를 지향해야 할 필요성을 확신했던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이처럼 제국주의 열강의 자본주의 체제와 이들 국가의 민족주의를 부정하고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들의 이런 지향성은 코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에 잘 나타나있다. 좌파이념을 집약적으로 드러내 보인 사례가 범세계적인 공산주의 조직운동인 '코민테른'이다. 서구(西歐) 각국의 좌익정당들이 오늘날에도 국경을 넘어 협력하는 전통은 바로 그런 역사성에서 연유한 것이다. 좌익사상과 민족주의는 오월동주(吳越同舟)나 다름없고, 궁합이 안 맞는 서로 이질적인 음식이다.
'민족' 또는 '민족주의'라는 어휘는 사람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 자체만으로도 문화적으로 귀소본능을 느끼게 하는 그 무엇이다. 그런 이유로 민족주의는 앞으로도 지키고 가꾸기에 따라 무한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범국민적 에너지원이기도 하다.
그러나 북한이 내세우는 민족주의는 바로 이런 점을 겨냥한 정치적 의도가 숨겨져 있다. 독극물과도 같은 '술수'인 것이다. 저들은 '국제주의' 아닌, '민족주의' '민족공조(共助)'를 앞세워 톡톡히 실리를 취하고 있다. '민족공조'는 남한의 대북협조 명분을 심고 남북한이 함께 대미(對美)항전에 나서도록 유도하기 위한 방편임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다(多)민족국가 중국이나 미국에는 '민족주의'라는 어휘 대신 '국가주의 원리(中華思想)' 또는 '기독교적 지도원리(God bless you)'가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김치 맛을 못 잊어하는 사람들' '된장 냄새에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이다. 아직도 농경문화가 일상생활 구석구석에서 숨쉬는 우리 민족에게 민족주의는 그 말만으로도 가슴을 울컥하게 만드는 '감정적 이데올로기'(Calton J. Hayes의 定義)로 작용한다.
북한당국자들이 '민족주의'를 억척스럽게 고집하는 이유 역시 바로 이점이다. 우리(남한)를 민족주의라는 '이념 공동체'로 이끌어 한미동맹(同盟)체제에 맞서도록 유도하고자 하는 간계가 숨겨져있는 것이다. 우리가 맹방으로서의 신뢰를 저버리고 저들이 의도하는 실체도 없는 무정형(無定形)의 민족정서에 놀아날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그리고 선진화 세계화를 지향해야 하는 상황에서 어떤 경우에도 폐쇄적인 '민족주의의 울' 안에 자신을 가두고 왜곡된 논리로 자폐증(自閉症)환자가 되기를 자청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konas)
정준(코나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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