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북 30년, 내 젊음 전부를 창살없는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75년 오징어잡이 나섰다가 납북, 지난달 탈북귀환한 고명섭씨
Written by. konas
입력 : 2005-09-11 오전 10:10:44
30년전 강제로 납북됐다가 지난달 귀환한 고명섭(62) 씨가 9일 오전 국회에서 한나라당 김문수(金文洙) 의원이 주최한 '납북피해자 지원 특별법' 제정을 위한 공청회에 나와 악몽같았던 북한 생활 30년을 회고했다.
월남전 참전용사이기도 한 고명섭 씨는 1975년 오징어잡이 선박인 '천왕호'를 타고 동료 33명과 함께 강원도 주문진항을 출발해 대화퇴 어장에서 조업 중 무장한 인민군들의 위협속에 강제로 납북되었다.
고 씨는 이날 공청회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납북 이후 북한에서의 생활과 목숨을 건 탈출과정을 증언했다. 고 씨는 우리정부가 납북자를 '월북자'로 보고 남아있는 가족들에게 '죄인' 취급을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며 울먹였고, 납북자들의 귀환에 무관심 해 온 정부의 태도에 불만을 토로했다.
"잃어버린 30년! 내 젊음의 전부를 창살 없는 감옥에서 보내야 했던 기억을 모두 지워버리고 싶다"며 고 씨가 이날 울먹이며 읽어 내려간 자신의 회고담 전문을 아래에 소개한다.
<고명섭씨 발언 원고>
먼저 지난 30년을 회상하며 저의 탈북과 귀향이 납북자 및 가족 모두에게 작은 희망의 불씨가 되고 조국과 국민 모두의 관심이 모아지기를 간절히 소망하면서 저의 지난날을 간단히 소개하고자 합니다.
1. 납북경위
저가 탄 천왕호는 선원 33명을 태우고 오징어잡이를 위해 지난 75년 8월 2일 약 15일간의 일정으로 강원도 주문진항을 출발, 대화퇴 어장으로 떠났습니다.
대화퇴 어장에서 조업 중 귀항 예정 무렵인 75년 8월 15일 경 선박 기관이 고장나는 사고가 발생, 같은 선단과 무선 연락을 통해 사고 사실을 알리고 이틀 정도 표류하며기관을 수리하여 귀항 항로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귀항 중이던 8월 17일 새벽녘에 난데없이 북한 경비정이 다가와 정선 명령과 함께 공포탄을 쏘며 천왕호를 점거, 무장한 인민군의 위협 속에 피랍되었습니다.
무전까지 두절된 상황 속에서 손 쓸 틈도 없이 순식간에 당한 일이라 우리 모두는 ‘죽었구나’하는 공포 속에서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고 북한 경비정에 의해 문천항으로 강제 예인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문천항으로 끌려 온 우리는 간단한 수색을 받고 어느 작은 여인숙에 감금되어 약 일주일간의 조사를 받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인도적인 차원에서 귀국시켜 줄 것을 수차례호소하였으나 끝내 허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2. 북한에서의 생활
인민군에 의해 문천에서 약식 조사가 끝난 뒤 당으로 인도되어 원산에 있는 62연락소라는 곳으로 이송되었고 그 때부터 북한 사회에서의 적응을 위한 각종 학습과 정신교육, 현장견학 등의 맞춰진 일정에 의해 반복 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약 1년간의 교육기간이 지나자 당에 의해 미리 정해진 생활지로 비밀리에 배속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당시 남북적십자회담 등의 분위기로 보아 막연하나마 판문점을 통해귀환될 것이리라는 기대가 있었으나 회담의 결렬과 ‘당신들은 남한으로부터 버림받았기에 돌아가도 죽을 것이다.’ 라는 지도원의 말 속에서 귀향의 희망을 체념할 수밖에없었습니다.
우리 각자는 제각기 흩어져 생활지로 배속되었으며 저는 평남 성천군의 어느 닭목장(양계장)으로 배치되어 지금까지 줄곧 그곳에서 노동자로 생활하여 왔습니다.
이후 동료 선원들의 생사 및 생활상은 약 3~5년 마다 이루어지는 납북자에 대한 재교육 과정에서 구전으로 전해 듣는 정도였습니다.
당시 미혼이였던 저는 77년 이웃의 소개로 결혼을 하여 일가를 이뤘고 1남1녀의 자녀를 두게 되었습니다.
초기 생활은 기초 식생활면에서는 배급제의 실시로 그런대로 유지되었으나 80년대 중반부터 경제의 악화로 ‘고난행군’ 이라는 명분 하에 배급마져 끊기는 그야말로 기아와의 전쟁 그 자체였습니다.
식생활 해결을 위해 화전을 일구는가 하면 그것도 모자라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것조차 다행스러울 정도였으니 그 참상을 무슨 말로 다 설명할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살아 있으되 죽음보다도 못한 20여년의 세월이 덧없이 흘러 갔습니다.
3. 탈출! 그리운 고향에 돌아오기 까지
90년대 접어들면서 북한의 일반 서민 생활은 그야말로 목구멍에 풀칠조차도 힘든 최악의 상황으로 까지 치닫게 되었고 먹을 것을 찾아서라면 무슨 짓이든 다 해야만 하는 실정으로 내 몰리게 되었습니다.
이즈음 중국으로 탈출하면 잘사는 나라 대한민국으로 갈 수 있다는 소문이 무성했고 한국이나 중국에 연고가 있는 사람이라면 경제적인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사실이 주위에 하나 둘씩 현실로 다가설 때 어떻게 하던 저의 생존 소식을 고향의부모 형제에게 알려야겠다는 의지가 되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97년에 이웃에 사는 사람이 중국으로 자주 드나드는 것과 중국에서 한국에있는 가족을 만나 도움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 사람 편으로 저의 생존과 도움이 필요한 상황을 서신으로 부모 형제에게 전달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경제적인 도움은 받지 못하고 부모형제의 근황만 전해 듣게 되고 보니 그리움만 가중되고 마음의 병은 점점 더 깊어져 갔습니다.
이후 2002년도에 동생들이 보내서 왔다는 낯선 사람을 통해 중국에서 어머니를 만날 희망으로 탈출을 시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즈음 탈북자들의 문제로 인해 삼엄한 경비와 감시가 강화되었던지라 국경 근처에 다다랐을 때 성천에서부터 감시의 눈길이 미행하고 있음을 인지하고 탈출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 보위부에 직접적으로 탈출 의도가 노출되지 않았기에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있었으나 그때부터 보이지 않는 감시는 더욱 주위를 맴돌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보내기를 몇 해가 지나가고 저의 몸은 점점 더 쇠약해져 급기야 2004년 가을부터 병석에 몸져누워 지내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삶에 대한 포기의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던 차에 2005년 3월 21일 또 한명의 낯선 사람이 방문했을 때 부모형제의 도움만이 우리 가족이 살 수 있는 유일한 희망 이였기에 이번이 마지막 기회며 어떠한 위험이 있을지라도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절감하고 중국으로의 탈출을 시도하였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중국 땅을 밟게 되었고 3월 31일 심양에 있는 대한민국 영사관에 인도되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인간적인 갈등은 또 한번 시작되었습니다. 당초 탈출의 목적은 중국에서부모형제와 상봉을 하고 경제적인 도움을 받아 다시 북한으로 들어갈 의도였습니다.
물론 30년의 세월 동안 고향과 부모형제를 단 하루도 그리워하지 않은 적이 없으며어머니의 그늘에서 잃어버린 30년 세월을 뛰어 넘고 싶은 간절함이야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북녘에 저가 뿌린 씨앗이 봉우리로 남아 있기에 그들이 피지도 못할 꽃이 되리라는 번민이 밤새 괴롭혔습니다. 또 다른 이산의 이중적 고통을 그 누구라 알겠습니까?
한편, 북쪽에서의 저의 생활을 반추해 볼 때 당국의 허가 없이 움직일 수 있는 기한이열흘이고 보면 이미 그 시간이 훨씬 지났고 이젠 돌아가도 감시와 통제 그리고 냉혹한사회의 질타가 있을 것이 뻔할 터 죽은 목숨과 다를 바 없다는 냉정한 현실이 더욱 두려워 졌습니다. 그리고는 자식 잃은 어머니의 30년간 가슴에 한으로 쌓아 두었던 눈물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저는 결심할 수 있었습니다. “ 가자! 나의 고향으로 .... 내가 살아 있어야만 북녘의 내 처자식도 언젠가는 온전히 거둘 수 있으리라. 그 의지와 희망이 영글 수 있는 대한민국으로 돌아가자 ” 고 말입니다.
4. 마지막 소원
돌이켜보면 저의 인생은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라고 생각됩니다.
유년 시절엔 6.25의 참상을 겪었고 전쟁의 참화 속에서 넉넉지 못한 가정 형편으로인해 잘 먹지도 배우지도 못하며 자랐습니다.
그나마 청년 시절 조국의 이름으로 자유와 평화의 기치 아래 포화가 난무하는 월남전에 참전하였다는 자부심은 지금까지도 가슴 뿌듯한 기억으로 남아 있어 다행입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30년! 내 젊음의 전부를 창살 없는 감옥에서 보내야 했던 기억을 모두 지울 수만 있다면 저 푸른 바다 한 많은 동해의 대화퇴 어장에 던져 버리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 돌아온 저의 현실은 단순 북한 이탈 주민보다도 못한 처지임을 알았을 때 너무나 허탈한 심정입니다. 저는 탈북자가 아닙니다. 국가의 보호아래 생업을 보장받아 살아가야 했을 권리가 있고 국가가 부여하는 의무를 성실히 수행했던 대한민국 국민인 것입니다.
또한 단순한 이산가족도 아닙니다. 고향에 돌아와 보니 지난 2002년과 2004년에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하였다는 사실과 ‘확인불가’라는 통지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너무도 어처구니없었습니다.
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분단이라는 척박한 조국의 현실에 희생되어 버린 그 통한의30년을 어떤 말과 글로 다 설명할 수 있겠으며 어디에서, 그 누가, 어떤 형태로 보상해 줄 수 있겠습니까? 개인의 숙명적인 인생이라고 치부해 버리기에는 기막히고 억울하여 망연할 뿐입니다.
눈부신 경제성장과 더불어 이십일 세기 국민의 복지와 인권을 향해 도약하는 조국의현실적 희망에 의지하여 이제 저에게 남은 마지막 소원을 말하고자 합니다.
- 첫째, 북한에 생존해 있는 천왕호 선원 및 나아가 납북된 모든 국민의 귀환을 위해국가가 적극적으로 힘써 주시기 바랍니다.
- 저의 탈출이 정부의 도움이 아닌 ‘납북자 가족모임’과 형제들의 도움으로 이루어졌기에 더욱 안타까운 심정으로 국가가 내미는 자유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을 많은 납북자의 고통과 그리움을 생각하며 호소합니다.
- 둘째, 대한민국에서 건강한 사회인으로 살아 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십시요. 제자리로 돌아오기까지 너무나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혈기 넘치던 젊음을 잃어버리고 병든 노년이 되어서야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지금 온전히 새로 시작하기에는 남은 시간과 현실적 괴리가 너무 부족하고 크게 느껴집니다. 앞으로 남은 세월을 희망으로 살아 갈 수 있는 제도적인 도움이 절실합니다.
- 셋째, 납북자 가족에 대한 정부의 무한한 배려를 아끼지 말아 주십시요.
귀향하여 천왕호 가족들로부터 아버지를, 자식을, 혹은 남편과 형제를 가슴에 묻고살아오면서 냉전의 시대에는 죄인의 취급까지 받았다는 통한의 눈물을 보았을 때내가 죄인이며 고개조차 들 수 없는 부끄러움에 찢어지는 가슴을 안고 오열할 수밖 에 없었습니다.
납북자는 어떤 사상과 이념의 거창한 구호와는 상관없이 국가의 방치와 더불어 강 제로 억눌리고 인권을 짓밟힌 피해자일 뿐입니다. 더 이상 납북자와 가족들이 국가로부터 유기되는 일이 없도록 명예회복과 최선의 배려를 부탁드립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했듯이 어머니의 눈물과 형제의 뜨거운 피로 인해 30년이라는 세월을 에돌고 에돌아 이제야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늙은 노모의 아들로 제자리를 찾게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잠시, 북녘에 두고 온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생각하니 또 다른 절망감에 슬프기만 합니다. 나의 어머니와 형제가 그랬듯이 저 또한 혈육에 대한 애끓는 정이 있기에 그들을 온전히 거두고 싶은 소망 간절합니다.
이제 겨우 걸음마를 배우는 세 살배기 어린애로 찾아 온 저로서는 가족을 만나 행복한 삶을 꾸려가기에는 조급한 마음 뿐,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우리 국민 모두의 사랑과 관심만이 모든 납북자와 가족들의 아픔을 멈추게 하는 길이 라는 것을 눈물로 호소하며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 주시길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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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씨는 이날 공청회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납북 이후 북한에서의 생활과 목숨을 건 탈출과정을 증언했다. 고 씨는 우리정부가 납북자를 '월북자'로 보고 남아있는 가족들에게 '죄인' 취급을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며 울먹였고, 납북자들의 귀환에 무관심 해 온 정부의 태도에 불만을 토로했다.
"잃어버린 30년! 내 젊음의 전부를 창살 없는 감옥에서 보내야 했던 기억을 모두 지워버리고 싶다"며 고 씨가 이날 울먹이며 읽어 내려간 자신의 회고담 전문을 아래에 소개한다.
<고명섭씨 발언 원고>
먼저 지난 30년을 회상하며 저의 탈북과 귀향이 납북자 및 가족 모두에게 작은 희망의 불씨가 되고 조국과 국민 모두의 관심이 모아지기를 간절히 소망하면서 저의 지난날을 간단히 소개하고자 합니다.
1. 납북경위
저가 탄 천왕호는 선원 33명을 태우고 오징어잡이를 위해 지난 75년 8월 2일 약 15일간의 일정으로 강원도 주문진항을 출발, 대화퇴 어장으로 떠났습니다.
대화퇴 어장에서 조업 중 귀항 예정 무렵인 75년 8월 15일 경 선박 기관이 고장나는 사고가 발생, 같은 선단과 무선 연락을 통해 사고 사실을 알리고 이틀 정도 표류하며기관을 수리하여 귀항 항로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귀항 중이던 8월 17일 새벽녘에 난데없이 북한 경비정이 다가와 정선 명령과 함께 공포탄을 쏘며 천왕호를 점거, 무장한 인민군의 위협 속에 피랍되었습니다.
무전까지 두절된 상황 속에서 손 쓸 틈도 없이 순식간에 당한 일이라 우리 모두는 ‘죽었구나’하는 공포 속에서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고 북한 경비정에 의해 문천항으로 강제 예인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문천항으로 끌려 온 우리는 간단한 수색을 받고 어느 작은 여인숙에 감금되어 약 일주일간의 조사를 받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인도적인 차원에서 귀국시켜 줄 것을 수차례호소하였으나 끝내 허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2. 북한에서의 생활
인민군에 의해 문천에서 약식 조사가 끝난 뒤 당으로 인도되어 원산에 있는 62연락소라는 곳으로 이송되었고 그 때부터 북한 사회에서의 적응을 위한 각종 학습과 정신교육, 현장견학 등의 맞춰진 일정에 의해 반복 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약 1년간의 교육기간이 지나자 당에 의해 미리 정해진 생활지로 비밀리에 배속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당시 남북적십자회담 등의 분위기로 보아 막연하나마 판문점을 통해귀환될 것이리라는 기대가 있었으나 회담의 결렬과 ‘당신들은 남한으로부터 버림받았기에 돌아가도 죽을 것이다.’ 라는 지도원의 말 속에서 귀향의 희망을 체념할 수밖에없었습니다.
우리 각자는 제각기 흩어져 생활지로 배속되었으며 저는 평남 성천군의 어느 닭목장(양계장)으로 배치되어 지금까지 줄곧 그곳에서 노동자로 생활하여 왔습니다.
이후 동료 선원들의 생사 및 생활상은 약 3~5년 마다 이루어지는 납북자에 대한 재교육 과정에서 구전으로 전해 듣는 정도였습니다.
당시 미혼이였던 저는 77년 이웃의 소개로 결혼을 하여 일가를 이뤘고 1남1녀의 자녀를 두게 되었습니다.
초기 생활은 기초 식생활면에서는 배급제의 실시로 그런대로 유지되었으나 80년대 중반부터 경제의 악화로 ‘고난행군’ 이라는 명분 하에 배급마져 끊기는 그야말로 기아와의 전쟁 그 자체였습니다.
식생활 해결을 위해 화전을 일구는가 하면 그것도 모자라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것조차 다행스러울 정도였으니 그 참상을 무슨 말로 다 설명할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살아 있으되 죽음보다도 못한 20여년의 세월이 덧없이 흘러 갔습니다.
3. 탈출! 그리운 고향에 돌아오기 까지
90년대 접어들면서 북한의 일반 서민 생활은 그야말로 목구멍에 풀칠조차도 힘든 최악의 상황으로 까지 치닫게 되었고 먹을 것을 찾아서라면 무슨 짓이든 다 해야만 하는 실정으로 내 몰리게 되었습니다.
이즈음 중국으로 탈출하면 잘사는 나라 대한민국으로 갈 수 있다는 소문이 무성했고 한국이나 중국에 연고가 있는 사람이라면 경제적인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사실이 주위에 하나 둘씩 현실로 다가설 때 어떻게 하던 저의 생존 소식을 고향의부모 형제에게 알려야겠다는 의지가 되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97년에 이웃에 사는 사람이 중국으로 자주 드나드는 것과 중국에서 한국에있는 가족을 만나 도움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 사람 편으로 저의 생존과 도움이 필요한 상황을 서신으로 부모 형제에게 전달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경제적인 도움은 받지 못하고 부모형제의 근황만 전해 듣게 되고 보니 그리움만 가중되고 마음의 병은 점점 더 깊어져 갔습니다.
이후 2002년도에 동생들이 보내서 왔다는 낯선 사람을 통해 중국에서 어머니를 만날 희망으로 탈출을 시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즈음 탈북자들의 문제로 인해 삼엄한 경비와 감시가 강화되었던지라 국경 근처에 다다랐을 때 성천에서부터 감시의 눈길이 미행하고 있음을 인지하고 탈출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 보위부에 직접적으로 탈출 의도가 노출되지 않았기에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있었으나 그때부터 보이지 않는 감시는 더욱 주위를 맴돌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보내기를 몇 해가 지나가고 저의 몸은 점점 더 쇠약해져 급기야 2004년 가을부터 병석에 몸져누워 지내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삶에 대한 포기의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던 차에 2005년 3월 21일 또 한명의 낯선 사람이 방문했을 때 부모형제의 도움만이 우리 가족이 살 수 있는 유일한 희망 이였기에 이번이 마지막 기회며 어떠한 위험이 있을지라도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절감하고 중국으로의 탈출을 시도하였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중국 땅을 밟게 되었고 3월 31일 심양에 있는 대한민국 영사관에 인도되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인간적인 갈등은 또 한번 시작되었습니다. 당초 탈출의 목적은 중국에서부모형제와 상봉을 하고 경제적인 도움을 받아 다시 북한으로 들어갈 의도였습니다.
물론 30년의 세월 동안 고향과 부모형제를 단 하루도 그리워하지 않은 적이 없으며어머니의 그늘에서 잃어버린 30년 세월을 뛰어 넘고 싶은 간절함이야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북녘에 저가 뿌린 씨앗이 봉우리로 남아 있기에 그들이 피지도 못할 꽃이 되리라는 번민이 밤새 괴롭혔습니다. 또 다른 이산의 이중적 고통을 그 누구라 알겠습니까?
한편, 북쪽에서의 저의 생활을 반추해 볼 때 당국의 허가 없이 움직일 수 있는 기한이열흘이고 보면 이미 그 시간이 훨씬 지났고 이젠 돌아가도 감시와 통제 그리고 냉혹한사회의 질타가 있을 것이 뻔할 터 죽은 목숨과 다를 바 없다는 냉정한 현실이 더욱 두려워 졌습니다. 그리고는 자식 잃은 어머니의 30년간 가슴에 한으로 쌓아 두었던 눈물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저는 결심할 수 있었습니다. “ 가자! 나의 고향으로 .... 내가 살아 있어야만 북녘의 내 처자식도 언젠가는 온전히 거둘 수 있으리라. 그 의지와 희망이 영글 수 있는 대한민국으로 돌아가자 ” 고 말입니다.
4. 마지막 소원
돌이켜보면 저의 인생은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라고 생각됩니다.
유년 시절엔 6.25의 참상을 겪었고 전쟁의 참화 속에서 넉넉지 못한 가정 형편으로인해 잘 먹지도 배우지도 못하며 자랐습니다.
그나마 청년 시절 조국의 이름으로 자유와 평화의 기치 아래 포화가 난무하는 월남전에 참전하였다는 자부심은 지금까지도 가슴 뿌듯한 기억으로 남아 있어 다행입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30년! 내 젊음의 전부를 창살 없는 감옥에서 보내야 했던 기억을 모두 지울 수만 있다면 저 푸른 바다 한 많은 동해의 대화퇴 어장에 던져 버리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 돌아온 저의 현실은 단순 북한 이탈 주민보다도 못한 처지임을 알았을 때 너무나 허탈한 심정입니다. 저는 탈북자가 아닙니다. 국가의 보호아래 생업을 보장받아 살아가야 했을 권리가 있고 국가가 부여하는 의무를 성실히 수행했던 대한민국 국민인 것입니다.
또한 단순한 이산가족도 아닙니다. 고향에 돌아와 보니 지난 2002년과 2004년에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하였다는 사실과 ‘확인불가’라는 통지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너무도 어처구니없었습니다.
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분단이라는 척박한 조국의 현실에 희생되어 버린 그 통한의30년을 어떤 말과 글로 다 설명할 수 있겠으며 어디에서, 그 누가, 어떤 형태로 보상해 줄 수 있겠습니까? 개인의 숙명적인 인생이라고 치부해 버리기에는 기막히고 억울하여 망연할 뿐입니다.
눈부신 경제성장과 더불어 이십일 세기 국민의 복지와 인권을 향해 도약하는 조국의현실적 희망에 의지하여 이제 저에게 남은 마지막 소원을 말하고자 합니다.
- 첫째, 북한에 생존해 있는 천왕호 선원 및 나아가 납북된 모든 국민의 귀환을 위해국가가 적극적으로 힘써 주시기 바랍니다.
- 저의 탈출이 정부의 도움이 아닌 ‘납북자 가족모임’과 형제들의 도움으로 이루어졌기에 더욱 안타까운 심정으로 국가가 내미는 자유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을 많은 납북자의 고통과 그리움을 생각하며 호소합니다.
- 둘째, 대한민국에서 건강한 사회인으로 살아 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십시요. 제자리로 돌아오기까지 너무나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혈기 넘치던 젊음을 잃어버리고 병든 노년이 되어서야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지금 온전히 새로 시작하기에는 남은 시간과 현실적 괴리가 너무 부족하고 크게 느껴집니다. 앞으로 남은 세월을 희망으로 살아 갈 수 있는 제도적인 도움이 절실합니다.
- 셋째, 납북자 가족에 대한 정부의 무한한 배려를 아끼지 말아 주십시요.
귀향하여 천왕호 가족들로부터 아버지를, 자식을, 혹은 남편과 형제를 가슴에 묻고살아오면서 냉전의 시대에는 죄인의 취급까지 받았다는 통한의 눈물을 보았을 때내가 죄인이며 고개조차 들 수 없는 부끄러움에 찢어지는 가슴을 안고 오열할 수밖 에 없었습니다.
납북자는 어떤 사상과 이념의 거창한 구호와는 상관없이 국가의 방치와 더불어 강 제로 억눌리고 인권을 짓밟힌 피해자일 뿐입니다. 더 이상 납북자와 가족들이 국가로부터 유기되는 일이 없도록 명예회복과 최선의 배려를 부탁드립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했듯이 어머니의 눈물과 형제의 뜨거운 피로 인해 30년이라는 세월을 에돌고 에돌아 이제야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늙은 노모의 아들로 제자리를 찾게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잠시, 북녘에 두고 온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생각하니 또 다른 절망감에 슬프기만 합니다. 나의 어머니와 형제가 그랬듯이 저 또한 혈육에 대한 애끓는 정이 있기에 그들을 온전히 거두고 싶은 소망 간절합니다.
이제 겨우 걸음마를 배우는 세 살배기 어린애로 찾아 온 저로서는 가족을 만나 행복한 삶을 꾸려가기에는 조급한 마음 뿐,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우리 국민 모두의 사랑과 관심만이 모든 납북자와 가족들의 아픔을 멈추게 하는 길이 라는 것을 눈물로 호소하며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 주시길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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