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권의 역사 1. 운동권의 태동
손자병법에 知彼知己 百戰不殆 라는 말이 있다. 현재 애국세력들은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않던 국가체제를 위협하는 세력들과 대결 중이다. 이 중에서도 가장 큰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운동권 세력들이다.
운동권이라는 표현은 원래 사회변혁운동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를 줄여 운동권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운동권은 서구사회의 사회개혁운동과는 달리, 대부분 공산주의 혁명을 추구하는 사람들로 반(半)합법, 비(非)합법적인 정치활동을 하는 일단의 세력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또한, 그 지향하는 바가 주로 사회주의 혁명 노선이나 기존 사회체제, 질서의 해체를 추구하고 있어 운동권이라는 말은 곧 혁명세력이라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운동권은 그 뿌리를 1927년 결성된 사회주의동맹 등에서 찾지만, 현재 우리사회에서 나름대로 세력을 갖춘 운동권의 시초는 1940년대 일본 공산당으로부터 사회주의 영향을 받아 해방 후 남로당 등을 건설한 세력들에게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필자 또한 처음에는 현재 활동하는 운동권들의 역사를 30년이 채 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으나, 현재 운동권의 원로로 불리는 자들과 각종 기념 사업 등에서 나타나는 자들의 인명 기록을 토대로 파악한 바 이들의 역사가 반세기를 넘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에 이들의 역사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1940 년대 ~ 1960 년대 초
1940년대 해방 직전까지 한반도의 독립을 위한 다양한 세력들이 활동했다. 그 중에서 공산주의 세력 또한 독립 운동을 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들 중에는 독립 운동 세력 강화의 차원에서 공산주의와 연대를 시작한 계열과 국제 공산주의 혁명을 위한 방편의 하나로 독립 운동을 지원한 세력이 있었다.
전자는 주로 중국 팔로군 등에서 활동한 일부이며, 후자는 소련군으로 활동한 세력과 일본 공산당의 영향을 받아 활동한 세력들 위주였다.
1945년 해방 이후 한반도의 독립과 정부 수립에 대한 심각한 혼란이 있었고, 이 와중에 북쪽은 소련군의 점령 하에 공산주의 세력이 정치 주도권을 쥐게 된다.
반면, 남쪽의 경우에는 미군정 등의 지지를 얻은 미주 지역 독립운동 세력, 일본 등에서 귀국한 세력, 중국에서 귀국한 임시정부 세력 등이 서로의 의견을 내세움으로 인하여 상당히 혼란스러운 정국이 지속됐다.
이런 와중에 생겨난 것이 바로 남조선 노동당이다. 이 남로당 계열 이외에도 사회당, 민족 진보당 등 다양한 공산주의 계열 정치 세력들이 서로 간의 헤게모니 쟁탈전과 남한 내부의 불안을 야기하기 위해 폭력을 벌이는 일이 끊이지 않았다.
그 대표적 사건들이 조선공산당이 선동한 서울대 종합화안 반대 사건(1946년 8월), 조선공산당이 운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남한 내 위조지폐를 만들어 유통시킨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1946년 5월), 남조선노동당의 지령에 따라 일어난 9월 총파업 사건과 10월 대구폭동사건, 1948년 UN 결의에 따라 파견된 UN한국위원단의 활동을 저지하기 위해 일어난 무장 폭동인 2.7 폭동 사건 등이 있다.
결국, 한국 전쟁을 겪고 난 후에야 1940 년대 남한 내에서 지하당 구축 및 공산주의 혁명을 시도하던 세력들이 표면적으로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이들은 북한 정권의 지원 하에 지하에서 그 명맥을 유지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전쟁 이후 1950년대 전반은 지하조직과 운동권에 의한 남북 대결보다는 주로 무력 시위를 통한 열전의 형태를 띄었다.
이후, 1960년 4.19 의거가 일어나고 제2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사회 전반적으로 급격한 변화를 추구하고 시위를 하는 것이 당연시 됐다.
북한은 이 때를 남조선 해방의 시기로 간주, 한국전쟁 이후 지하 활동을 하던 세력들의 합법화를 통해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키고자 했었다.
이 때 당시 가장 유명한 것이 1961년에 만들어진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이다. 처음에 이들은 1943년 김창숙 등이 주축이 되어 만들었던 ‘민족건양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생겨난 중도적 단체였으나, 이후 남조선해방전략당, 사회당 등의 혁신계 정치인, 지식인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새로 들어온 사람들의 공산주의적 시각에 동화되어 점점 더 좌익 색채를 띄게 된다.
또한, 당시 미국에서 활동하던 재미정치학자 김용중을 내세워 그의 ‘영세중립국화를 통한 민족통일’만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주장하면서 미국, 소련을 배제하고 무장해제를 하여 ‘영세 중립국’을 만드는 것만이 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내부적인 지배권은 북한과 연계한 세력들에게 빼앗김으로써 중도적이라는 위치는 잃어버렸다. 한편, 5.16 혁명을 계기로 수많은 좌익 단체들에 대한 검거가 실시됐고, 이 중 상당수의 친북-연북 좌익 단체들이 해산됐다.
그리고, 운동권 세력들은 다시 지하로 숨어 들게 된다. 이 시기 매우 중요한 사실들 중 하나가 바로 현재 운동권의 뿌리가 되는 소위 원로라는 자들이 이 때 참여했던 공산주의 계열이라는 점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종린 汎民聯 명예의장, 나창순 汎民聯 남측본부의장 겸 통일연대 상임대표, 정효순 汎民聯 대전-충청 의장, 김규철 汎民聯 서울의장, 서상권 汎民聯 부경연합의장 등 80대 운동권 인사들 대부분이다.
1960년대 ~ 1970 년대 초반
5.16 이후 한국 정부의 강력한 반공 정책과 계속된 북한의 무력도발 때문에 국민들의 반북 정서는 심화되고 지하세력은 그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한편, 북한은 4.19 당시 적화통일의 기회를 놓쳐버린 것을 크게 후회하며 제2의 4.19를 만들기 위해 직접 간첩을 남파하여 지하 조직을 구축하고, 무력 도발을 통한 사회 불안을 조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이 시기의 사건으로는 동백림 사건, 통일 혁명당 사건 등이 있으며, 이 때 소위 지식인들 대부분은 자신이 북한의 조종을 받는지도 모르고 북한이 주장하는 것 중 어느 정도 온건한 방향을 지지하다 이용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북한의 시도 중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통일 혁명당’ 사건이다. 이 사건은 1964년 3월 15일 공작원 김수영을 따라 월북한 김종태가 북한노동당 대남사업총국장 허봉학으로부터 “지하당을 구축하여 혁명을 완수하라”는 지령을 받고 남파되어 지식인, 학생, 노동자, 농민 등을 광범위하게 포섭, 적당한 시기가 되었을 때 수도를 점령하고 무장봉기를 통한 내전 상황을 일으키려 했던 사건이다.
그러나, 조직이 대부분 검거됨으로써 북한의 시도는 실패하고 이 사업을 지시했던 허봉학은 숙청당했다. 당시 사건 주모자인 김종태는 북한에서 차관급으로 대우받던 거물 간첩이었으며 현재 해주에는 그의 이름을 딴 사범대학이 있을 정도이다. 이 사건이 마무리 됐을 때 한국 정부는 한시름 놓았다고 생각했지만, 이때부터 본격적인 학생 운동권의 발아가 시작됐다.
특히, ‘청맥’ 등의 좌익 편향적 잡지들이 발간되고, 최고 학부라는 서울대 학생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많은 학생들이 좌파적 시각에 대한 호감을 지니게 됐다. 이 사건에 연루된 사람 중 유명한 사람이 바로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 한명숙 前 여성부장관의 남편인 박성준 성공회대 교수 등이다.
이들은 남한 내에서 본격적인 운동권의 뿌리로써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때까지만 해도 운동권들은 주로 이념서클 등을 중심으로 지하활동에 주력했을뿐, 본격적인 사회활동은 하지 않던 시기였다.
1970년대 중반 ~ 1980년
1970년대 중반부터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 발표와 이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 등으로 사회적 혼란이 일어났고 지하 세력들은 4.19 실패의 교훈을 기억하고 있기에 유신으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불안요소를 놓치지 않았다.
한편, 북한에서는 1970년 11월 제5차 당대회에서 민족해방민중민주혁명(NLPDR)이 처음으로 한반도 공산화 정식전략으로 규정되었으나, 남한 내 지하좌익 세력들이 이를 한국 사회에서 공개적으로 천명할 단계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그러나, 유신 선포와 전태일 분신 사건 등으로 노동 문제에 대한 관심과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늘어나자 지하 세력들은 학생, 지식인, 노동자들이 열망하던 것을 이용하여 지하 조직을 토대로 독재를 타도하고 민주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사상적 토대가 필요하다며 각종 이념 서클을 통해 공산주의 이념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까지만 해도 운동권 내에서조차 북한과의 연계사실은 금기사항 이었기에 지하 세력들은 공개적으로는 사회주의적 발언을 내뱉지 않았다. 또한, 자금지원, 법률지원, 투쟁교육 등으로 학생 세력들의 측면 지원에 주력했을 뿐 혁명을 수행할만한 전력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판단, 직접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이때부터 민주화 운동과 민중 운동에 좌익 색채가 본격적으로 스며들기 시작했고 1975년 경에는 처음으로 ‘정치투쟁론과 현장론’으로 구분되는 내부 사상 논쟁이 발생했다.
이 논쟁의 핵심은 서울대 내 지하 이념 서클인 ‘한국문학연구회’의 “정치 투쟁이 투쟁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의견과 ‘한국사회연구회’의 “노동운동, 민중운동이 투쟁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의견의 대립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논쟁은 단지 투쟁방법에 대한 논쟁이었을 뿐 그들의 큰 줄기를 바꾸지는 못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때는 남북한 간의 치열한 첩보 전쟁 와중에서 학생 운동권들이 양쪽으로부터 희생당한 사례가 많았는데 바로 인민혁명당 재건사건(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연합회 사건(민청학련 사건, 1974년) 등이 그것이다.
한편, 북한 사상 최고의 간첩으로 불리는 정경희는 이 때 남파공작을 통해 대규모 공작망을 구축하여 그 공로로 장관급인 대외연락부장이 되기도 했고 채수정은 남한 내 7개 간첩망을 구축-운영하다 1974년 5월 검거되기도 했다.
이중 정경희의 공작망은 지금까지도 파악이 안될 만큼의 거대한 규모로 최근 열우당 이철우 의원이 관련되어 논란이 됐던 조선노동당 중부 지역당조차 정경희로부터 물려받은 조직 중 일부를 발전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이와는 별개로 지하세력들이 일으킨 남조선 민족해방전선 사건(남민전 사건, 1979년)은 6.25 이후로 계속된 지하당 세력들이 지하당 재건과 좌익 혁명을 추구하여 벌인 사건으로 관련자가 100명이 넘는 대규모 사건이었다.
이 시기 좌익 사건의 특징은 사건 관련자의 대부분이 순수하게 민주화를 열망하는 젊은이들과 노동 환경 개선을 추구하는 노동자, 사회의 불합리에 반대하는 지식인들이 다수로써 親北 세력과의 연계, 사회주의 혁명에 대해서는 철저히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사건의 핵심 세력들은 親北 세력과 연계를 통한 좌익 혁명을 추구했다는 점이다.
결국 대다수의 참여자들은 핵심 세력들에 의해 이용당하여 결국 좌익 세력으로 함께 매도 당했고, 실제 좌익 세력들은 그 당시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념적 성향을 숨긴 채 민주화를 부르짖으며 참가자들을 선동하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경향은 그 당시의 참가자 중 소위 핵심으로 불리는 자들과 민주화, 노동운동 등에 대한 지향으로 참가한 사람의 현재가 명백하게 다르다는 것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는 사실이다. (kon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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