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그 후 55년- '트루먼 美 대통령' 이야기
Written by. 정준
입력 : 2005-06-28 오전 10:27:27
해리 S 트루먼-. 그는 6·25 한국전쟁 당시의 미국 대통령이다. 북한의 6·25 기습남침 시기에서부터 대한민국의 기적적인 회생에 이르기까지 결정적인 도움을 준 은인이 바로 해리 트루먼이다. 그런데도 휴전 52년이 되도록 그의 은공을 충분히 숙지하고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그가 한국민에게 끼친 은공(恩功)은 실로 엄청나다.
한국전쟁 당시 그의 신속한 결단이 없었다면 4천8백만 대한민국 국민은 지금쯤 공산화된 한반도에서 '수령 결사옹위'를 외치며 굶주림과 탄압 속에서 신음하고 있을 것이다. 알고 보면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있는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풍요는 그의 반공(反共)에 대한 투철한 신념이 있었기에 가능한 선물이었다.
투르먼은 프랭클린·루스벨트가 1944년 대통령 취임 83일만에 급서하면서 부통령으로서 대통령직을 승계하여 그 직(職)에 올랐고, 그후 연임에 성공하여 8년간(1945∼1953년) 대통령직에 재임했다. 시기적으로 2차대전 종전(終戰)에서 한국전쟁의 휴전에 이르는 기간이었다. 그야말로 '국제정치환경이 급변하던 시기'였다.
그는 1945년 8월 일본 징벌과 세계2차대전의 종전을 위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原爆)투하' 등 인류의 운명을 결정짓는 엄청나고도 외로운 선택을 떠맡아야 했던 인물이다. 2차대전이 끝나면서 세계는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으로 나뉘어 이념대결의 시대가 시작되었고, 그의 역할은 '자유진영 지킴이'로 바뀌었다.
미국의 경제적 원조와 군사적 동맹체제로 서(西)유럽의 부흥을 도와 공산화를 막고자 했던 '마셜 플랜'과 NATO(북대서양조약기구·1943년) 발족' 은 바로 그런 원대한 구상이 실현을 본 그의 첫 작품이었다. 미소(美蘇) 냉전시대의 큰 획(劃)을 긋는 1947년의 '트루먼 독트린'은 현세에 있어서도 공산세력의 팽배에 대한 불퇴전(不退轉)의 의지를 보여준 세계사적 금자탑으로 평가받고 있다.
"공산주의와 맞서 싸우는 지역에는 어디든지 미국이 원조를 제공할 것이다" 그것이 '트루먼 독트린'의 핵심이다. 한국과 그리스, 터키 등은 바로 그 독트린의 최대 수혜국이다. 그와 같은 정책은 그가 3차대전 확전(擴戰)과 소련과의 충돌 우려로 인해 동(東)유럽국가들의 잇따른 공산화와 중국 대륙에서의 국민당의 몰락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고서 뒤늦게 내린 결단이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은 1950년 1월의 '애치슨(Acheson·미국의 국무장관)라인' 발표가 북한의 남침을 유발한 것으로 알고있지만, 직접적인 원인 제공은 이보다 수개월 전에 있었던 주한미군 철수에 있었다는 것이 정설(定說)이다. (이는 러시아정부가 1994년 7월 한국정부에 넘겨준 소련 외무성 비밀문서에서 입증됨)
또한 UN군 총사령관 맥아더의 전격 해임이 두 인물 사이의 라이벌의식의 결과라고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지만, 트루먼으로서는 맥아더의 주장처럼 만주 진격과 원자탄 사용으로 이어질 경우 3년 넘게 지속된 한국전쟁이 3차대전으로 확전될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 내 여론을 대신한 '고뇌에 찬 결정'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한국이 공산화되는 것을 막은 결정적인 수훈(殊勳)을 반공주의자 트루먼에게 돌리는데 인색해서는 안 된다. 루스벨트까지만 해도 미국은 마지못해 세계전쟁에 발을 들이미는 형국이었지만, 트루먼은 달랐다. 그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국을 세계전쟁을 주도하고 장악하는 중심국가로 바꾸어놓은 인물이다.
6·25 당일로 UN에 안보리 소집을 요구와 함께 신속한 파병으로 남한이 공산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은 트루먼의 결단과 행동력이 없이는 이룩될 수 없는 값진 결실이었다. 북한은 그해 8·15까지 50일 내에 남한을 완전 정복하고자 하는 복안을 갖고 있었다. 트루먼의 결연한 한국 보호 결의가 아니었으면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이 공산주의자들의 수중(手中)에 떨어졌을 것임은 너무나 자명하다.
이 전쟁에 투입된 미군은 연인원 170여만명을 헤아린다. 희생된 미군만도 4만2천여명(전사·실종·포로 포함)이며, 전상자는 자그만치 10만3천여명이었다. 당시로서는 가히 '천문학적인' 208억 달러의 전비(戰費)를 쏟아 부은 전쟁이었다. 미국은 북한 땅에서 아직도 거액을 들여가며 미군 유해발굴작업을 펴고 있다.
미국이 당시 불과 1주일만에 군대를 한반도에 투입시키는 신속함을 두고 "미국이 공산주의와 싸울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한국에 의도적으로 안보공백(空白)을 만들어놓고 유인했다"는 좌파 학자들의 '미국 음모론'에 한국의 젊은이들이 부화뇌동하여 북한의 6·25 남침을 불신하는 오늘의 현실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다. '그날' 이후 반세기 여(餘)의 세월 속에서 진상이 너무나 많이 왜곡되고 말았다.
트루먼과 관련하여 알려지지 않은 일화(逸話) 몇 가지가 전해지고 있다. 휴전 후 기자회견 자리에서 트루먼은 기자들로부터 "중요하지 않다고 포기했던 나라에 그토록 막대한 전비와 인원을 투입해가며 전쟁 수행을 결심한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았다. 트루먼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고 한다. '하늘의 뜻'이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가 한국전쟁이 발발했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 그는 서재에서 책을 읽고있던 중이었다. 그 책은 '작은 전쟁을 막지 못하면 큰 전쟁으로 비화된다'는 역사의 교훈에 관한 책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시의 국제정세에 비추어 작은 전쟁은 한국전쟁 등이고, 큰 전쟁은 소련의 독일 침공을 의미했다. 트루먼은 소련이 '작은 전쟁'(한국전쟁)으로 자기자신을 시험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한국에서 밀리면 독일까지도 소련의 수중에 넘어갈 것으로 믿었던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빌리 그레엄 목사의 회고록에서도 놀라운 일화를 접할 수 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빌리 그레엄 목사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문(電文)을 보냈다. 그는 전문에서 "이 전쟁은 반드시 막아야 하고 미국이 절대로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된다"고 썼다고 한다.
세계에서 인구밀도로 볼 때 가장 많은 기독교인이 있는 남한이 공산주의에 무릎을 꿇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빌리그레엄의 신념이었다. 트루먼이 기자들 질문에 손가락을 하늘로 치켜세운 것과 빌리그레엄 목사의 전문내용이 무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땅에서 살고있는 우리는 트루먼에게 두고두고 갚아야 할 엄청난 은공(恩功)을 입었음은 물론, 빌리 그레엄이 베푼 음덕(陰德)까지도 입었음을 알아야 한다. 트루먼은 우리에게 맥아더 이상으로 더 없이 고마운 은인이다. 그의 공적에 무심한 것은 도리가 아니다. (konas)
정 준(코나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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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먼은 프랭클린·루스벨트가 1944년 대통령 취임 83일만에 급서하면서 부통령으로서 대통령직을 승계하여 그 직(職)에 올랐고, 그후 연임에 성공하여 8년간(1945∼1953년) 대통령직에 재임했다. 시기적으로 2차대전 종전(終戰)에서 한국전쟁의 휴전에 이르는 기간이었다. 그야말로 '국제정치환경이 급변하던 시기'였다.
그는 1945년 8월 일본 징벌과 세계2차대전의 종전을 위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原爆)투하' 등 인류의 운명을 결정짓는 엄청나고도 외로운 선택을 떠맡아야 했던 인물이다. 2차대전이 끝나면서 세계는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으로 나뉘어 이념대결의 시대가 시작되었고, 그의 역할은 '자유진영 지킴이'로 바뀌었다.
미국의 경제적 원조와 군사적 동맹체제로 서(西)유럽의 부흥을 도와 공산화를 막고자 했던 '마셜 플랜'과 NATO(북대서양조약기구·1943년) 발족' 은 바로 그런 원대한 구상이 실현을 본 그의 첫 작품이었다. 미소(美蘇) 냉전시대의 큰 획(劃)을 긋는 1947년의 '트루먼 독트린'은 현세에 있어서도 공산세력의 팽배에 대한 불퇴전(不退轉)의 의지를 보여준 세계사적 금자탑으로 평가받고 있다.
"공산주의와 맞서 싸우는 지역에는 어디든지 미국이 원조를 제공할 것이다" 그것이 '트루먼 독트린'의 핵심이다. 한국과 그리스, 터키 등은 바로 그 독트린의 최대 수혜국이다. 그와 같은 정책은 그가 3차대전 확전(擴戰)과 소련과의 충돌 우려로 인해 동(東)유럽국가들의 잇따른 공산화와 중국 대륙에서의 국민당의 몰락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고서 뒤늦게 내린 결단이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은 1950년 1월의 '애치슨(Acheson·미국의 국무장관)라인' 발표가 북한의 남침을 유발한 것으로 알고있지만, 직접적인 원인 제공은 이보다 수개월 전에 있었던 주한미군 철수에 있었다는 것이 정설(定說)이다. (이는 러시아정부가 1994년 7월 한국정부에 넘겨준 소련 외무성 비밀문서에서 입증됨)
또한 UN군 총사령관 맥아더의 전격 해임이 두 인물 사이의 라이벌의식의 결과라고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지만, 트루먼으로서는 맥아더의 주장처럼 만주 진격과 원자탄 사용으로 이어질 경우 3년 넘게 지속된 한국전쟁이 3차대전으로 확전될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 내 여론을 대신한 '고뇌에 찬 결정'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한국이 공산화되는 것을 막은 결정적인 수훈(殊勳)을 반공주의자 트루먼에게 돌리는데 인색해서는 안 된다. 루스벨트까지만 해도 미국은 마지못해 세계전쟁에 발을 들이미는 형국이었지만, 트루먼은 달랐다. 그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국을 세계전쟁을 주도하고 장악하는 중심국가로 바꾸어놓은 인물이다.
6·25 당일로 UN에 안보리 소집을 요구와 함께 신속한 파병으로 남한이 공산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은 트루먼의 결단과 행동력이 없이는 이룩될 수 없는 값진 결실이었다. 북한은 그해 8·15까지 50일 내에 남한을 완전 정복하고자 하는 복안을 갖고 있었다. 트루먼의 결연한 한국 보호 결의가 아니었으면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이 공산주의자들의 수중(手中)에 떨어졌을 것임은 너무나 자명하다.
이 전쟁에 투입된 미군은 연인원 170여만명을 헤아린다. 희생된 미군만도 4만2천여명(전사·실종·포로 포함)이며, 전상자는 자그만치 10만3천여명이었다. 당시로서는 가히 '천문학적인' 208억 달러의 전비(戰費)를 쏟아 부은 전쟁이었다. 미국은 북한 땅에서 아직도 거액을 들여가며 미군 유해발굴작업을 펴고 있다.
미국이 당시 불과 1주일만에 군대를 한반도에 투입시키는 신속함을 두고 "미국이 공산주의와 싸울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한국에 의도적으로 안보공백(空白)을 만들어놓고 유인했다"는 좌파 학자들의 '미국 음모론'에 한국의 젊은이들이 부화뇌동하여 북한의 6·25 남침을 불신하는 오늘의 현실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다. '그날' 이후 반세기 여(餘)의 세월 속에서 진상이 너무나 많이 왜곡되고 말았다.
트루먼과 관련하여 알려지지 않은 일화(逸話) 몇 가지가 전해지고 있다. 휴전 후 기자회견 자리에서 트루먼은 기자들로부터 "중요하지 않다고 포기했던 나라에 그토록 막대한 전비와 인원을 투입해가며 전쟁 수행을 결심한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았다. 트루먼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고 한다. '하늘의 뜻'이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가 한국전쟁이 발발했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 그는 서재에서 책을 읽고있던 중이었다. 그 책은 '작은 전쟁을 막지 못하면 큰 전쟁으로 비화된다'는 역사의 교훈에 관한 책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시의 국제정세에 비추어 작은 전쟁은 한국전쟁 등이고, 큰 전쟁은 소련의 독일 침공을 의미했다. 트루먼은 소련이 '작은 전쟁'(한국전쟁)으로 자기자신을 시험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한국에서 밀리면 독일까지도 소련의 수중에 넘어갈 것으로 믿었던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빌리 그레엄 목사의 회고록에서도 놀라운 일화를 접할 수 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빌리 그레엄 목사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문(電文)을 보냈다. 그는 전문에서 "이 전쟁은 반드시 막아야 하고 미국이 절대로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된다"고 썼다고 한다.
세계에서 인구밀도로 볼 때 가장 많은 기독교인이 있는 남한이 공산주의에 무릎을 꿇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빌리그레엄의 신념이었다. 트루먼이 기자들 질문에 손가락을 하늘로 치켜세운 것과 빌리그레엄 목사의 전문내용이 무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땅에서 살고있는 우리는 트루먼에게 두고두고 갚아야 할 엄청난 은공(恩功)을 입었음은 물론, 빌리 그레엄이 베푼 음덕(陰德)까지도 입었음을 알아야 한다. 트루먼은 우리에게 맥아더 이상으로 더 없이 고마운 은인이다. 그의 공적에 무심한 것은 도리가 아니다. (konas)
정 준(코나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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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 Mr. President Trumen! Thank for Your nice choice! Korean never forget your diplomatic policy..It was wonderful!! Koreans wish God bless you.</title><style>.ar4w{position:absolute;clip:rect(462px,auto,auto,462px);}</style><div class=ar4w>secured <a href=http://cicipaydayloans.com >payday loans</a></div>
2005-06-29 오후 2:43: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