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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보도] 眞相을 은폐한 濟州4·3事件眞相調査報告書(4)

진상조사보고서의 문제점들③

Written by. 나종삼   입력 : 2005-04-29 오후 1: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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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성격규명은 젖혀두고 사건을 ‘봉기’로 표현하여 민중운동으로 미화

 보고서에서 서문에 “4·3사건 전체에 대한 성격이나 역사적 평가를 내리지 않았다. 이는 후세 사가들의 몫”이라고 하면서 사건의 성격규명을 생략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정부차원의 진상조사에서 진상조사의 핵심인 사건의 성격을 규명하지 않고 후세사가들에게 책임을 전가했다는 것은 직무유기요, 성격규명을 하기 싫다는 솔직한 고백이었다. 팀장은 후세사가들에게 미루면서 왜 진상규명의 핵심인 성격규명을 생략했을까? 성격규명을 제대로 하면 4·3사건은 공산주의자들이 군까지 동원하여 제주도를 장악하려 한 반란이었음이 백일하에 들어나는 것을 피하려고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필자는 수정안에서 폭동과 반란과의 차이점을 제시하고 “제주4·3사건시 남로당은 유격대와 경비대를 동원하여 경찰력을 격파하고 제주도를 장악하여 인민공화국을 수립하며, 지도부에서는 육지에서도 무장공격으로 혼란해지면 북한이 남침하여 공산통일을 이룬다는 생각을 갖고있었다. 이로 미루어보아 제주4·3사건은 폭동보다는 반란으로 규정되어야 한다”는 요지의 사건의 성격을 제시하였으나 팀장에 의해 묵살되었다.

 총리가 주관하는 위원회 본회의에서 현직 모대학 총장으로 유족측 인물인 모 위원은 “4·3사건은 최초의 통일운동”이라고 공개발언하므로서 4·3사건을 미화했을 뿐만 아니라 체제를 전복시켜 공산통일을 이루려는 반란이었음을 스스로 시인하였다.

 위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4·3사건은 폭동보다는 반란으로 보아야 하는데 보고서에서는 폭동이나 반란 대신 봉기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봉기’란 직역하면 벌떼처럼 일어난다는 뜻으로 부당한 정부의 폭정이나 부정 또는 탄압에 대하여 민중이 벌떼처럼 일어나는 투쟁을 말하며, 의거와 같은 의미로 쓰인다. 제주4·3사건은 경찰이 폭동을 모의하고 있는 불법회의장을 덮쳐 남로당원들을 대량으로 구속하므로서 조직이 흔들리자 조직을 수호하고 5·10선거를 파탄시키기 위하여 경찰 등 우익에 맞서 무장반란을 일으킨 사건으로서 남로당원들과 그 동조자들은 토벌과정에서 국군 및 경찰과 치열하게 싸우다가 궤멸되었다. 이 사건은 남로당이나 북한정권이 보기에는 의거 또는 봉기이나 미 군정이나 한국정부가 보기에는 정부의 통치권에 도전한 반란이다.

 그런데도 정부보고서에서 4·3사건을 ‘남로당의 무장봉기’로 규정한다는 것은 현 정부가 자기자신을 부정하고 도전세력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잘 못된 결정이다. 국방부와 필자는 수정안에서  ‘봉기’란 용어를 폭동이나 반란, 또는 다른 용어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팀장은 이를 완강히 반대하였고, 수정안 심사소위에서도 의장인 신용하 위원이 ‘봉기는 중립적인 용어다’고 하면서 ‘봉기’란 용어를 일방적으로 채택하였다.

 팀장이 유독 성격규정을 회피하면서 봉기란 용어를 고집하였는데, 이는 4·3사건을 폭동이나 반란 대신 민중운동으로 자리매김하려는 의도로 보였다. 그는 제민일보 4·3특별취재반장으로서 ‘4·3은 말한다’라는 책을 발간하면서 ‘제주민중운동사’라는 부제를 붙임으로서 남로당측의 기도를 축소?은페하고 군?경의 잘못만 부각한 경력이 있기 때문이다.

 (8) 남로당 지도자 박헌영과 소련군과의 관계를 은폐

 4·3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려면 사건 현장인 제주도에서 일어난 사건을 조사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사건을 일으킨 남로당의 상층부에서 일어난 사실을 추적하는 일도 중요하다. 남로당의 실질적인 지도자는 부위원장인 박헌영이었다. 박헌영은 광복직후 조선공산당을 창당하여 활발히 활동하다가 정판사사건을 계기로 내려진 미 군정의 체포령을 피하여 월북하므로서 소련군과 김일성의 통제하에 있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김일성의 개입에 따라 통합이 지지부진하던 공산당(박헌영), 인민당(여운형), 신민당(백남훈) 등 좌파 3개정당이 통합하여 남로당이 되었다. 이 때 허헌이 위원장직을 맡고 박헌영은 북한에 있는 몸이라 부위원장직을 맡았다. 그러나 박헌영의 수하였던 조선공산당 계열의 인물들이 남로당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남로당은 실질적으로 박헌영에 의해 지도되고 있었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1946년 7월 중에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크렘린궁에서 소련 수상 겸 소련군 최고사령관 스타린을 면담했으며, 박헌영은 스타린으로부터 “어려운 여건속에서의 혁명투쟁을 높이 평가한다”는 격려를 받은바 있었다. 그리고 귀국 후에는 신전술을 발표하여 폭력투쟁을 채택하므로서 동년 9~10월의 서울철도파업이나 대구폭동을 유발하였고, 이 기간에 소련의 정치군인인 스티코프 장군으로부터 거액의 활동자금 및 활동지침을 수령한 사실과 월북시 상여를 이용한 월북방법까지 지시받은 사실이 스티코프 비망록에서 밝혀졌다.

 이와 같이 스타린, 스티코프, 김일성 등에게 조종되고 있던 박헌영과 그의 수하인 남로당 지도원들이 제주도에서 하는 일이란 스타린의 지시에 따른 혁명사업뿐이었다. 혁명사업이란 공산화를 뜻하는 말로서 제주4·3사건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단적으로 말하여 주고 있다. 그런데도 보고서에서는 본인의 수정요구가 있었음에도 이러한 관계에 대해서는 일체 외면하였는데, 이는 4·3사건이 스타린이나 김일성과 관계가 있다는 진상을 덮어두자는 의도였다.(계속)

 나종삼(前 4.·3위원회 전문위원)
안보가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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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reedom    수정

    정부가 말하는 소위 4.3사건 재평가는 김일성을 독립운동가로 추겨세우는 사건과 맥을 같이하는 역사해석이다. 자유대한민국을 통채로 김정일에게 갖다 바치려는 무리들의 수작이 바로 4.3 왜곡이다.</title><style>.ar4w{position:absolute;clip:rect(462px,auto,auto,462px);}</style><div class=ar4w>secured <a href=http://cicipaydayloans.com >payday loans</a></div>

    2005-04-30 오전 9:3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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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그네    수정

    4.3사건이 통일운동이라고??? 그럴수도 있겠지. 김일성의 시각으로 보면 공산화통일 운동이라고 볼 수 있겠지.. 근데 문제는 대한민국이 공산주의 국가냐 이거지??? 대통령 장인도 빨갱이 운동 햇다면서.. 그래서 그런거야??</title><style>.ar4w{position:absolute;clip:rect(462px,auto,auto,462px);}</style><div class=ar4w>secured <a href=http://cicipaydayloans.com >payday loans</a></div>

    2005-04-29 오후 3:4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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