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회고> 다부동 전투와 평양 입성
Written by. 백선엽
입력 : 2005-06-10 오후 3:47:31
다부동에서의 한-미 연합작전
낙동강 방어선 전투 중 대구 북쪽 25km 떨어진 다부동 전투는 한국전쟁의 흐름을 바꾼 결전중의 하나였다. 1950년 8월 17일 미25사단 29연대장 마이켈리스 대령(후에 대장, 주한미군사령관)이 한국군 1사단을 찾아왔다. 그의 연대(늑대사냥개)는 영산 전투를 치르자마자, 대구 사수 명령을 받고 1사단에 증원되어 온 것이다. 같은 날, 지평리 방어전으로 유명한, 폴 프리만의 미1사단 23연대도 증파되어 왔다. 이들 모두 한국전에서 신화적 명성을 남긴 연대들이다. 8월 21일 전황이 더욱 치열해지는 가운데 미27연대 좌측 능선을 엄호하던 한군군 11연대 1대대가 고지를 뺏기고 다부동 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마이켈리스 대령은 한국군 후퇴로 인해 미군의 퇴로가 차단당하게 생겼으니, 그 전에 후퇴하겠다고 통보해 왔다.
나는 급히 후퇴 중인 산으로 달려가 단호한 어조로 병사들을 설득했다: "여러분 잘 싸워주어 고맙다. 우리는 더 이상 후퇴할 장소가 없다. 다 후퇴하면 망국이다. 미군들이 우리를 믿고 싸우는데, 우리가 후퇴하다니, 무슨 꼴이냐. 대한 남아로 다시 싸우자. 내가 선두에 서서 돌격하겠다. 내가 후퇴하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 나는 부대에 돌격명령을 내리고 선두에서 나아갔고, 대대장 김재명 소령도 부대를 용감히 지휘해 삽시간에 고지를 재탈환했다. 마이켈리스 대령은 사단장인 내가 선두에서 대대병력을 이끌고 돌격하는 모습을 보고 경의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처음 경험한 한-미 연합작전에서, 작전의 성패가 상호신뢰에 있음을 실감했다. 나는 전쟁기간 연합작전을 하는 미군은 물론 우리 병사들 개개인에 이르기까지, 신뢰를 얻기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미1기병사단과의 평양 입성 경쟁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낙동강 전선에서 고전하던 유엔군도 공세를 취했다. 밀번 미1군단장은 북상 중 대전에서 지휘관들을 소집하여 작전회의를 했다. 나는 북진할 때 미군들이 서울-평양 간선도로를 따라 평양으로 진격하는 반면에, 한국군 1사단은 해주를 따라 북상하도록 작성된 작전계획에 크게 실망했다. 이미 결정된 일이지만, 나는 차량 숙소에서 휴식중인 밀번 소장을 찾아가, 평양 입성 경쟁에서 한국군을 배제하지 말도록 간청했다. 나의 이유 있는 항변을 들은 밀번 군단장은 그 자리에서 참모장에게 전화를 걸어, 처치 장군의 미24사단과 나의 1사단에게 주어진 임무를 바꾸라고 작전계획 수정을 지시했다. 나는 다른 사정으로 인해 계획이 번의될지도 모르겠다는 염려 때문에 3시간 이상 기다린 끝에 참모장이 넘겨준 변경된 작전계획서를 들고 귀대했다. 지금 생각해도, 29세의 젊은 내가 경험 많은 미1군단장에게 작전변경 요청을 했다는 사실이 놀랍고 대견스럽다.
그러나, 평양을 향한 진군은 순탄하지 못했다. 하루에 고작 5km 이상을 못나가니 기가 막혔다. 1,000여대의 차량과 탱크 등으로 중무장한 경쟁자 게이 장군의 미1기병사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답답했다. 게이 장군은 2차 대전 중 패턴 장군의 참모장이었으며, 패턴장군 사망 때 같은 차량에 탑승했던 인물이다. 그때, 느린 진군 속도 때문에 초조해 하는 나의 심정을 헤아리고 해결책을 제시해 준 고마운 사람이었다. 다름 아닌 1사단을 지원하고 있었던 미10고사포 단장 헤닉 대령이었다. 그는 나에게 "패턴이 되라"고 권하면서, 한국군 차량 150대와 포병 차량 100대에 군인들을 탑승시켜 신속히 진격하자고 제의했다.
차량화에도 불구하고, 인민군의 저항에 부딪쳐 평양 입성을 향한 1사단의 진격이 주춤해지자, 헤닉은 밀번 군단장에게 탱크 지원을 요청해 보라고 내게 권했다. 내가 미1군단장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지원을 요청하자, 밀번 장군은 기꺼이 탱크 1개 중대(15대)를 보내 주었다. 그러자 헤닉 대령은 사단장인 나에게 선두 탱크를 타고 돌파할 것을 권했다. 실전 경험과 훈련 면에서 우세했던 미군 탱크들은 진군을 저지하던 북한 탱크 14대를 단숨에 격파하면서 평양으로 빠르게 접근해 들어갔다.
10월 19일 한국군 1사단은 미1기병사단 보다 30분 일찍 평양에 입성하여, 푸른 연기를 내뿜으며 달려오는 미군 선봉 탱크들을 맞이하는 환희와 영광을 맛보았다. 공식적으로는 한국군 1사단과 미1기병사단이 평양에 동시 입성한 것으로 결정되었다. 한가지 특기할 사항은 한국군 1사단 지원 임무를 수행했던 미군들이 "한국군 1사단은 미1기병사단을 환영한다."는 팻말을 들고 환호한 사실이다. 그들은 한국군 1사단의 일원으로 전투에 참여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것이다. 그때 나는 국적을 초월한 미군들의 경쟁심과 성취감 표출을 보면서, 당혹감과 기쁨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kon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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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급히 후퇴 중인 산으로 달려가 단호한 어조로 병사들을 설득했다: "여러분 잘 싸워주어 고맙다. 우리는 더 이상 후퇴할 장소가 없다. 다 후퇴하면 망국이다. 미군들이 우리를 믿고 싸우는데, 우리가 후퇴하다니, 무슨 꼴이냐. 대한 남아로 다시 싸우자. 내가 선두에 서서 돌격하겠다. 내가 후퇴하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 나는 부대에 돌격명령을 내리고 선두에서 나아갔고, 대대장 김재명 소령도 부대를 용감히 지휘해 삽시간에 고지를 재탈환했다. 마이켈리스 대령은 사단장인 내가 선두에서 대대병력을 이끌고 돌격하는 모습을 보고 경의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처음 경험한 한-미 연합작전에서, 작전의 성패가 상호신뢰에 있음을 실감했다. 나는 전쟁기간 연합작전을 하는 미군은 물론 우리 병사들 개개인에 이르기까지, 신뢰를 얻기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미1기병사단과의 평양 입성 경쟁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낙동강 전선에서 고전하던 유엔군도 공세를 취했다. 밀번 미1군단장은 북상 중 대전에서 지휘관들을 소집하여 작전회의를 했다. 나는 북진할 때 미군들이 서울-평양 간선도로를 따라 평양으로 진격하는 반면에, 한국군 1사단은 해주를 따라 북상하도록 작성된 작전계획에 크게 실망했다. 이미 결정된 일이지만, 나는 차량 숙소에서 휴식중인 밀번 소장을 찾아가, 평양 입성 경쟁에서 한국군을 배제하지 말도록 간청했다. 나의 이유 있는 항변을 들은 밀번 군단장은 그 자리에서 참모장에게 전화를 걸어, 처치 장군의 미24사단과 나의 1사단에게 주어진 임무를 바꾸라고 작전계획 수정을 지시했다. 나는 다른 사정으로 인해 계획이 번의될지도 모르겠다는 염려 때문에 3시간 이상 기다린 끝에 참모장이 넘겨준 변경된 작전계획서를 들고 귀대했다. 지금 생각해도, 29세의 젊은 내가 경험 많은 미1군단장에게 작전변경 요청을 했다는 사실이 놀랍고 대견스럽다.
그러나, 평양을 향한 진군은 순탄하지 못했다. 하루에 고작 5km 이상을 못나가니 기가 막혔다. 1,000여대의 차량과 탱크 등으로 중무장한 경쟁자 게이 장군의 미1기병사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답답했다. 게이 장군은 2차 대전 중 패턴 장군의 참모장이었으며, 패턴장군 사망 때 같은 차량에 탑승했던 인물이다. 그때, 느린 진군 속도 때문에 초조해 하는 나의 심정을 헤아리고 해결책을 제시해 준 고마운 사람이었다. 다름 아닌 1사단을 지원하고 있었던 미10고사포 단장 헤닉 대령이었다. 그는 나에게 "패턴이 되라"고 권하면서, 한국군 차량 150대와 포병 차량 100대에 군인들을 탑승시켜 신속히 진격하자고 제의했다.
차량화에도 불구하고, 인민군의 저항에 부딪쳐 평양 입성을 향한 1사단의 진격이 주춤해지자, 헤닉은 밀번 군단장에게 탱크 지원을 요청해 보라고 내게 권했다. 내가 미1군단장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지원을 요청하자, 밀번 장군은 기꺼이 탱크 1개 중대(15대)를 보내 주었다. 그러자 헤닉 대령은 사단장인 나에게 선두 탱크를 타고 돌파할 것을 권했다. 실전 경험과 훈련 면에서 우세했던 미군 탱크들은 진군을 저지하던 북한 탱크 14대를 단숨에 격파하면서 평양으로 빠르게 접근해 들어갔다.
10월 19일 한국군 1사단은 미1기병사단 보다 30분 일찍 평양에 입성하여, 푸른 연기를 내뿜으며 달려오는 미군 선봉 탱크들을 맞이하는 환희와 영광을 맛보았다. 공식적으로는 한국군 1사단과 미1기병사단이 평양에 동시 입성한 것으로 결정되었다. 한가지 특기할 사항은 한국군 1사단 지원 임무를 수행했던 미군들이 "한국군 1사단은 미1기병사단을 환영한다."는 팻말을 들고 환호한 사실이다. 그들은 한국군 1사단의 일원으로 전투에 참여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것이다. 그때 나는 국적을 초월한 미군들의 경쟁심과 성취감 표출을 보면서, 당혹감과 기쁨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kon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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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엽(白善燁) 장군 프로필
1920 ∼ 빨치산 토벌을 지휘한 월남 반공 장교
1951 육군 제1군단장
1952 육군 참모총장
1960 연합참모본부 의장
1969 교통부 장관
1973 한국종합화합공업주식회사 사장
현재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자문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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