光復 60주년의 해 6월을 보내면서 젊은이들에게
금년은 1945년 해방 이후 6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일제(日帝)가 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함에 따라 이 나라가 일제의 식민통치로부터 해방된 해가 간지(干支)로 을유(乙酉)였는데 금년의 간지가 그로부터 60년 주기를 한 바퀴 돌아서 다시 을유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을유의 6월을 보내고 7월을 맞이합니다. 그 6월을 보내면서 필자는 환갑(還甲)을 맞이하는 대한민국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관조(觀照)해 보고 싶은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우리나라의 6월은 그만큼 사연이 많은 달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6월10일은 ‘학생의거’의 날입니다. 1926년 이날은 나라를 일제에 빼앗긴 조선국(朝鮮國) 최후의 왕인 순종(純宗)의 국장(國葬) 날이었습니다. 이날을 이용하여 광주 지역 학생들의 항일(抗日) 만세사건이 터졌습니다. 1919년의 3.1 독립만세 사건에 이어 일제 강점에 대한 한민족의 불요불굴(不撓不屈)의 저항정신을 보여준 또 하나의 민족적 항거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6월은 무엇보다도 6.25의 달이기도 합니다. 김일성(金日成)의 북한은 일요일 새벽을 이용하여 전면 불법 기습 남침을 감행함으로써 대한민국 쪽에서는 유엔의 깃발 아래 도합 21개 유엔 회원국이 참전하고 북한 편에서는 마오쩌둥(毛澤東)의 공산 중국이 참전하는 국제전(國際戰)으로 비화한 가운데 3년간에 걸쳐 계속되면서 남북의 전 한반도를 초토로 만들고 수백만 명의 인명피해와 이산가족 및 실향민을 만들어 낸 민족사상 초유의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전화(戰禍)를 불어 일으켰습니다.
이 두 가지 역사적 사건으로 인하여 6월은 우리나라의 ‘호국ㆍ보훈(護國ㆍ報勳)의 달’이 되었습니다. 6월6일은 우리나라의 ‘현충일(顯忠日)’입니다.
6월은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달입니다. 대한민국의 구절양장(九折羊腸)의 기구한 헌정사(憲政史)를 통해 6월이라는 달은 이달에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하게 만든 사건들로 얼룩져 있습니다. 그 중의 대표적 사건이 1987년의 ‘6월 항쟁(抗爭)’이었습니다. 한국의 정국(政局)은 이미 1979년의 10.26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시해(弑害)에 이어 소위 12.12 사태를 거쳐 1980년의 5.18 광주사태를 통해 전두환(全斗煥) 정권을 탄생시킨 집권 권위주의 세력과 ‘민주화’를 구호로 이에 저항하는 재야 시민사회와의 사이에 갈등구조가 이미 반환점을 넘어서고 있었습니다.
1987년 이 갈등구조는 권인숙 양에 대한 성고문 사건, 박종철 군의 고문치사 사건 등으로 비등점(沸騰點)을 향해 폭주(暴走)를 계속했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이해 4월 이른바 ‘4.13 호헌조치’라는 것으로 이 폭주에 제동을 시도했지만 허사(虛事)였습니다. 급기야 6월에 이한열 군의 최루탄 피격 사망 사건으로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되었고 전두환 정권은 드디어 손을 들었습니다. 6월29일 민정당(民正黨)의 노태우(盧泰愚) 대통령후보가 전두환 정권에 건의하는 형식의 “대통령 직선제 수용”과 “김대중(金大中) 사면ㆍ복권 허용”을 내용으로 하는 8개 항목의 소위 ‘6.29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시민 항쟁세력에게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6월은 이로써 ‘민주화’의 달이 되었습니다.
분단상태 하의 남북관계에서도 6월은 많은 사연을 남긴 달입니다. 1973년6월23일 박정희 대통령은 ‘평화통일 외교정책에 관한 특별선언’을 발표했습니다. 사실상 남북한의 동시 유엔가입을 제의한 이 선언은 그 전 해인 1972년7월4일 남북한이 동시 발표한 ‘남북공동성명’의 연장선상에서 우리나라의 통일ㆍ안보 외교를 ‘탈냉전(脫冷戰)’ 시대로 진입시키는 신호탄이었습니다. 그러나 김대중 정권 때인 2000년의 남북정상회담의 산물인 6.15 ‘남북공동선언’ 발표 이후로, 아직도 서울/토쿄 월드컵 축구가 진행 중인 2002년6월29일에는 서해(西海)상에서 남북한 해군 함정간에 교전이 일어나 북한 함정이 격침되고 쌍방 간 상당한 인명피해가 발생함으로써 남북분단의 긴장국면이 아직도 가시지 않고 있음을 실감하게 해 주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필자는 그 6월을 보내면서 남북관계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생각합니다. 이제 6월은 소위 6.15 ‘남북공동선언’의 달이 되었습니다. 2000년6월 김대중 당시 대통령은 국가정보기관을 동원하여 북한의 독재자 김정일(金正日)에게 5억 달러 + 알파의 대가(代價)를 비밀리에 건네주는 불법을 무릅쓰면서 그의 평양방문을 성사시키고 김정일과 분단사상 초유의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한 끝에 6.15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했습니다. 그의 이 6.15 선언의 발표 이후 6월이 갖는 의미에는 큰 변화가 생기고 있습니다. 6.15 선언의 발표를 계기로 당초 ‘호국ㆍ현충의 달’로 6월이 가졌던 색채는 크게 변질되어 퇴색하고 있습니다.
남과 북에서는 6.15 이후의 남북관계를 그 이전의 남북관계와 구별하려는 노력이 집요합니다.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달라졌느냐”는 의문에 대해서는 신통한 설명이 없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특히 북측의 주장이 적극적이다. 6.15 선언으로 남한을 “크게 변화시켰다”는 것입니다. 6.15 선언 이후 남한에서는 “반공보수(反共保守)세력에 비해 친북련공(親北聯共)세력이 력량 상 우세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주장입니다. 북측은 심지어 남한에서는 6.15 선언의 결과로 “탄압 당하고 숨어살아야 했던 진보적 운동세력이 주류로 등장하고 운동권 세력들이 권력의 칼자루를 쥐었으며 ‘386세대’들이 ‘청와대’까지 진출했다”고 주장합니다. 행간에서 읽혀지는 함의(含意)에 의하면 북측이 여기서 거론하는 ‘남조선’의 ‘진보적 운동세력’ㆍ‘운동권 세력’ㆍ‘386세대’는 바로 북한이 말하는 ‘친북련공세력’입니다.
김정일의 북한은 “6.15 북남공동선언의 결과로 남조선이 ‘친북련공세력’의 천하가 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북측은 더 나아가 6.15 선언의 기본정신이 “우리 민족끼리”라는 ‘민족공조’ 정신이라고 적극적으로 주장하면서 이를 이유로 남측에 대해 주한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폐지, 북한에 대한 ‘주적(主敵)’ 호칭 사용 금지, 탈북자 단체들의 ‘대북방송’ 금지는 물론 북한 핵문제에 대처함에 있어서도 “한미동맹의 틀 속에서 이루어지는 ‘외세공조’를 그만 두고 ‘민족공조’의 차원에서 북한의 편에 서라”고 공공연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북측의 6.15 선언 해석에 대해 남측의 입장이 어떠한 것인지가 분명치 않고 애매하기만 합니다. 분명한 것은 남측의 경우 6.15 선언의 기본정신에 대해 북측처럼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남한사회에서 실제로 발생하고 있는 현실은 “남조선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는 북한의 주장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부정하는 것을 어렵게 해 주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남쪽의 대한민국 국민들 가운데서도 지금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가 백천간두(百尺竿頭)의 위기에 처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작년 9월9일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주주’를 자임하는 1,200여명(뒤에 1,600여명으로 증가)의 ‘유지’들은 그들이 발표한 ‘자유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시국선언문’에서 “지금 이 나라는 이른바 운동권(運動圈) 출신 ‘386’ 세대를 비롯하여 ‘친북ㆍ좌경ㆍ반미 세력’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거리의 사람들 사이에서는 ‘아직 적화통일(赤化統一)은 아니 되었지만 대한민국은 이미 공산화 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무서운 말이 공공연히 회자되고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습니다. 요컨대 지금 대한민국의 집권세력이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아니며 대한민국은 이미 ‘친북’ㆍ‘반미’ 성향의 ‘좌익’ 세상이 이미 되었거나, 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광복 60주년이 되는 해 6월을 보내는 시점에서 필자는 남북관계의 앞날을 걱정하게 됩니다. 금년 6월은 최근의 남북관계에 새로운 화두(話頭)를 던진 달이 되었습니다. 6월14일부터 17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소위 ‘6.15 선언 5주년 축하행사’에 ‘당국’ 대표단을 이끌고 참가했던 정동영(鄭東泳) 통일부장관과 김정일 사이에 이루어진 ‘깜짝 쇼’가 몰아오는 충격파 때문입니다.
김정일은 정 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남북간의 현안 문제들에 관하여 또 한 번 그의 장기(長技)를 남김없이 과시했습니다. 정 장관이 전하는 김정일의 어록(語錄)은 “시원시원”합니다. “미국이 북을 상대로 인정하면 7월중에라도 6자회담에 복귀하겠다” “핵문제만 해결되면 NPT에 복귀하고 IAEA 사찰도 받겠다” “안보문제만 해결되면 핵을 보유할 이유가 없다” “8.15 금강산 이산가족 상봉을 재개하겠다” “8.15 광복절 때 비중 있는 대표단을 서울로 보내겠다” “남북 장성급 회담 재개하겠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초청하겠다” 운운... 김정일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당혹감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의 말대로라면 당면한 현안문제에 관한 그의 입장은 무엇이든지 “하겠다”는 것이 됩니다. 그의 말에 따른다면 그렇게 되지 않는 책임의 소재는 다른 쪽에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가 “하겠다”고 한 것 중의 상당수는 실제로 그가 그렇게 할 것인지의 여부가 아직도 분명치 않습니다. 특히 핵문제에 관한 한 그가 “하겠다”고 한 일은 여전히 “미국이 어떻게 하느냐”가 관건이 되어 있습니다. 미국의 행동과 태도 여하에 따라서는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김정일은 그가 “하겠다”고 한 일을 하지 않을 공산이 여전히 많습니다. 뿐만 아니라 김정일의 북한이 그 동안 당국간의 남북대화를 기피하고 남북관계의 경색상태를 지속시켜온 이유도 입만 열면 “미국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미국의 행동과 태도가 북한이 원하는 대로 바뀌지 않을 때는 남북관계에서 이번에 김정일이 하겠다고 한 일들도 또 다시 유보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는 것입니다.
북한의 태도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이번 정동영 장관의 방북 동정을 통해서 들어나고 있는 사실은 남한의 노무현(盧武鉉) 정부가 특히 북핵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한미동맹’의 차원에서 북한을 설득하고 압박하기보다는 ‘민족공조’의 차원에서 북한측 입장의 ‘대변자’가 되어 오히려 미국을 설득하는 입장으로 인식되지 않을 수 없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6자회담’ 속개 문제와 관련하여 지난 6월10일 있었던 노 대통령과 부시 미국 대통령 간의 한미정상회담과 이번 정동영 장관의 방북 이전에는 공이 북한의 코트 안에 있었으나 그 공을 이번에는 정동영 장관이 들고 나와 미국의 코트로 넘겨 준 형국이 된 것입니다.
정동영 장관과 김정일 간의 면담의 결과로 이제 6자회담 속개가 더 이상 지연되거나 속개가 끝내 무산될 경우 그 것은 ‘미국의 탓 때문“인 것이 되어 남한사회 내의 ‘반미정서’를 증폭ㆍ확산시키는 ‘기름’의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김정일의 북한이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미국의 ‘방해’를 구실로 남북관계에서 이산가족 상봉이나 ‘장성급 회담’ 등 김정일이 정 장관에게 “하겠다”고 ‘약속’했던 일들을 이행하지 않을 때도 그 ‘책임’은 몽땅 미국의 것이 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번 6월에 있었던 한미 정상회담과 정 장관의 방북은 결과적으로 남북 간 ‘민족공조’라는 ‘허구(虛構)’에 대한 환상을 한껏 증폭시키면서 가뜩이나 난파의 위기를 마지하고 있는 ‘한미동맹’에 새로운 부담을 안겨주게 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 광복 60주년의 6월을 흘려보내는 시점에서 우리는 ‘한미동맹’의 뿌리를 한 번 생각해 볼 필요를 느낍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미국이란 어떤 존재인가, ‘한미동맹’이란 무엇인가인 것입니다. 이 근본적 문제에 관하여 지금 특히 이 나라의 많은 젊은이들이 혼동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회가 있고, 시간이 있을 때 이 나라의 젊은이들이 복습해야 할 이 나라의 현대사의 몇 대목이 있습니다.
우선 이 나라 분단의 책임은 우리 민족, 우리 스스로에게 있는 것이지 미국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미국이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는 시점에서 38선이라는 군사분계선을 그어서 일시적으로 한반도를 분단시켰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미국이 그때 38선을 긋지 않았다면 한반도는 이미 전역이 공산화되어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못하고 4천8백만 대한민국 국민은, 북한의 2천3백만 동포가 그렇게 하고 있는 것처럼, 김일성ㆍ김정일의 세습독재 체제 하에서 죽지 못해 살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본다면, 대한민국 국민의 입장에서는 그때 미국이 38선을 그은 것을 고맙게 생각해야 하지 이것을 매도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그 이후 이 나라가 분단된 과정은 우리 스스로의 선택이었지 좌익세력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미국이나 다른 외세가 우리에게 강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반도의 정치적 분단은 1948년 유엔감시 하에 실시된 5.10 총선거를 거부한 북한이 대한민국과는 별개의 분단국가를 북쪽에 수립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으로 그 책임은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북한공산주의자들에게 있는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그로부터 2년 뒤인 1950년6월25일 김일성의 북한이 6.25 전쟁을 도발했을 때 비록 미국을 비롯한 21개 유엔회원국들의 참전이 있었기에 가능해 지기는 했지만, 남쪽의 대다수 우리 국민들은 끝내 공산주의와 북한을 거부함으로써 대한민국을 수호했습니다.
미국과 한국은 6.25 전쟁이 휴전으로 봉합된 뒤인 1954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명실겸전(名實兼全)한 ‘동맹관계’에 진입했고 그 뒤 이 ‘한미동맹’은 특히 1960년대의 한국군 월남 파병을 통해 더욱 공고해 졌습니다. 모든 국가 간 관계가 그러한 것처럼 한이 양국 간에도 많은 갈등 요인들이 잇달아 등장해서 긴장을 증폭시켜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동맹’의 틀 속에서 미국은 한국의 군 현대화와 경제건설, 그리고 외교적 신장을 지원했고 주한미군ㆍ연합작전ㆍ합동훈련ㆍ작계 5027 등을 통해 한반도에서 다시는 전쟁이 재발되지 않도록 하는 ‘전쟁억지력’을 제공함으로써 약관(弱冠) 대한민국이 대외개방과 국제화를 통해 ‘아시아의 네 마리 용(龍)’의 하나가 되어 세계 12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하는 밑거름이 되어 왔습니다. 이 같은 ‘동맹’이 훌륭하고 성공적이었다는 선택이었다는 사실은 지금 한반도의 남과 북에 전개되어 있는 엄연한 사실이 증언해 주고 있는 진실이기도 합니다.
이쯤 되면, 우리에게 대한민국은 열심히 지켜야 될 과거를 가진 자랑스러운 ‘성공한 나라’임이 분명합니다. 대한민국은 핵 이빨로 중무장한 북한으로부터 잘 지켜서 자라나는 어린이들과 새로이 태어날 미래의 동포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소중한 자산입니다. 그리고 ‘한미동맹’은 여전히 전쟁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소중한 호신부(護身符)임이 또한 분명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북의 김정일을 믿을 만큼 신뢰를 구축하지도 축적하지도 못했습니다. 남북 간 신뢰의 구축은 아직도 이룩해야 할 숙제지 현실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6월은 이 모든 것을 기억하고 확인하게 하는 달입니다. 이상의 이야기는 아직은 ‘호국ㆍ보훈의 달’인 6월의 달력장을 넘기면서 해방 전 세대의 막내에 해당하는 68세의 늙은이가 젊은이들에게 주고 싶은 사연입니다. [끝]
이동복(전 남북회담 대표/전 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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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05 오후 12:49: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