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불바다' 핵 공갈과 '민족의 핵' 사이
북한이 "서울 불바다 운운"하고 목청을 높이던 때가 있었다. 지난 94년(3월19일)의 일이다. 북미간의 핵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져있던 상황 타개를 위한 자리였다. 남북한간의 긴장 완화를 위한 특사교환회담 실무접촉에서 남측이 팀스피리트훈련 재개를 거론하자 당시 박영수 북측 단장은 "여기서 서울이 멀지 않다. 전쟁이 일어나면 불바다가 되고 만다"고 내뱉고 퇴장했었다.
당시의 '서울 불바다 운운'은 전형적인 핵 공갈이었다. 그 후 어떤 이유에서인지 북한의 핵 공갈은 꼬리를 감추었다. 저들은 '서울 불바다' 발언이 전략적 실수임을 깨달은 것이 분명하다. 이 때부터 '북핵'은 우리의 뇌리에서 한동안 잊혀지고 저들의 170m 장사정(長射程)포와 240m 방사포를 현저한 안보위협으로 받아들여 왔다.
김일성은 당시 핵 개발을 집요하게 추적해온 미국에 딴청을 부렸다. "미국은 핵 개발의 죄를 뒤집어씌워 우리(북한)를 압살하려 한다" "미국이 핵무기를 1만개 이상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무엇 때문에 한 두개 만들어 세상사람들을 웃기겠는가" "우리는 핵무기를 만들 필요도 없고 능력도 없다. 우리가 핵무기를 만들어 무엇하겠는가" "있지도 않은 '북의 핵 개발 의혹'을 들고 나온 것은 미국이다" 그야말로 '말의 성찬(盛饌)이다.
북한이 정작 고농축우라늄(HEU) 핵 개발을 인정한 것은 그 후 10년이 경과한 지난 2002년 켈리 미국무차관보가 평양을 방문했을 때였다. 그것도 '우리민족끼리'라는 미명 아래 외세로부터 한반도를 지켜내기 위한 '민족 핵' 명칭의 또 다른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왔다.
이런 북한당국이 내세우는 '민족공조론'에 우리가 동조하여 함께 춤출 수는 없는 일이다. 그 10년 세월 동안 북한이 근원적으로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다. 남한이 미국의 외침(外侵)을 받지 않는 것은 저들의 '핵(核) 우산' 덕분이라고 강변하는 그들이다. 엄청난 궤변(詭辯)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한 손으로 식량을 받아들고도 다른 한 손으로는 간첩 잠수정을 내려보내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남쪽이 월드컵 승전으로 축제분위기가 한창일 때를 택해 서해교전을 도발하는 괴이한 족속들이다. UN주재 한 외국대사는 북한의 이런 파렴치한 행위를 일컬어 "먹이를 주는 손을 물어뜯는 격"이라는 말을 남겼다. 북한은 이처럼 국제신뢰를 등진 포악한 집단이다.
대한민국의 역대 정권은 북한의 만행(蠻行)이 있을 때마다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면서 늘 '좌시'해왔고, 북한의 존재를 지나칠 정도로 현존하는 '안보 위협'으로 악용하여 왔으며, '국민의 정부' 이후로는 퍼주기가 아니라면서 '북한이 계속 판돈을 키우는 노름판'(한승주 前주미대사 표현)에 장단을 맞추어 뒷돈을 대주어 왔다.
개인마다 생계수단이 다르듯이 나라마다 살아가는 방법도 다를 수 있다. 나라에 따라 첨단기술·금융·관광 등 살림살이 수단은 다양하다. 북한은 어떤가. 그들이 선택한 길은 그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는 핵폭탄이나 만들어 국제사회를 협박하는 '조폭적 삶'이다.
북한의 핵무기 보유 공언에도 반전(反戰)평화를 외치던 친북·좌경세력은 여전히 미국만을 탓하고 있다. 대다수 국민이 한미(韓美)공조체제 아래 북한 핵개발에 엄중 대응할 것을 우리 정부에 요구할 때에도 그들은 이를 '냉전적 사고(思考)'라고 했다.
미소(美蘇)간의 냉전이 끝나고도 군사분계선 양쪽에 1백만명의 군대가 서로 상대방을 향해 수천 문(門)의 포와 수백 기(基)의 미사일을 조준하고 있는 이 땅에서 냉전이 종식됐다는 그들의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흥정거리'치고 핵(核)만한 것이 달리 있을 리 없다. 북한의 핵 프로그램 존폐를 둘러싼 이른바 '평화(유지) 비용' 대가가 앞으로 '통일비용'이라는 명칭으로 둔갑할 것이고, 그 규모 역시 턱없이 늘어날 것이 자명하다. 저들의 요구가 제아무리 크다 해도 도리 없이 끌려 다녀야 하는 것이 '핵(核) 흥정'이다.
대북송전(送電) 제의만 해도 그렇다. 국민의 정부 시절 '50만kw 수준'에서 내밀하게 검토되어왔던 건(件)이 범국민적인 합의도 없이 자그만치 4배 규모로 껑충 뛰어 올랐다. 매년 '수천 억(億)원' 선에서 이루어져온 대북 지원이 이제는 '수 조(兆)원' 규모로 격상되어 거론되고 있다. 이 정도라면 '봐주기'가 아닌, '퍼주기'가 합당한 표현이다.
북한의 핵 보유가 기정사실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번 4차6자회담의 결과가 1992년의 '한반도 비핵화 선언'처럼 실속 없는 결과로 귀착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이럴 때일수록 정부의 대북(對北)정책은 미국의 CVID원칙에 호흡을 함께 하면서 압박하는 것이 우선해야 할 뿐, '평화 유지'에 초점을 맞추어서는 안 된다.
대북송전(送電) 제의는 기술적·재정적·시기적으로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설익은 프로젝트라는 여론이 비등하고 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범국민적 합의'를 어떻게 결집시킬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국민의 여망을 살펴 실천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하는데도 그렇지가 않았다.
못 사는 동포를 가엽게 여겨 비료와 식량으로 북한을 돕는 일이 '인권 차원의 지원'이라면, 이른바 '한반도 평화비용'으로 전력(電力)과 같은 전략물자와 금강산 입산료(入山料) 명목 등의 금전적 지원은 핵이 지닌 힘에 대한 굴종이다.
'평화유지'와 '평화체제 구축'은 전적으로 다른 개념이다. 정부는 국민이 진정으로 희원하는 것이 돈주고 사는 '평화'이거나 핵 앞에 굴종하는 '평화유지'가 아니라, 힘의 뒷받침에 의해 구축되는 '평화의 틀'이고 '평화체제 구축'임을 알아야 한다. 만사 국민을 무리하게 납득시키려 한다면 국민의 불신을 자초할 것이다. 우리 군(軍)의 사기부터 올려놓을 일이다.(konas)
정 준 (코나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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