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두율의 엉터리 한국어
주체사상의 한복판에서 境界人을 자처하니, 말과 논리가 아리송해진다
대한민국 思想 시장에 복귀한 宋斗律
在獨 사회철학자 宋斗律(송두율) 뮌스터大 사회학연구소 초빙교수가 2005년 새해 벽두에 서울신문에 그의 이름을 붙인 고정 칼럼(宋斗律 칼럼)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첨예한 대한민국 思想(사상) 시장에 복귀한 것이다. 과연 宋씨가 공개적으로 그런 담론을 펼칠 처지가 되는가?
宋斗律씨는 거물이다.
「북한은 북한의 논리로 이해해야 한다」는 이른바 그의 「內在的 접근법」으로 이념 무장한 지식인과 정치인들이 이 나라 상층부를 장악했다. 우리 아이들이 배우는 국사 교과서에도 그의 논리체계가 짙게 스며들어 있다.
宋씨는 2004년 국가보안법 등 위반혐의로 재판을 받아 1심에서 7년刑, 2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金正日 정권에 우호적이었던 金大中 정부의 林東源(임동원) 前 국정원장, 최기문 前 경찰청장은 국회에서 宋斗律씨가 북한 권력서열 23위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라고 확인했다.
그런 宋斗律씨가 대중을 상대로 이념적인 글을 발표한다는 것은 그가 대한민국 사법부의 판단을 가볍게 여기고 있고, 그 권위에 도전하고 있다는 반증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 宋斗律씨가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인지 따질 생각은 없다.
宋斗律씨나 그의 추종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그를 「학자」라고 전제하고, 그의 글들에 대해 內在的으로 접근해 보고자 한다.
南과 北 사이의 경계인을 자처하는 宋斗律씨는 서울신문에 연재하는 칼럼들에서 부드러운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그는 칼럼 「경계선 그리고 경계인」에서 경계선은 전투적이고 배타적인 개념이라면서, 그 대신 경계면이나 경계공간을 마련할 것을 제안한다.
<유감스럽게도 경계인이라는 개념이 곡해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경계인이라는 단어가 일상적으로 두루 사용되고 있고, 그것도 긍정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유럽과는 상당히 다른 분위기이다>
공포통치·대량 餓死·정치범 수용소를 외면
宋斗律씨의 글은 이런 식이다. 역사적인 맥락과 상황을 도외시하고 우리의 상황을 非정상적인 것으로 몰아간다. 서양 中世의 기독교 보편주의 체제를 겪었고, 국경을 넘어 혼인이 오가는 관계를 엮어 냈던 역사적 배경 위에, 이제는 東歐 사회주의의 붕괴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 체제 통일이 된 유럽과 우리 상황을 어떻게 단순 비교할 수 있는가?
이것이 宋씨의 소위 「內在的 접근법」이다. 우리와는 다른 역사적 경험을 한 유럽의 경우를 들어 대한민국의 현실을 「外在的」으로 비판하면서도, 유독 북한에 대해서는 체제내적 이해(內在的 접근)의 경계선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내딛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는 『경계인은 기존의 경계선을 허문다』고 자부한다. 그의 현란한 말장난을 따라가다 보면,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가」 하는 혼돈이 온다. 宋씨의 글을 이해하는 하나의 코드는 「親北(친북), 反대한민국」이다.
이 코드를 대입하면 그의 글은 희미한 회색 빛깔이 사라지고, 선명한 천연색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접경지역에 사는 독일인들이 매일 국경선을 넘어 이웃인 프랑스나 스위스 땅에서 일하고 퇴근해서 자기 집에 돌아오는 사람들을 일컬어 경계인이라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머지않아 우리 주위에서도 많은 경계인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개성공단에서 일하는 남쪽 사람들이 바로 그러한 경계인들이 아니겠는가> (경계선 그리고 경계인 中)
공포 통치, 대량 餓死(아사), 주민 탈출, 악명 높은 정치범 수용소의 대명사가 된 북한과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민주화까지 성취한 대한민국 사이에 서서 그는 「경계인」을 얘기한다. 과거 냉전 시절 東歐(동구) 사회주의가 엄존하던 시절, 宋斗律씨가 그렇게 가치를 부여하는 「경계인」이 존재한 적이 있었던가?
사회주의 연구자라는 宋斗律씨는 「자유 사회」와 「전체주의 사회」 사이의 차이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親北, 反대한민국」 작업에 지장이 오기 때문일 것이다.
宋斗律은 그래서 사실(facts)에 철저하게 무관심하다.
오히려 그는 사실에 안개와 연기를 짙게 뿌려 「朴正熙가 독재했던 남한이나 金日成이 독재했던 북한이나 다를 게 뭐가 있느냐」는 類(유)의 주장을 유포시켜 왔다.
宋斗律씨는 「통일공간, 한반도의 꿈」이라는 글에서 「사회적 공간」이니 「집단적 기억」이니 하는, 독일産 개념을 애매모호하게 동원하고 있다. 그가 동원하는 개념은 하나같이 구체성이 없고, 추상적이다.
그러나 宋斗律씨는 「통일元年」이라는 용어를 씀으로써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있다. 「통일元年」이란 용어는 조선노동당 창건 60주년을 통일元年으로 설정한 金正日의 교시에서 나온 것이다.
金正日의 「주체 사회주의」를 보듬어 안자?
宋斗律씨는 「인간자본과 人材」라는 글에서 인간자본(Humancapital)과 人材라는 개념을 대치시켜 놓고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세계화를 비판한다. 그는 서양의 기능적인 「전문인」의 업그레이드 개념인 「인간자본」에 반대한다. 그러면서 우리의 「人材」는 「인문적 문화인」, 즉 「선비」를 이념형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름다운 얘기다.
그러나 그는 「文」과 「武」의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武」란 전투무력뿐 아니라, 과학·기업 등 실용적 부문들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이상적인 선비상은 文武兼全(문무겸전)하는 선비였다, 그런 선비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과거 우리나라의 선비들 대다수는 「武」를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의 「선비」들이 「武」를 알고 키우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亡國과 분단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金日成, 金正日을 어버이 首領으로 모시고 忠孝를 강요하는 북한체제를 미덕으로 흠모하는 宋斗律씨에게서는 조선조의 排外主義가 강하게 느껴진다.
이는 진보적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의 「현대(Modernity)」에 대한 反動이라는 점에서 좌익과 봉건주의자들이 한 배를 타고 있기 때문이다.
宋斗律씨는 이 글에서 「교육이 경제에 종속된다」고 걱정이 대단하다. 경제에 신경을 쓰면 非人間이 되고 마는 것인가? 사회주의자 宋씨가 염원하는 「인간의 길」은 그럴지 모른다.
그러나 경제에 성공해야 주변의 人間들에게 혜택을 줄 수 있고 人性이나 人文을 함양할 수 있는 조건과 여유를 제공할 수 있다. 管仲(관중)과 孔子(공자)도 『食足然後 知禮儀廉恥(식족연후 지예의염치)』라고 했다.
우리 교육 현장이 황폐화된 것은 左派세력이 신조로 하는 평등주의와 그로 인한 下向평준화 때문이지, 교육이 경제에 「종속」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守舊·퇴보적 좌경이념과 세력을 退出시킬 때, 비로소 인간자본과 人材의 일치를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宋斗律씨가 독자들을 인도하려는 곳은 反韓감정, 反美주의다. 그리고 以北의 金正日 수령 전제체제에 대한 비판의식의 해체요, 南北에 대한 대등한 가치평가다. 宋斗律씨 논리의 저변에는 세계의 좌파들이 공유하는 反세계화, 反美주의가 깔려 있다.
宋斗律씨는 미국과 세계화에 용감하게 저항하고 있는 金正日의 「主體 사회주의」를 보듬어 안을 것을 촉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宋斗律씨의 글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지난 글들과 거기에 나타난 그의 생각들을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文化 상대주의로 金正日 옹호
宋斗律씨의 글에는 문화상대주의가 동원되고 있다.
문화상대주의는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 후 세계 左翼의 사상적 무기로 채택됐고, 反美주의의 진지 역할을 하고 있다. 左派가 미국을 증오하는 이유는 미국의 존재 자체가 그들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산 증거이기 때문이다.
문화상대론자들은 『모든 문화가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고 주장한다. 문화상대주의는 제3세계 문화에 관해서는 비판 없는 평가와 찬양을, 선진문화에 대해서는 결점만을 부각시킨다.
宋斗律씨는 이 논리를 「북한 바로 알기」 운동을 통해 남·북한에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 그는 「惡의 축」, 「폭정의 전초기지」를 관리하는 金正日을 옹호하기 위해 「문화상대주의」를 동원해 왔다. 이제는 한 발 더 나아가 元曉(원효)의 和諍(화쟁)·圓融(원융) 사상까지 동원한다.
「內在的 방법론」은 宋斗律版 문화상대주의이다. 宋斗律씨가 서독에서 공부하던 무렵, 서독에는 페터 루츠라는 東獨 전문가가 있었다. 그는 「內在的-비판적 동독 접근법」을 내세웠다.
루츠는 「東獨을 이해하는 첩경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입장에 서서 東獨을 보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東獨 같은 공산주의 국가를 외부의 기준, 예를 들어 자유민주주의의 기준으로 분석하는 것은 공정치 못하고, 정확할 수도 없으며, 부적합하다고 했다. 그는 그때까지 西獨에서 분석 기반으로 삼아 온, 東獨을 「전체주의 체제」로 보는 관점에 크게 반발했다.
西獨 사회민주당은 1969년 집권 후 루츠式 접근방식을 받아들였다. 西獨 정부는 東獨공산당 지배체제의 본질은 제쳐 두고 공산당 정부가 경제적으로 무엇을 이루어 냈고, 사회적으로는 무엇을 성취했다는 소리에만 귀를 기울였다.
통독 후 西獨 사회민주당이 東獨공산당이 제공한 홍보자료에 전적으로 매달렸음이 드러났다.
독재자를 독재자 입장에서 보자?
이건 남의 얘기가 아니다. 東獨에 북한,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주체사상, 루츠에 宋斗律을 대입하면 바로 오늘의 우리 상황이다.
1967년 西獨으로 유학을 간 宋씨가 그 한가운데에서 겪었을 1968년의 학생운동은 1960년대 후반에 시작된 리버럴 左派와 左翼에 의한 「문화혁명」의 흐름 속에서 터진 것이었다.
그 후 東·西獨의 우열이 확연히 갈리고 東獨이 西獨에 흡수 통일될 가능성이 높아지자 左派 지식인들은 「사회주의자들의 고향」 東獨을 변호하고, 살리기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그들은 지금도 『西獨이 東獨을 흡수통일한 것은 잘못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宋斗律씨의 內在的 북한 연구방법의 골자는 『북한 사회가 어떤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싶어하는지, 즉 북한 사회의 內在的 이상과 욕구를 우선 그들의 언어로 이해해 보고 나서 이러한 이상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사실로 나타났는지를 비판적으로 검증해야 한다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宋斗律씨의 주장은 일견 막스 베버가 말한 「感情移入(감정이입)을 통한 이해」와 흡사해 보인다. 「감정이입을 통한 이해」의 과정을 거치는 것은 하나의 필수공정이지만, 거기서 그치면 그것은 지식활동이 아니다.
「감정이입을 통한 이해」는 평가하기 위해 연구재료를 제대로 정돈한다는 의미이지, 정당화시켜 주려는 목적이 아닌 것이다.
宋斗律씨의 주장은 『독재자를 독재자 입장에서 보자니 그게 무슨 이론이냐』(黃長燁 前 북한노동당 비서)는 비판을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宋씨는 『처음부터 「先驗的(선험적)」이거나 「밖」으로부터 들이댄 척도로 북쪽 사회를 보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선험적」이라는 용어는 일단 넘어가자. 「밖」이란 무슨 소린가. 대한민국이 以北에 대해서 「밖」이고 「남」이라는 얘기다.
宋斗律씨는 「민족」, 「민족주의」를 입에 달고 있지만, 그의 주장대로라면 그의 「민족주의」는 실천을 결여한 냉정한 관찰자의 주장에 불과한 것이 된다. 우리에게 민족주의란 근본적으로 北을 남으로 보지 않는 실천적 입장이요, 자세여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한 부분인 북한을 어떻게 是非, 善惡의 감정과 판단, 행동과 실천의지 없이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는가? 그렇게 주장하는 한, 宋斗律씨는 좌익 지식인이거나, 남한을 망가뜨려 자신과 체제를 연명하려는 金正日의 에이전트일지는 몰라도, 민족주의자임을 자처할 수는 없다.
思想의 「더러운 폭탄」
宋斗律은 패배주의적 도피, 고슴도치 같은 자폐적·퇴영적, 사이비 광신자들의 집단자살 같은 북한의 정책들을 옹호하고 있을 뿐이다.
宋斗律씨는 통일 담론에 있어서도 北의 「주체화」와 南의 「세계화」를 대립시킨다. 그는 『北이 시종일관 외세의 간섭을 배격하고 우리 민족의 의지대로 하나가 되는 통일을 이야기하는 데 대해, 南은 국제정세에 조응·적응하면서 우리 민족 전체의 이해를 관철시켜 나가는 것이 결국에는 민족통일의 길이라고 보고 있다』고 주장한다.
통일문제에 있어서는 통일된 한반도가 어떤 이념, 어떤 체제 아래 살 것인지가 死活的(사활적) 관건이다. 宋斗律씨는 이 문제를 비틀어 통일을 「主體化 대 世界化」의 구도로 전환시킨다.
宋斗律씨는 「세계화」를 斜視(사시)로 보게 만드는 언어전술을 구사한다. 北이 요구하는 「自主」가 「駐韓미군 철수」를 의미한다는 명백한 「사실」은 宋斗律씨의 인식론에 포함돼 있지 않다.
宋斗律씨에게는 金正日의 수령 절대주의 전제체제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결여돼 있다. 그는 金正日과 北의 대중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는 『金正日과 북한 민중은 일체화돼 있다』고 강변한다. 그의 말은 어떤 경우에도 金正日과 그 지배체제에 타격을 가할 내용을 담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左派가 목숨을 걸고 견지하는 이데올로기的 당파성의 무서움을 새삼 확인한다.
문제는 이 땅에 사상의 「더러운 폭탄」을 터뜨리는 「宋斗律」과 그의 아이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이다.
柳光浩 (북한민주화포럼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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