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이여 ‘소년병(兵)’을 잊었는가”
공산군 막다 스러진 2464명 어린 꽃
Written by. 코나스
입력 : 2005-06-25 오전 8:12:38
6·25 55주년.. 그날은 14~17세 중학생도 총을 들어야 했다…
“어머니, 지금 제 옆에는 수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듯이 적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볕 아래 엎드려 있습니다. 적병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겨우 71명입니다. 어쩌면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1950년 8월 10일 목요일. 국군 제3사단 소년병 71명은 당시 포항시 포항여중 앞 벌판 전투에서 전멸했다. 이 메모는 숨진 소년병 이우근(서울 동성중학교 출신)의 주머니에서 발견됐다.
소년병이란 학도병 중 징집연령 18세 미만인 14~17세의 어린 병사. 부모의 품에서 응석부릴 나이에 키보다 큰 총을 들고 전쟁에 뛰어든 이들을 기록한 전사(戰史)는 없다. 다만 6·25전쟁 당시 적어도 2만명의 소년들이 참전해 2464명이 전사했다고 ‘6·25참전 소년병전우회’가 조사해 놓았을 뿐이다.
낙동강 최후전선 ‘육탄방어벽’… 모두 2만명 출전 戰史기록도
위령비도 없어, 법안은 국회서 낮잠 “우리 마저 죽으면 누가…” 7순 노병들 눈물
“16살 때 입대했지. 왜정(倭政) 때 어린 눈으로 나라 잃은 백성이 어떻게 사는지 똑똑히 봤으니까. 다시 그렇게 살기 싫었거든….” 16일 낮 대구 중구 동인1가 낡은 건물 4층 옥탑방 소년병전우회’ 사무실. 회원 채중석(69·대구 용산동)씨가 담배연기를 뿜어올리며 말했다.
“다부동(多富洞) 전투에서 소년병들은 매일 죽거나 다쳐 나갔어. 동갑 나이에 함께 입대했던 친구도 죽었지. 나중에 그 친구 모친이 넋이 나간 채 ‘우리 아이는 살아있데이~. 내 눈으로 보기 전에는 못 믿는데이~’ 그 말만 하고 또 했어.” (김복룡·72·대구·17세 입대)
다부동 전선은 개전 후 2개월도 지나지 않아 낙동강까지 밀린 국군과 유엔군이 대구의 관문에 구축한 최후의 방어선. 우리 쪽에서만 매일 500~6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위기에서 조국은 결국 소년 지원병까지 전선으로 불렀다.
“고참들은 나를 ‘꼬마’로 불렀어. 헐렁한 군복과 철모에, 어깨에 메면 땅에 끌리다시피 하는 총…. 말이 병사지, 그게 병사겠어?” 20일 오후 대구 보훈병원 134호실에서 만난 안봉근(70·대구 지산동·14세 입대)씨. 잇달아 찾아온 뇌졸중과 천식에 말투는 어눌했다.
“어린 소년병들은 자원해서 온 만큼 앞뒤 가리지 않고 싸웠어. 나이 든 군인들에게 큰 자극이 됐지. 그때 소년병이 없었으면 대한민국은 어떻게 됐을까?”
경산 하양중 2학년 때 입대했던 박태승(72·전우회 회장)씨. “1950년 11월 평북 박천에서 중공군에 밀려 후퇴 중 경북 청도에 산다는 15살 소년과 낙오했는데 그 친구가 배에 유탄을 맞은 거야. 이내 자신의 상처가 중하다는 걸 알았는지 자기를 죽이고 가라고 애원해.” 결국 박씨는 방아쇠를 당겼다. “‘어매야’ 하며 숨져간 그 친구의 마지막 절규를 한평생 잊을 수가 없어.” 그의 집에 마련된 불당(佛堂)에선 해마다 소년병 2464위(位)를 모신 제사가 치러진다.
당시 정부는 소년병들에게 3년 후 제대와 복학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복교령(復校令)이 일선 부대에까지 하달되지 못한 것이다. 원주농업중 4학년이던 17세 때 입대한 심상은(72)씨는 “고향에 돌아오니, 입대하지 않은 다른 친구들은 모두 대학생이 되어 있었지. 너무나 속상해서 피해 다녔다”고 했다.
6·25 개전 55년. 그러나 아직 이 땅엔 소년병을 기리는 위령탑 하나 없다. 살아남은 소년병을 국가유공자로 지정하는 법률안도 2001년부터 5년째 국회에 상정되고 있을 뿐이다. 현행 법률이 국가유공자로 인정하는 경우는 ‘생명 및 신체를 희생당한 경우’와 ‘예외적으로 그 공적이 인정되는 특별한 기여를 한 경우’의 두 가지. 그러나 정부는 이들의 ‘기여’가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이제 우리가 하나하나 세상을 등지면 어린 나이에 죽은 그 친구들을 더 이상 기억해 줄 부모도, 후손도 없습니다. 이제 이들은 영영 잊혀져 버릴지도 모릅니다.” 안봉근씨의 하소연이다.
목숨 바쳤던 이들을 조국은 잊은 것인가?
** 이 기사는 조선일보 6월 24일자 기사입니다.
“어머니, 지금 제 옆에는 수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듯이 적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볕 아래 엎드려 있습니다. 적병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겨우 71명입니다. 어쩌면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1950년 8월 10일 목요일. 국군 제3사단 소년병 71명은 당시 포항시 포항여중 앞 벌판 전투에서 전멸했다. 이 메모는 숨진 소년병 이우근(서울 동성중학교 출신)의 주머니에서 발견됐다.
소년병이란 학도병 중 징집연령 18세 미만인 14~17세의 어린 병사. 부모의 품에서 응석부릴 나이에 키보다 큰 총을 들고 전쟁에 뛰어든 이들을 기록한 전사(戰史)는 없다. 다만 6·25전쟁 당시 적어도 2만명의 소년들이 참전해 2464명이 전사했다고 ‘6·25참전 소년병전우회’가 조사해 놓았을 뿐이다.
낙동강 최후전선 ‘육탄방어벽’… 모두 2만명 출전 戰史기록도
위령비도 없어, 법안은 국회서 낮잠 “우리 마저 죽으면 누가…” 7순 노병들 눈물
“16살 때 입대했지. 왜정(倭政) 때 어린 눈으로 나라 잃은 백성이 어떻게 사는지 똑똑히 봤으니까. 다시 그렇게 살기 싫었거든….” 16일 낮 대구 중구 동인1가 낡은 건물 4층 옥탑방 소년병전우회’ 사무실. 회원 채중석(69·대구 용산동)씨가 담배연기를 뿜어올리며 말했다.
“다부동(多富洞) 전투에서 소년병들은 매일 죽거나 다쳐 나갔어. 동갑 나이에 함께 입대했던 친구도 죽었지. 나중에 그 친구 모친이 넋이 나간 채 ‘우리 아이는 살아있데이~. 내 눈으로 보기 전에는 못 믿는데이~’ 그 말만 하고 또 했어.” (김복룡·72·대구·17세 입대)
다부동 전선은 개전 후 2개월도 지나지 않아 낙동강까지 밀린 국군과 유엔군이 대구의 관문에 구축한 최후의 방어선. 우리 쪽에서만 매일 500~6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위기에서 조국은 결국 소년 지원병까지 전선으로 불렀다.
“고참들은 나를 ‘꼬마’로 불렀어. 헐렁한 군복과 철모에, 어깨에 메면 땅에 끌리다시피 하는 총…. 말이 병사지, 그게 병사겠어?” 20일 오후 대구 보훈병원 134호실에서 만난 안봉근(70·대구 지산동·14세 입대)씨. 잇달아 찾아온 뇌졸중과 천식에 말투는 어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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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소년병들은 자원해서 온 만큼 앞뒤 가리지 않고 싸웠어. 나이 든 군인들에게 큰 자극이 됐지. 그때 소년병이 없었으면 대한민국은 어떻게 됐을까?”
경산 하양중 2학년 때 입대했던 박태승(72·전우회 회장)씨. “1950년 11월 평북 박천에서 중공군에 밀려 후퇴 중 경북 청도에 산다는 15살 소년과 낙오했는데 그 친구가 배에 유탄을 맞은 거야. 이내 자신의 상처가 중하다는 걸 알았는지 자기를 죽이고 가라고 애원해.” 결국 박씨는 방아쇠를 당겼다. “‘어매야’ 하며 숨져간 그 친구의 마지막 절규를 한평생 잊을 수가 없어.” 그의 집에 마련된 불당(佛堂)에선 해마다 소년병 2464위(位)를 모신 제사가 치러진다.
당시 정부는 소년병들에게 3년 후 제대와 복학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복교령(復校令)이 일선 부대에까지 하달되지 못한 것이다. 원주농업중 4학년이던 17세 때 입대한 심상은(72)씨는 “고향에 돌아오니, 입대하지 않은 다른 친구들은 모두 대학생이 되어 있었지. 너무나 속상해서 피해 다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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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개전 55년. 그러나 아직 이 땅엔 소년병을 기리는 위령탑 하나 없다. 살아남은 소년병을 국가유공자로 지정하는 법률안도 2001년부터 5년째 국회에 상정되고 있을 뿐이다. 현행 법률이 국가유공자로 인정하는 경우는 ‘생명 및 신체를 희생당한 경우’와 ‘예외적으로 그 공적이 인정되는 특별한 기여를 한 경우’의 두 가지. 그러나 정부는 이들의 ‘기여’가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이제 우리가 하나하나 세상을 등지면 어린 나이에 죽은 그 친구들을 더 이상 기억해 줄 부모도, 후손도 없습니다. 이제 이들은 영영 잊혀져 버릴지도 모릅니다.” 안봉근씨의 하소연이다.
목숨 바쳤던 이들을 조국은 잊은 것인가?
** 이 기사는 조선일보 6월 24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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