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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 2개월 남기고 월남전에 지원했습니다"

사이공 한국군 헌병 파견대장, 최성영씨의 베트남전 회고

Written by. 이현오   입력 : 2005-05-06 오후 1: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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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대 2개월을 남겨두고 월남전에 지원했습니다. 대학을 다니다 입대했기에 전역 후 곧바로 복학을 했어야 하지만 젊은 혈기라고 해야 하나 외국에 나가서 군 생활을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그래서 지원한 겁니다".

 ▲ 사이공 한국군 헌병 파견대장 최성영씨(현 베트남참전 인터넷 전우회 해외담당 부회장)

 "아니 그럼 제대 두 달을 남겨 둔 군인에게도 파월 명령을 낸다는 겁니까?" 의아해 하는 기자의 질문에 "당시에는 그런 군 인사법이 있었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해서 장기복무를 시키려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일정기간 월남에 파병되어 근무하고 나면 본국에 귀국해서 곧바로 전역을 조치하는 그런 제도였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어학자원으로 사령부 창설 맴버로 가게 된 것이죠".

 육군 헌병하사로 주월 사령부 창설요원으로 파병되어 당시 베트남 수도 사이공 미 헌병부대 한국군 파견대장으로 근무한 참전용사 최성영 베트남참전 인터넷 전우회 해외담당 부회장의 회고다.

 일요일이던 지난 1일 오후 결례를 무릅쓰고 전화를 걸었다. 인터뷰를 요청하자 마침 대전 국군병원에서 군의관으로 근무하고있는 아들(육군 대위)이 초청해 대천콘도에 내려와 있다며 서울로 올라가는 대로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2일 오후, 시간을 약속해 잠실 향군회관 커피숍에서 마주 앉았다.

 사이공이 떠올라서인가, 태양이 이글거리고 독충이 우글대며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정글지역의 전투요원만 생각하다 시원한 야자수 아래로 양옆이 툭 트인 눈부신 흰 색 아오자이 치마에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자전거를 타고 가는 인상적인 베트남 처녀를 연상해서인지 최성영 부회장 역시 서글서글한 눈매에 호남형 모습이 무척 친근하게 다가왔다.

 인터뷰를 하면서도 한편으로 베트남 처녀에 한국군 '따이한'이 오버랩되어 왔다면 기자의 지나친 상상이었을까!

 차 한 모금으로 입술을 적시고난 최성영 씨는 창설 초기 겪었던 어려움과 우리 군과 주민들 사이에서 파생된 문제를 조사하고 사건처리를 하면서 느꼈던 애로사항과 에피소드 등을 하나하나 풀어놓기 시작했다. 차 마실 시간도 없이 한 시간이 언제 지나간지 모르게 빠르게 지나갔다.

 다음은 대화내용을 간략히 요약한 내용임. 

- 먼저 창설요원으로 파병되었는데 현지에서 느낀 사항이나 임무 등을 좀 알려주십시오.

 제대를 두 달 여 남겨놓고 65년 10월에 지원했습니다. 더 넓은 세상을 보고싶다는 젊은이의 혈기라고나 할까요. 처음에는 비둘기 부대나 청룡부대가 먼저 갔지만 군단급 부대병력이 되니까 주월 사령부가 창설되게 되었습니다.

 최초 채명신 사령관님이 초대 주월 사령관으로 취임하셨습니다. 처음 월남에 도착해서는 막사도 뭐고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처음 사령부 독립청사가 없어서 IMAO(국제군사원조기구)건물을 이용해서 다른 외국군들과 함께 생활하며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숙소도 제대로 된게 없었죠. 장교는 미군 BOQ나 그들이 사용하던 임대저택을 이용했고, 사병은 미군 보충대 등을 활용해 한 8개월 정도 이용했습니다.

 물론 독립취사시설도 준비가 안됐습니다. 갑자기 편성해서 창설되었기에 그만큼 어려움이 많았죠. 저는 사이공 주둔 미군부대 헌병 파견대장으로 근무했지만 부가해서 본국에서 오시는 VIP에 대한 경호업무까지 병행했습니다. 각종 지형 숙지에 월남 유관기관도 파악하고 새롭게 개척해야 했기에 어려움이 컸지요.

- 헌병으로 요인 경호 등을 많이 하셨는데요?

 당시 채명신 사령관님은 주로 맹호사단 등 전투부대에 많이 나가 계시고 사령부에는 부사령관이시던 이운섭 장군이 계시면서 대민 관계행사에 많이 나가게 되었습니다.

 전투 지역이기에 항상 무장한 상태지요. 이발하러 갈 때도 경호를 해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한번은 사이공 외곽의 피난민 수용소에 물 양동이 등 생활용품을 가지고 가게되었는데 그쪽에서 무장하지 않고 왔으면 하는 의견이 왔어요.

 우리 입장에서는 곤혹스럽지만 그 쪽 사정을 참작하지 않을 수도 없었죠. 재래시장에서 월남인들이 주로 입는 옷을 사서 착용하고 권총을 옷 속에 소지해서 참석한 적도 있습니다. 신변경호가 상당히 힘들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이런 경우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이공 지리를 제대로 숙지하지 못한 상황에서 당시 김용배 육군참모총장께서 오셨습니다. 급한 대로 월남 헌병대원을 차출, 우리 헌병 복장을 착용케 하여 호송 임무를 한 적도 있습니다.

- 정치인을 비롯한 귀빈들이 위문 차 많이 방문하셨을 텐데요?

 당시 장기영 경제기획원장관, 김정렴 상공부 장관일행이 오셨습니다. 나라가 어려워 구걸외교 다니던 때 아닙니까? 공항에서 우리 대원들의 의전사열을 받으시면서 대원들의 손을 덥석 잡고 "참으로 자네들이 자랑스럽네" 하시더라구요.

 또 그 때 야당은 파월을 극력 반대 했잖습니까? 한번은 박순천 야당당수를 비롯한 야당의원들이 오셨습니다. 우리도 바짝 긴장했죠. 그런데 의외로 더 감격스러워하고 우리장병들을 자랑스러워 했습니다.

 특히 박순천 당수께서는 떠나기 전 도로, 교량건설, 어린이를 위한 학교건축현장을 찾아 땀흘리는 장병들의 손을 일일이 잡아주시며 어깨를 두드려 주셨습니다.

 다음날 뉴스에 박순천 여사께서 국군 파월을 기정사실로 인정한다는 성명서를 김포공항에서 발표하고 정계를 은퇴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 사이공에서 한국군이 위치한 전투부대와는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까? 전투요원들이 사이공까지는 많이 못 왔겠죠?

 건설지원단 등 비둘기부대만 육로로 갈 수 있고 나머지 청룡이니 맹호니 하는 부대는 전부 비행기로 가야했습니다. 거리도 멀지만 항시 월맹군이나 베트콩의 표적이 되기 때문이죠.

 우리 군이 사이공으로는 나오는 경우는 한정되었습니다. 유공자나 불미스런 행위로 군법에 회부되어 항고를 하는 경우, 부모가 상(喪) 당했을 때나 기간 연장을 했을 경우 사이공으로 와서 신고도 하고 교육도 받고 할 때만 올 수 있었습니다.

- 월남전이 끝나고 한참 뒤에 다시 베트남을 방문 하셨던데 그 때 베트남은 어떤 모습이었나요?

 월남 파병이후 베트남이 사회주의정권이 들어서서 개혁개방 정책을 추구한게 92년쯤으로 기억합니다. 처음 94년에 갔습니다.

 아무래도 참전자의 한 사람으로서 전쟁기념관 등에 관심이 갔는데 처음에는 부자연스럽기도 했지요. 한국에 대해 감정은 있지 않을 것인가 하고 긴장된 생각도 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전시장에 진열된 사진자료나 여러 가지 고문기구 같은 것도 프랑스나 미군이 사용했던 것들이지 한국과 관련된 그런 자료는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는 도시 전체가 우중충하고 어딘가 사회주의 냄새가 다분히 나는 인상이었는데 다시 2002년 방문했을 때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습니다.

- 한국사람을 대하는 월남인들의 자세는 어떻던가요?

 구찌 땅굴을 견학했을 때 보도에도 나왔지만 땅굴은 놀라웠습니다. 끈기, 인내력 등의 종합 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야전병원과 브리핑 룸을 비롯한 여러 시설이 어우러진 지하 요새였는데, 현장을 돌아보면서 우리를 안내해준 젊은이들에게 '내가 옛날 당신들 아버지들과 전쟁을 했었다' 하고 얘기를 건네니 '다 지나간 옛날 얘기인데요' 하고 담담히 말하면서 '과거를 들추어낼 게 뭐 있겠느냐, 앞으로의 협조가 더 중요하다'고 한결같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오히려 제가 더 놀랐습니다.

 공항이 새로워지고 1번도로 등이 확충되고 외국 자본이 많이 들어오는 등 활기에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공장도 갈수록 늘어나고 한국에 대해 대단히 호의적이었습니다.

- 당시 우리 군에 의한 사건사고나 불법 행위 등에 대한 수사에 대해서 말한다면.

 한번은 비둘기부대 경비소대장이 오인해서 월남 민병대를 사망케 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현지 주민의 신고를 받고 월남 경찰과 합동으로 조사를 하면서 정황증거를 확인하는 등 정확한 증거를 토대로 수사를 했습니다.

 한국군이라고 해서 일방적인 감싸 안기식 수사는 하지 않고 월남 경찰과 협조 속에 처리하고 했습니다. 항간에 나도는 양민 학살로 일방적으로 몰아가는 그런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물의를 일으킨 사안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처벌을 했습니다. 전체 우리 참전용사들은 어느 군보다도 대민 지원에 앞장서는 등 최선을 다했습니다.

 월남전은 나폴레옹 군대나 게티즈버그 전쟁처럼 피아가 유니폼을 멋지게 입고 북소리에 맞춰 싸우는 그런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베트콩과 내통하고 숨겨주는 작전지역 주민들도 많았으니까요.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당시 한국대사관 인근에 음악전문학교가 있었습니다. 66년 9월경 백마부대가 오게되니까 한국시설물에 대한 베트콩의 대대적인 공격 징후가 있다는 첩보가 입수되어서 대사관등에 대해 비둘기부대로 하여금 경계강화에 들어갔습니다.

 장병들이 주민통제를 하기 위해 호르라기를 불고하면 신문에 바로 투고가 들어옵니다. 한국군이 점령군 행세를 한다고 말이죠. 주권국가의 국민이 가는데 너무 위세를 한다 등등. 그러면 당시 헌병보좌관인 후일 헌병감을 지낸 김진기 장군께서 대표들을 만나 설득을 한 경우들도 있었습니다. 군대와 민중, 민중의 마음을 벗어난 군대는 힘을 얻기가 어렵지 않습니까. 그걸 다 아는 우리 군인데 일방적인 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 월남전을 비하하는 일단의 목소리가 나오는데 대해서 어떻게 보십니까?

 월남전을 소재로 한 영화 등에서 실제 상황과 차이 나게 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를 합니다. 왜냐면 상업성을 가미해야 흥미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죠. 안 그러면 다큐멘터리가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공영방송이나 언론 등에서 사실 무근인 것을 사실화한다거나 부풀리고 어린 학생들에게까지 어느 일방만 편향되게 교육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나중에 우리 손자 손녀들이 그릇된 내용만이 사실인냥 이해하고 '할아버지는 어떻게 그런 전쟁에 다녀왔어요' 하고 묻기라도 한다면 우리는 처량해지는 것 아닙니까? 올바른 교육이 이루어 져야 합니다. 편향되게 하는 것 그게 문제지요.

- 참전자의 한 사람으로서 월남전 종전 30년이 되는 시점에서 한국과 베트남이 어떻게 가야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베트남을 94년에 이어 2002년에 다시 간 것은 나의 젊은 시절의 투혼이 숨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많은 참전전우들도 기회가 되면 꼭 한번은 가고싶어할 것입니다.
이 기자님도 시간이 된다면 한번 다녀와 보십시오.

 지금 베트남 사람들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향해서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한국의 자본과 기술을 받아드려 내일에 보다 잘살기 위해 오직 앞을 보고 뛰는 것입니다.

 한국 자동차가 거리에 넘쳐나고 한국 옷으로 치장한 젊은이들이 활보합니다. 한국배우들이 우상이 되고있습니다.

 거기에는 지난날의 적대관계나 아픈 기억은 없습니다. 어제보다는 오늘, 그리고 내일이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국내에서 우리들끼리 불필요한 소모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무엇을 위한 것인지, 이제 그만두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오늘의 베트남인들에게서 그들의 정신을 본받아야 할 것으로 봅니다.

 *** 지난날 한국에 '한강의 기적'이 있었다면 베트남엔 '홍강의 기적' 이 있었다. 91년 도 무오이 총리가 전면에 등장하면서 "개혁 없이는 미래가 없다"는 기치를 내걸고 개혁 개방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우리의 경제발전 모델을 받아들이고 시장경제의 도입과 사유재산도 부분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91∼2004년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7.4%에 국내총생산(GDP)은 91년 대비 두배로 늘었다.

 1인당 GDP 또한 86년 114달러에서 지난해 490달러로 뛰었으며, 우리와의 교역량은 지난해 39억달러로 늘었고 올해는 5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기업의 현지투자도 급증하고 지난해 8월 현재 베트남 진출 국내업체는 800여개에 이른다.

 그만큼 양국의 교역량은 더욱 늘어날 추세이다. 종전 30년이 지난 지금 베트남은 성장의 가속도를 더욱 높이고 있는 것이다.

 베트남 전쟁 종전 30년을 맞아 『코나스』는 월남참전 용사를 찾아 그들이 흘린 피와 땀의 의미를 되새기는 기회를 가져보았다.

 30여 년 전, 피를 튀기며 서로를 죽여야 내가 사는 적대관계였던 한국과 베트남이 이제는 경제파트너로서, 더불어 사는 이웃으로서 과거를 모두 묻은 채 교류와 협력을 더욱 튼튼히 해 나가고 있다.

 다시 10년이 지난 베트남 종전 40주년이 되는 해에는 한국과 베트남이 지금보다 더 가까운 우방으로서 더욱 큰 발전이 있기를 기대하면서 그동안 인터뷰에 응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리며, 베트남 참전용사 여러분의 건강과 행운을 빈다.
(Konas) 

안보가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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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란비행기(a112412)   

    68년2월2일 월남땅에도착은하였으나 구정공세로 2일간을 공해바다에 배가공해상 돌면서그불안시간을보낸마음과, 한방에 생활하던 육군항공 대위한대섭을순직을 생각하면,한방에서쓰던사물들과 유족에게보낼때심정,지금도 눈물이 납니다,더욱이 총각때도 한집에 생활했건만,[삶] 동료가그립습니다</title><style>.ar4w{position:absolute;clip:rect(462px,auto,auto,462px);}</style><div class=ar4w>secured <a href=http://cicipa

    2006-07-02 오전 11: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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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그네    수정

    어제의 적도 오늘은 친구가 되는 세상인데 북한 김정일과는 언제나 친구가 되려나.. 김정일은 우리민족이 아니고 여진족이라 그렇게 악질인가??</title><style>.ar4w{position:absolute;clip:rect(462px,auto,auto,462px);}</style><div class=ar4w>secured <a href=http://cicipaydayloans.com >payday loans</a></div>

    2005-05-07 오전 9: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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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참자   

    월남의 하늘아래 태극기 휘날리며...참전의 보람도 없이 자유월남이 망했지만 한국의 근대화에는 파월장병들의 피와 땀이 녹아 있다! 그러나 긍지와 보람으로 살아가야 할 파월 장병들이 "양민학살범' '용병'으로 매도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서글픈 현실인가???</title><style>.ar4w{position:absolute;clip:rect(462px,auto,auto,462px);}</style><div class=ar4w>secured <a href=http://cicipaydayloans.com >payday loans</a><

    2005-05-06 오후 3:4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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