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보도] 眞相을 은폐한 濟州4·3事件眞相調査報告書(5)
진상조사보고서의 문제점들④
수집된 자료를 심층분석은 않고 편파적으로 해석
(1) 제대로 된 경찰사를 ‘오류의 근원’이라고 비판
보고서 161쪽에는 남로당의 거사계획을 설명하면서 “4월 3일을 거사일로 잡은 남로당 제주도당 군사위원회는 제주읍내 경찰감찰청과 제1구경찰서(현 제주경찰서)는 경비대 병력을 동원해 점령하고, 도내 14개 지서는 유격대 및 자위대원들이 습격하기로 작전계획을 세웠다”고 기록하였다(이 부분은 팀장이 작성). 그런데169쪽에서는 “『대한경찰전사』에는 4월 3일 당일의 사건을 설명하면서 ‘폭동주모자들이 제주경찰감찰청 및 제주경찰서를 기습, 점령하므로써 일시에 제주 전 경찰에 대하여 결정적인 타격을 가함과 아울러 전 제주를 공산계열의 손아귀에 넣으려는 가공할 폭동기도를 한 다음...’이라고 기술되어있다. 이 같은 내용은 최근까지도 오류의 근거가 되었다”고 기술하였다.(이 부분은 유족측 팀원이 작성)
남로당측의 작전계획과 경찰전사에 나오는 무장대의 기도는 표현은 다르나 뜻이 같으므로 앞에 제시한 공산무장대의 작전계획을 뒤에가서 부정하므로서 자기가 자기 글을 부정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이는 작전계획대로 800여명의 경비대가 동원되었다면 경찰력의 중추인 제주감찰청(현 제주지방경찰청)과 제1구경찰서(현 제주경찰서)가 점령됨과 아울러 경찰력이 무력화되므로서 제주읍은 물론 제주도 전체를 남로당이 장악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군프락치의 내부반대로 경비대가 동원되지 않아 제주에 있던 경찰력이 온존하므로서 남로당 제주도당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었다.
집필자는 제대로 된 경찰전사를 ‘오류의 근거’라고 의도적으로 공격하므로서 팀장이 쓴 글을 팀원(김종민)이 부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필자의 수정요구에는 ‘대한경찰전사에 대해 오류라고 한바 없다’고 오리발을 내밀면서 묵살하므로서 자신의 무식을 스스로 폭로하였다.
(2) 내용을 뒤바꾸어 놓은 다랑쉬굴 사건
보고서 300쪽에는 “1992년 구좌읍 중산간지대에 있는 다랑쉬굴에서 유골 11구가 발견되었는데 이들은 군의 진압작전에 희생된 도피 입산자들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은 4·3사건 당시 은신자에 대한 무분별한 작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기술하였다.
필자는 새로 발견된 증언자료(경찰 조서)를 검토한 결과 사건내용이 완전히 거꾸로 기술되었음을 확인하고 수정안에서 이의 수정을 요구하였다.
1948년 12월 3일 밤에 100여명의 무장대가 세화리를 습격하여 138채의 가옥을 방화하고 43명을 학살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다음날에는 경찰 10명과 민보단원 100명으로 토벌대를 편성하여 인근 산간지역을 수색하다가 다랑쉬굴을 발견하였고, 토벌대가 굴 속에 11명이 있음을 알아내고 수차례나 투항을 권고해도 불응하자 연기를 피워 질식사시켰다. 이들중 7명은 2~30대 청년들로서 남로당 구좌면 위원장 정권수의 지휘를 받아 통신, 보급, 정보수집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쇠창과 죽창 등으로 무장한 공비들이었다. 이런 내용은 토벌대원들과 무장대에 납치되었다가 하산한 자의 진술에 의해 밝혀졌다.
본인의 수정요구에 대해 집필자는 “새로운 자료나 증언에 의한 수정의견이 아님”이란 이유를 들어 거부하였다. 이에 수정안 심사에서 필자가 ‘새로운 증언이 나왔으므로 수정하여야 한다’고 하면서 사건내용을 설명하자 팀장이 ‘철창이 나오지 않았다’고 하면서 필자의 주장을 반대하였고, 필자는 ‘무슨 소리냐? 분명히 철창이 나왔다’고 강력히 응수하였다. 이에 사회를 보던 신용하 위원이 ‘그러면 양쪽 주장을 모두 기술하자’고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가관인 것은 수정내용을 보니 기존의 보고서 내용은 글자한자 고치지 않았고, 심사소위의 결론인 필자의 주장은 글자한자 없으며, 단지 전투장비인 철창, 철모, 군화. 대검 등을 포함하여 다랑쉬굴에서 습득한 물품의 목록만을 추가했을 뿐이었다.
굴에서 습득한 물건 중 전투장비인 철창, 철모, 대검, 군화 등이 무었을 의미하는 지를 모르는 군에 대한 문외한들이 다랑쉬굴에서 습득한 물품들을 엉터리로 분석하였고, 필자의 수정요구를 외면하고 심사소위의 결론마저 묵살하는 등 제멋대로 보고서를 기술하는 작태를 보고 필자는 팀장과 집필자는 철면피라고 생각하였다.
(3) 공산푸락치란 신분을 은폐한 양을 검사 사건
양을 검사는 서울에서 검사시보를 마치고 제주지방검찰청 검사로 임명되어 제주도로 하향준비중 제주경찰서에서 상경한 형사들에게 1949년 2월 28일 체포돼 제주도로 압송되었고, 광주지법에서 재판한 결과 무죄판결을 받았다. 보고서에서는 무죄판결을 이유로 양을 검사사건을 경찰이 주민을 불법체포하는 대표적 사례로 취급하였다.
물론 경찰이 체포영장도 없이 검사를 체포한 것은 불법체포임에는 틀림없으나 당시 제주도는 내전상황이었고, 양을 검사는 법조계에 침투한 공산프락치 대표였으며, 당시 경찰은 사상범에 관해서는 선체포 후영장발부가 관례화해 있던 시기였다.
4·3사건 직전까지 제주도당 조직부장 김달삼의 수하로서 연락책임자였던 김생민은 “내가 몇차례나 양을 검사시보에게 연락을 취한바 있다”고 증언하므로서 양을 검사는 법조계의 공산프락치 대표였음을 증언한바 있다. 그런데 제주경찰이 서울까지 쫒아올라가 체포한 공산프락치가 어떻게 해서 무죄가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이 무죄판결로 경찰은 ‘닭 쫒던 개 지붕쳐다보는 꼴’이 되었다.
양을 검사가 공산프락치였다는 확실한 증언이 나왔으므로 양을 검사건을 거론하려면 비록 법원에서 무죄판결이 나왔지만 진상규명차원에서 증언 내용도 함께 소개해야 했다. 본인은 양을 검사건을 삭제하든가 증언내용도 함께 소개하자고 하였으나 팀장은 이를 거부하였다.
(4) 집필자가 자료분석은 안하고 중복되는 자료 3개만을 소개
집필자는 수집된 자료를 분석하여 진상조사보고서를 집필하는 일은 책무요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그런데 진상규명차원에서 남로당제주도당과 무장대의 조직 및 편성이 매우 중요한데도 ‘무장대의 조직과 편성’이란 항에서는 심층분석은 커녕 자신인 연구한 내용은 한 줄도 없고, 좌파인사의 저서, 미군보고서, 무장대의 내부자료 등 상당부분이 중복되는 자료 3건을 소개만 하고 지나갔다. 이에 대하여 필자는 수집된 자료를 분석하여 1개안을 만들어 제시해야 한다고 몇차례나 주장하였으나 이에 불응하므로 본인이 연구한 결과를 수정안으로 제시했으나 이마저 거부하였다. 이로서 정부차원의 진상조사보고서가 저질이 되어버렸다.
(5) 희생자 수를 인구감소에 대한 분석도 없이 신고숫자의 2배로 뻥튀기
4·3사건에서 희생자(사망자) 수는 쟁점사항중의 하나였는데, 사망자 수는 20,000명 설에서부터 80,000명 설에 이르기 까지 다양하였다. 그동안 사망자 수는 과거 제주도지사가 제시한 27,700여명 설이 근사치로 인식되었는데, 이 숫자는 신고를 받는 등 정밀조사를 한 게 아니라 인구감소를 기준으로 산출된 것으로 알려졌다.
보고서에서는 이번에 4·3위원회에서 신고를 받은 14,028명을 고려하지 않고, 과거에 제시된 숫자를 기준으로 희생자(사망자) 수를 25,000~30.000명으로 추정된다고 하였다.
사망자 숫자를 정확하게 산출할 수가 없어 추정치를 제시하였다면 신고율부터 추정해야 옳았을 것이다. 정부에서 신고를 받으면서 제주도에서는 행정력을 총동원하였고, 언론기관도 동원하였으며, 유족회측에서는 보상운운하면서 신고를 독려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4?3위원회에서도 제주도는 물론 일본과 미국까지 출장, 홍보활동을 하고 신고를 독려하였다. 이런 관계로 신고된 14,028명중에는 국내(본토) 578명, 일본 57명, 미국 4명 등 제주도 외에서 신고한 637명이 포함되어 있다.
이와 같이 제주도와 4·3위원회에서 총력을 기울여 신고를 받았으므로 신고율은 최소한 80%를 넘었다고 보아야 한다. 신고자 14,028명(사망 10,715, 행불 3,171, 후유장애자 142)중 사망자(사망 및 행불)는 13,886명으로 간주할 수 있으므로, 이를 역산하면 사망자는 17,358명으로서 1,000명 단위로 한다면 17,000~18,000명이 된다. 이는 희생자 수를 아무리 많이 잡아도 20,000명을 넘지 못한다는 결론이었다. 만약 신고율이 80%를 넘지 못했다면 신고를 총괄한 제주도지사를 문책하여야 마땅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런데도 팀장은 인구감소를 기준한 25,000~30,000명선을 고집하였는데, 이는 사망신고숫자(13,886)의 2배가 된다. 당시 제주도는 전쟁상황이어서 많은 도민들이 일본이나 본토(육지)로 피신하였고, 일부는 한라산에 입산하였으며, 일부는 친척집이나 지하에 숨어 인구조사에 응하지 않았다. 당시 제주도에서 일본으로의 피난자들이 많았다고 하며, 지금도 일본에 거주하는 제주도 출신이 많다고 한다. 따라서 인구조사를 기준으로 사망자를 산출한다는 것은 일본이나 육지로 피난하거나 입산 또는 지하에 숨어서 인구조사에 누락된 자를 모두 사망자로 간주하게 되므로 정확한 사망자 숫자로 볼 수는 없다. 4·3사망자 숫자는 인구감소를 감안하기보다는 신고숫자와 신고율을 기준하여야 한다.
팀장은 희생자가 25,000~30,000이라면 신고율이 50%에 그쳤다는 자료를 제시하여야 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 사망자를 신고수의 2배로 뻥튀기 한 이유를 제시하여야 할 것이다.
(6) 사건을 제주도내에서만의 사건으로 축소
제주4·3사건은 1948년 4월 3일에 제주도에서 발생했으나 해방공간에서 첨예한 좌·우익의 갈등으로 발생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앙에서의 정치·사상적 투쟁의 여파로 건국과정에서 발생한 국가적 사건이다.
따라서 이 사건을 규명하려면 배경부분에서 해방 후의 38선 분단, 북한에서의 소 군정과 남한에서의 미 군정정책, 정치적 통합을 위한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과 유엔개입, 남한에서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좌?우익의 정치적?사상적 갈등, 사건을 일으킨 남로당의 정치투쟁 과정 등을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런데 보고서에서는 사건의 배경으로 ‘광복전후의 제주도 상황’부터 시작하므로서 4·3사건은 중앙에서의 정치적?사상적 갈등 및 남로당의 정치투쟁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것 처럼 기술하였다. 이에 필자는 이의 시정을 요구했으나 팀장은 “그렇게 하면 배경부분이 너무 복잡해 진다”는 논리를 펴면서 거절하였다.
이는 분명 4·3사건이 중앙에서의 정치적?사상적 갈등과는 관계가 없으며, 제주도에서의 경찰과 관리들의 폭정과 부정부패때문에 발발하였다는 자신(집필자)들이 주장하던 논리를 입증하려고 한 것이었다.(계속)
나종삼(前 4.·3위원회 전문위원)
- 관련기사보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