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양 여운형(呂運亨)에 대한 서훈(敍勳)이 뜻하는 것
오는 3·1절에는 그동안 좌익(左翼) 또는 사회주의 계열이라는 이유로 미루어져왔던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등 131명 안팎의 독립유공자에 대한 서훈(敍勳)추서가 이루어질 전망이다. 그것은 좌익일지라도 항일 독립운동 공적이 인정되면 그 반열에 화려하게 오르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8·15 해방 60년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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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이 누구인가를. 우리는 그를 해방전후사(前後史)에서 만날 수 있다. 여운형은 해방공간에서 뛰어난 웅변술과 카리스마로 한 시절을 풍미한 대중 정치인이었다. 한반도는 그의 정치적 운신(運身)에는 너무 좁아 멀리 모스크바 유럽 중국 등에까지 오지랖을 넓힌 인물이다.
그의 정치행적은 상해(上海)임정 초기인 1920년 일제치하에서부터 대한민국 정부수립 직전의 해방공간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는 1920년 이동휘(李東輝) 등과 함께 고려공산당의 창당 멤버로 참여했다. 3·1독립운동 봉기와 상해임정 태동 이듬해의 일이다. '공산당 선언'과 '공산주의 ABC' 등을 최초로 한국어로 번역했던 것도 바로 '그'였다.
그는 1920년대에 소련을 방문하여 레닌·트로츠키·스탈린 등을 두루 만나면서 좌익운동에 관여했고, 중국 공산당 당원 대우를 받으면서 모택동 등과도 여러 차례 회동(會同)하며 아시아와 한반도의 미래에 대한 담론을 나눴었다.
그런가하면 중국 혁명운동의 총수였던 손문(孫文)과 장개석(張介石) 그리고 일본의 다나카(田中) 육군대신 등 숱한 명사들과도 만나 대담(對談)하고 담판하면서 자신의 정치리더십을 우뚝 세워나갔다. 1926년 중국 국민당 제2차 전국대표회의에는 조선 대표로 참석하여 베트남의 호치민과 나란히했던 그였다.
그는 당시 범세계적 냉전구도가 아시아와 한반도에 얼마나 가공할만한 비극을 초래할 것일까를 우려하여 올바른 길라잡이 역할을 모색하고자 고뇌했던 인물이었다. 거시적 시야를 갖춘 선각자였다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공산주의 사관(史觀)을 지니고 있었다.
1945년 해방공간은 남북의 이해(利害)가 난마처럼 얽힌 시기였다. 북쪽은 남쪽에 대해 소련이 앞세운 김일성 세력의 공산주의 정권 수립 계획을 밀고 나가면서 통일정부 수립을 방해하기 위해 분열을 선동하던 시기였다. 한편 남쪽에서는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려는 세력' '김일성의 지시대로 공산주의 국가를 수립하려는 남로당 세력' 그리고 '이들 간의 합작을 추진하는 중간파 세력'- 이 3세력이 치열하게 상쟁(相爭)하던 때였다.
몽양은 해방 후 중도좌파(左派)를 표방하며 '좌우 합작운동'을 주도했었다. 그가 주축이 되어 만든 건국동맹과 건준(建準=건국준비위원회)의 140여개 전국조직망을 동원하여 밀어붙이려 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소련의 무력지원과 자체 무장조직 및 전국적인 세포조직망까지 갖춘 공산세력>과 <비무장 우파 세력>간의 명분만의 합작 구상일 뿐, 사실상 <공산화>지향이었다.
그가 표방했던 이상을 좇아 '좌우(左右)합작'이 이뤄졌더라면 한반도는 좌익세력의 봉기에 의해 소련의 변방(스탈린주의를 추구하는 공산주의 국가)으로 추락하고 말았을 것이고,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은 지구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그의 구상과 전략이 '순수한 민족주의적 틀'에서 출발한 것이라는 평이 없지 않았지만, 그 모태가 됐던 '건준(建準)'은 기실 좌익 토양의 '인민공화국의 전신(前身)' 성격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이 정설(定說)이다. 그의 좌우합작 운동 시도는 그런 이유로 패착(敗着)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가 해방 직후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가 미 군정(軍政)과 우익세력의 인정을 받지못해 실패했던 해프닝으로 미루어 알 수 있는 일이다.
20세기 한국 근대사에서 명멸했던 무수히 많은 인물들 가운데 여운형만큼 정치적 이념의 색깔과 다양한 인맥(人脈)으로 인해 그토록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를 두고 박헌영 계(系)의 공산주의자들은 '미국의 주구' '전형적 기회주의자' '자유주의자'라고 평가했고, 미국과 우익은 '음흉한 빨갱이' '김일성과 한통속'이라는 저주를 보냈으며, 국내 우익(右翼) 민족주의자들은 '일제의 주구'로 폄하했다.
실제로도 여운형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政務摠監)을 만난 자리에서 일본의 싱가포르 점령을 축하한 바 있고, 황국신민사업에 협조키로 약조했으며, 일본 패전 직전 총독부로터 정권 인수와 함께 2천만 엔의 거액을 받았었다. 그는 좌익 독립운동가이기 이전에 일본당국자들과도 이처럼 끈끈한 커넥션을 유지하고 있었던 특이한 인물이었다.
사상적으로도 그는 최초 이상주의적 자유주의자로 출발하고도 이내 영국을 모델로 한 '진보적 민주주의'를 표방했으며, 그 후 러시아 방문을 계기로 좌파 혁명가로 변신하고서 근로대중의 해방을 명분으로 내세워 사회경제적 차원의 사회혁명을 역설했다.
일제 강점기 좌파 독립운동가들 중 상당수는 좌파이기 이전에 독립운동가였고, 좌익활동을 독립운동의 수단으로 삼았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와는 정반대로 한반도의 좌익화(左翼化)를 목표로 독립운동에 나선 이들도 적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 이유로 일부 사가(史家)들은 여운형 선생의 해방공간에서의 '좌우(左右) 합작운동을 일컬어 "몽양이 해방 이후 좌우익 모두로부터 기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로 매도당하면서도 죽는 순간까지 좌우합작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던 '민족주의자'라고 말하는 것은 아이러니"라고 말한다.
정부의 이번 조치는 그간 '반쪽의 독립운동사'가 이제 '온전한 것'으로 다시 태어나는 계기가 되었다는 긍정적 평가가 따른다. 하지만 정부는 이번 조치가 '항일(抗日) 독립운동' 공적만을 평가한 복권일 뿐, 그들의 잘못된 '공산주의' 이념에 대한 복권이 아님을 대(對)국만 홍보를 통해 분명히 해야 한다.
여운형 등 좌익 독립운동가들의 순수한 독립운동 차원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배려한 복권(復權)조치가 자칫 해방공간에서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운동에 대한 '정당성 부여'로 왜곡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정부가 각별히 유의해야 할 사항은 바로 이것이다.
그러자면 무엇보다도 해방전후사(前後史)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우선해야 한다. 정부가 솔선해서 해방공간에 대한 개념 정리를 바로해야 할 때이다. 정부의 그런 고뇌의 과정이 없이는 이번 조치가 자칫 역사의 본말(本末)이 뒤집히는 결과로 오도될 수도 있음을 식자(識者)층은 우려히고 있다.
몽양 '여운형'은 3·1절을 계기로 독립운동가 반열에 오른다지만, '박정희'의 광화문 현판은 오는 8·15 광복절이면 우리 시야에서 사라진다. 몽양(夢陽) 띄우기 속에 박정희 끌어내리기가 진행되고있음은 더 없이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 시대의 '좌(左)편향적 흐름'은 두고두고 경계해야 할 이슈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 (konas)
정 준 (코나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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