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 패망 30년 특집 - 우리는 값진 교훈을 터득해야 한다
1975년 4월30일 소련제 월맹군 탱크 845호가 베트남 대통령궁으로 진입했다. 월남기(旗)가 내려지고 월맹기가 올랐다. 사이공 함락작전의 선봉으로 나선 월맹군 제 203 기갑여단 소속 탱크와 304사단 보병병력이 독립궁에 진입한지 45분 뒤의 일이었다. '베트남'이라는 나라가 이 지구상에서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30년이 흘렀다.
자유베트남을 패망시킨 주역(主役)은 월맹군이 아니라. 휴전협정 이전부터 사회 각계에 침투하여 반미·반전 데모를 주동했던 '공산프락치' '간첩과 시민단체' '종교단체'들의 조직적인 선전선동이었다. 그 결과는 결국 1973년 1월27일 파리평화협정 조인으로 나타났고, 그 해 3월 미군과 한국군은 완전 철군했었다. 베트남의 완전 공산화는 그 이후 2년 3개월만이다. 미군철수 후 대화로 통일문제를 다루자던 파리평화협정문서가 휴지조각이 되고 만 것이다.
미국은 베트남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연인원 650만명의 젊은이들을 참전시킨 가운데 최다 54만여 명을 상주하기도 했지만, 결국 무위로 돌아갔다. 서방세계의 분노와 실망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 전쟁으로 미군병사 5만8,000명과 한국군 4,960명이 살아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넜다. 남북 베트남 희생자 총인원은 4백여만 명을 헤아린다.
미국이 이 전쟁기간 중에 월맹 땅에 퍼부은 폭탄은 785만 톤이었다. 이 양(量)은 2차대전 중에 미국이 각 전장에 투하한 폭탄 205만톤의 근 4배에 이른다. 월남 땅에 투하된 고엽제(枯葉劑)만도 7,500만 리터였다. 총 투입 전비(戰費)는 자그만치 3,520억 달러를 기록했다.
한국군은 65년 월25일 주월 한국군사령부 창설 이후 7년 동안 연 35만명이 베트남에서 처참한 전쟁과 대민(對民)활동을 수행했고 1만5,922명의 사상자(부상자 10,962명 포함)를 냈다. 이와 별도로 고엽제 피해 및 후유증 인원도 1만2,320명에 달한다.
월남전은 한국인의 기억 속에서 쉽게 지울 수 있는 그런 전쟁이 아니다. 한국이 오늘날의 경제발전을 이루는 시발점이 바로 이 베트남전 참전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미군의 계속적인 한국주둔을 조건으로 한 월남 파병으로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정체성(正體性)과 시장경제를 굳건히 지킬 수 있었다.
월맹은 전쟁기간 중 계속 월남 정계와 사회 각계에 내부 깊숙히 간첩을 침투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간첩들은 시민단체 종교단체들을 조종해가며 부패척결과 반미 반전평화를 명분으로 연중 계속된 반정부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 티우 정권을 붕괴시킨 것은 바로 이들이다.
1973년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미군과 한국군이 전면 철수하자 사이공에는 애국을 표방하는 1백여개의 좌익단체와 통일운동단체들의 '사회혼란 부추기기'는 본격화했고, 급조된 근 1백개의 언론사가 베트남의 좌경화 공작에 나섰다. 목사·승려·학생·직업적 좌경인사·반전운동가·인도주의 운동가 등이 '반(反)부패 타도'를 명분으로 월남의 공산화에 앞장섰다.
자유 베트남은 1975년 4월 월맹 정규군의 무력침공과 베트콩의 게릴라전에 무릎을 꿇기에 앞서 이들에게 당했던 것이다. 문제는 이들의 정체(正體)이다. 이들은 베트남 공산당(호치민이 1930년 창당)과 인민혁명당(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의장 웬후토가 1962년 창당)에서 침투시킨 조직원들이었다. 전체인구의 0.5%인 공산당원 9,500명과 인민혁명당원 4만 명이 베트남 사회의 밑뿌리를 뒤흔들고 있었다.
민족주의자 평화주의자 인도주의자로 위장한 이들 5만여 명의 월맹 간첩들은 시민단체와 종교단체는 물론, 대통령 비서실장과 장관 도지사 등 권력 핵심부를 장악하여 조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 공산당 간첩들의 존재가 확인된 것은 미군 철수와 베트남 패망 이후였다.
1967년 치러진 베트남 대통령 선거에서 차점으로 낙선된 야당지도자 쭝딘쥬가 바로 대표적 간첩이었다. 그는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끼리 피를 흘리는 모습을 조상들이 얼마나 슬퍼하겠냐"며 순수한 애국자연(然) 했고, 미국에서의 반전(反戰)운동에 결정적인 불씨를 지폈다.
간첩들이 시민단체 종교단체의 부패척결운동과 반미 반전평화운동에 몸을 담는 것은 침투가 쉽고, 그것이 대중적 지지기반 확대로 직결되는 통로인데다 국방과 안보를 강조하는 인사들을 '정신나간 사람'으로 몰아붙일 수 있는 손쉬운 투쟁방법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베트남 패망 30년을 맞는 현금의 한반도 정세는 어떤가.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정치권력은 그 추(錘)가 친북 좌익세력에게로 기울어져 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수많은 시민단체들이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민족공조와 반전평화운동이라는 명분 아래 연일 공공연히 반미집회를 자행하고 있으며, 북한의 요구를 복창하듯 '주한미군 철수'를 외치고 있다.
한미동맹 강화와 주한미군 주둔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자유 민주시민들은 그들에 의해 수구 냉전주의자로 매도되기 일쑤이다. 남북 화해협력과 민족공조를 강조하는 언론매체들이 늘고 있고, 안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목소리와 그런 논조가 해를 거듭할수록 대세에서 밀려나고 있음은 물론, 이념적 정체성(正體性) 싸움에서마저 밀리고있는 느낌이다.
베트남의 '30년 전 상황'은 오늘날의 한반도 정세 해법(解法)에도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정치권의 부패상' '시민단체들의 반미운동' '시민들의 안보의식 해이' '민족공조를 앞세운 외세배격 정서' '전후(戰後)세대들의 안보 불감증' 등이 바로 그것이다.
한반도 평화와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호를 위해서는 한미동맹 강화와 범국민적인 안보의식이 필수이다. 친북단체들의 주문대로 주한미군이 철수할 경우 한반도에서 남북한의 군사력은 균형이 깨질 것이고, 북한의 오판을 불러들일 우려도 적지 않다. 대한민국의 국가안보(安保)를 보장하는 것은 허울좋은 '민족공조' 구호가 아니질 않는가.
30년 전의 월남 패망은 이처럼 우리에게 값진 교훈을 일깨워주고 있다. 우리 모두가 국론분열을 극복하고 민족통일 이전에 평화정착을 앞당기는 최선의 방안이 무엇인가를 냉철히 뒤돌아보고 행동해야 할 때인 것이다. (konas)
정 준(코나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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