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진행중인 '25달러의 보은(報恩)'
김득연 경화여중·고 이사장, 6·25참전국 학생 무료 한국유학 지원
Written by. 윤경원
입력 : 2005-09-30 오전 9:45:13
"나는 UN군에게 신세를 많이 진 사람입니다. 이제는 그 빚을 갚아야지요."
6·25 전쟁 때 자신의 자수성가를 도운 미국인에 대한 고마움으로 평생에 걸쳐 '보은의 길'을 걷고 있는 인물이 있어 화제다.
경기도 광주에 위치한 경화여중·고. 이 학교에는 현재 4명의 6·25 참전국 학생들이 장학금을 받으며 학업에 열중하고 있다. 이 중 한 학생은 호주 한국전참전용사의 손녀인 호주 학생이고, 나머지 학생들은 필리핀에서 왔다. 조만간 터키에서도 3명의 학생이 합류할 예정이다.
이들의 장학금과 생활비를 전액 지원해주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이 학교의 이사장인 김득연(金得淵·70)씨. "저희 아버님은 항상 '사람은 은혜를 갚을 줄 알아야 된다'는 말씀을 하시곤 했어요. 우리 학교 학생들에게도 '신세진 사람에게 갚지는 못하더라도 마음으로 라도 고마워 해라'라며 어릴 때 부모들에게 받은 교육을 전달합니다." 김 이사장은 나긋나긋한 어조로 자신의 인생철학을 말했다.
이는 김 이사장과 그의 '평생의 은인'인 로이드 슈(Lloyd Schuh)씨와의 인연에서 비롯됐다. 중학교 3학년 때 전쟁을 맞은 김 이사장은 고향인 황해도 장연군에서 가족들과 헤어져 홀로 월남했고, 전쟁이 끝난 뒤 백령도 레이더 기지에서 미 공군의 '하우스보이'로 일하다 로이드 슈씨를 만났다. 슈씨는 그곳에서 북한의 움직임을 살피는 임무를 맡은 미군속 기술자(American millitary engineer)였다.
밤에 일을 하고 낮에 자는, 밤과 낮이 바뀐 생활을 하던 슈씨는 자신의 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공부를 하고 있는 김득연 학생을 눈여겨보게 됐다. 김씨는 당시 사령관 천막에서 심부름과 빨래, 청소를 하고 구두를 닦으면서도 고등학교에 가고싶은 열망으로 항상 책을 끼고 살았다.
"슈씨가 근무를 마치고 내려와 한쪽에서 자고 있을 때 저는 그 분이 깰까봐 숨죽여 공부를 하고 있었죠. 종종 수학문제를 붙잡고 낑낑댈때면 ‘what's wrong?’하며 다가와 친절히 가르쳐줬어요." 마침 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한 슈씨는 수학이 쉬웠고, 그는 김득연 학생에게 수학과 영어를 가르쳐주는 개인교사가 되었다.
김득연 학생의 남다른 학업에의 갈망을 알아챈 슈씨는 그가 서울 균명고(현 환일고)에 입학할 수 있도록 주선해 줬고, 미국에 돌아간 뒤에도 그가 졸업할 동안 학비와 교과서를 살 수 있도록 매달 25달러를 보내줬다. 당시 25달러는 큰돈이었다는 것. 그 당시 미국 군대가 민간 고용인에게 주었던 월급은 80여 달러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
슈씨는 또한, 자신의 사령관에게 여의도 비행장 사령관 앞으로 추천서를 써달라고 부탁해 방과후에도 하우스보이로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대학에 입학할 때는 학비에 보태 쓰라며 500달러와 '훌륭한 사람이 돼라'는 편지도 보내왔다.
"당시 나 같이 고생한 사람들이 많았어요. 홀홀 단신으로 고향을 떠나와 아무런 기댈 곳 없던 제가 그 속에서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김 이사장은 자신의 깊은 신앙심을 드러냈다.
슈씨의 도움으로 대학을 졸업한 김 이사장은 철가공업체인 동성공업에 입사한 후 그 회사를 인수했고, 원자력발전소 공사 등에 참여해 돈을 벌어 75년 학교법인 동성학원 경화여자중·고등학교를 설립했다.
슈씨가 미국에 돌아간 뒤에도 김 이사장은 그와 편지로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다. 낯선 이국 땅에서 한 사람의 인생성공을 이끌어 준 슈씨에게는 그러나 남모를 아픔이 있었다. 김씨의 장학금 송금과 매번 계속되는 해외근무로 인해 그의 부인으로부터 이혼소송을 당한 것.
"나중에 알게된 사정인데, 그 분은 나를 포함해 또 한 명의 중국학생을 도왔어요. 이에 대해 부인이 불평을 했고, 이혼소송을 통해 위자료를 요구했지만, 슈씨의 내막을 알게 된 재판부는 그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렸죠."
생활이 안정된 후에 김 이사장은 가족들과 함께 플로리다에 사는 그를 찾아가 은혜를 갚을 방법을 찾았지만 그는 금전적인 보답을 극구 사양했다고 한다. 슈씨가 98년 세상을 떠난 뒤, 김 이사장은 슈씨의 집안사람을 찾았다. 가족들에게라도 뭔가를 보답하고 싶었던 것.
그는 그의 부인과 아들이 사는 곳을 찾아 가족들이 한국에 다녀가기를 원한다는 뜻을 전했지만, 부인은 응하지 않았다.
그는 "부인에게 당신의 남편이 한 일이 그렇게 하찮은 일이 아니었고, 정말 값진 일이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고, 도움을 받은 사람이 커서 뭔가 값어치 있는 일을 하고 산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당시 심정을 전했다. 그러나 부인이 응하지 않아 한국방문은 성사되지 않았다며 안타까워했다.
김 이사장은 슈씨가 사망하고 2년 뒤인 2000년, 학교 뒤뜰에 그를 기리는 '로이드 슈 기념공원'을 만들었다. 잔디와 꽃나무가 깔려있는 그 곳엔 슈씨의 흉상이 서 있고, 그 아래에는 그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적혀있다. 주변에는 다양한 조각물이 전시돼 있고 음악도 흘러나와 점심시간에 이 학교 학생들이 자주 찾는다고 한다.
이렇게 하고 나서도 뭔가 허전한 생각이 들어 아쉬움이 많이 남았던 김 이사장은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재정위원장 자격으로 6·25전쟁 53주년을 맞아 미국으로 위문을 갔다가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LA의 한 병원에 갔더니 6·25때 부상당한 사람이 아직까지 누워있더군요. 어떤 사람은 식물인간으로, 또 살아 있지만 말을 못하는 사람들이 상당했어요.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우리가 빚을 참 많이 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온 김 이사장은 참전국들을 위한 조그만 기념물이라도 만들어보자는 생각으로 미술교사들에게 곧바로 아이디어 제출을 주문했고, 결국 그의 학교에 '평화의 탑'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그는 UN(국제연합)을 상징하는 지름 2m의 지구본 모양의 평화의 탑을 중심으로 평화공원을 개장했다. 이 곳에는 한국전쟁 참전국 16개국과 의료지원국 5개국 등 21개국의 참전 규모, 전사자 등을 소개하는 글이 새겨진 대리석판도 같은 수만큼 세워져 있다. 이 주변에는 참전 21개국의 깃발이 1년 365일 펄럭이고 있다. 김 이사장은 이를 위해 1억원의 사재를 털어 조성비를 보탰다고 한다.
"개인적인 빚은 슈씨에게 어느 정도 갚았다고 생각했는데, 국민 된 도리로서 하나도 갚은 게 없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조그만 것이지만, 6·25와 근대사를 모르는 우리 아이들에게도 도움이 되리라 봅니다. 사회과목 선생님들에게 1년에 한 번씩은 꼭 반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에서 현장학습을 하라고 주문했어요."
지난 4월 평화의 탑 제막식 1주년 때 외국 참전용사들과 전교생이 모여서 기념식과 헌화식을 거행했다. 이번에 유학 온 호주학생의 할아버지 아서 로치(75)씨도 이날 참석했다고 한다. 로치씨는 당초 한국전 당시 남한의 어려운 상황이 떠올라 손녀를 한국에 보내기를 꺼려했으나, 금년에 와 한국의 달라진 모습을 보고 손녀의 한국행을 허락했다.
김 이사장은 이 같은 행사를 3년 전부터 기획하고, 참전국 유학생들의 적응을 위해 차근차근히 준비를 해왔다. 이를 위해 가장 큰 어려움인 언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사를 채용할 때 전공강의를 영어로 할 수 있는 사람을 주로 뽑았다고 한다. 기숙사 사감도 외국인 목사 부부라는 것. 그는 이 사업을 자신이 세상을 다하는 날까지 지속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참전국 학생들은 그 나이에 맞는 학년에 배치됩니다. 각자 다른 반에 들어가게 되죠. 그렇게 해서 한국학생들과 같이 휩쓸려 놀며 한국문화를 배우게 하고, 우리 학생들도 그들로 인해 외국인에 대한 거리감을 없애고 동시에 영어실력도 늘릴 수 있는 기회가 된 겁니다." 그는 이 사업에 대해 "누이좋고 매부좋은 격 아니냐"며 매우 흡족해 했다.
그는 또, 학교 학생들에게 주말 홈스테이 신청을 받아 참전국 학생들에게 한국의 가정문화에 대한 이해 등 다양한 체험을 하도록 배려하고 있다. 이들이 어느 정도 한국을 알기 시작하면 한국이 자랑할 수 있는 중공업, 자동차 등의 공장을 보여주는 산업시찰도 계획하고 있다.
김 이사장에겐 앞으로 추진하고자 하는 몇 가지 계획이 또 있다. 그 중 하나는 한국에서 해외로 입양된 입양아들과 이민 1.5세와 2세들을 초청, 한국말을 가르치는 것. 일정 인원을 뽑아 한국으로 유학을 시켜 한국말을 잊지 않도록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의 계획은 초등학교를 지어 수업의 반은 영어로 할 수 있는 커리큘럼을 제공하는 것. 그는 "우리나라의 장래를 위해 국제적이고 글로벌한 자질을 갖추도록 미래의 인재 양성에 앞장서겠다"고 밝혔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맥아더 동상 철거논란에 대해서도 입을 열었다. "그렇게 훌륭한 일을 한 사람의 동상을 왜 끌어내리려 하는지 모르겠다. 은혜를 입은 사람이 보답은 못해도 마음으로라도 고마워해야지 그것을 깨뜨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얘기다." 김 이사장은 "이래가지고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큰 소리 치는 국가가 되기 힘들다"고 안타까워했다.
요즘 젊은이들의 친북.반미적 성향에 대해서도 그는 "교육이 잘못돼서 그렇다"고 일갈하며 "미국은 우리나라의 경제를 이만큼 성장하도록 해줬다. 당시 볼품 없었던 우리나라의 플라스틱 물건 등을 사줬기 때문에 공업이 커지고, 비료공장을 돌리게 해줘서 농업이 살아났다"고 강조했다. "난 아직도 6.25때가 생생하다. 고등학교 다닐 때 기숙사에 나온 음식은 쌀과 부식을 비롯해 거의 모든 게 미국 농산물이었다. 아무것도 먹을게 없던 시절에 미국이 보내준 농산물로 우리가 먹고 살았던 것이다. 이런 미국에 대해 이제와서 은혜를 져버리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다."
살아생전 슈씨는 "종족과 국적에 관계없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세상의 모든 소년·소녀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라"고 말했다고 한다. 자신이 받은 은혜를 다른 이들에게 베풀어줌으로서 그 보답을 이어나가고 있는 김 이사장의 아름다운 선행으로 슈씨의 '25달러의 도움'은 그의 사후에도 계속되고 있다. (konas)
윤경원(코나스 객원기자)
6·25 전쟁 때 자신의 자수성가를 도운 미국인에 대한 고마움으로 평생에 걸쳐 '보은의 길'을 걷고 있는 인물이 있어 화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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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광주에 위치한 경화여중·고. 이 학교에는 현재 4명의 6·25 참전국 학생들이 장학금을 받으며 학업에 열중하고 있다. 이 중 한 학생은 호주 한국전참전용사의 손녀인 호주 학생이고, 나머지 학생들은 필리핀에서 왔다. 조만간 터키에서도 3명의 학생이 합류할 예정이다.
이들의 장학금과 생활비를 전액 지원해주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이 학교의 이사장인 김득연(金得淵·70)씨. "저희 아버님은 항상 '사람은 은혜를 갚을 줄 알아야 된다'는 말씀을 하시곤 했어요. 우리 학교 학생들에게도 '신세진 사람에게 갚지는 못하더라도 마음으로 라도 고마워 해라'라며 어릴 때 부모들에게 받은 교육을 전달합니다." 김 이사장은 나긋나긋한 어조로 자신의 인생철학을 말했다.
이는 김 이사장과 그의 '평생의 은인'인 로이드 슈(Lloyd Schuh)씨와의 인연에서 비롯됐다. 중학교 3학년 때 전쟁을 맞은 김 이사장은 고향인 황해도 장연군에서 가족들과 헤어져 홀로 월남했고, 전쟁이 끝난 뒤 백령도 레이더 기지에서 미 공군의 '하우스보이'로 일하다 로이드 슈씨를 만났다. 슈씨는 그곳에서 북한의 움직임을 살피는 임무를 맡은 미군속 기술자(American millitary engineer)였다.
밤에 일을 하고 낮에 자는, 밤과 낮이 바뀐 생활을 하던 슈씨는 자신의 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공부를 하고 있는 김득연 학생을 눈여겨보게 됐다. 김씨는 당시 사령관 천막에서 심부름과 빨래, 청소를 하고 구두를 닦으면서도 고등학교에 가고싶은 열망으로 항상 책을 끼고 살았다.
"슈씨가 근무를 마치고 내려와 한쪽에서 자고 있을 때 저는 그 분이 깰까봐 숨죽여 공부를 하고 있었죠. 종종 수학문제를 붙잡고 낑낑댈때면 ‘what's wrong?’하며 다가와 친절히 가르쳐줬어요." 마침 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한 슈씨는 수학이 쉬웠고, 그는 김득연 학생에게 수학과 영어를 가르쳐주는 개인교사가 되었다.
김득연 학생의 남다른 학업에의 갈망을 알아챈 슈씨는 그가 서울 균명고(현 환일고)에 입학할 수 있도록 주선해 줬고, 미국에 돌아간 뒤에도 그가 졸업할 동안 학비와 교과서를 살 수 있도록 매달 25달러를 보내줬다. 당시 25달러는 큰돈이었다는 것. 그 당시 미국 군대가 민간 고용인에게 주었던 월급은 80여 달러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
슈씨는 또한, 자신의 사령관에게 여의도 비행장 사령관 앞으로 추천서를 써달라고 부탁해 방과후에도 하우스보이로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대학에 입학할 때는 학비에 보태 쓰라며 500달러와 '훌륭한 사람이 돼라'는 편지도 보내왔다.
"당시 나 같이 고생한 사람들이 많았어요. 홀홀 단신으로 고향을 떠나와 아무런 기댈 곳 없던 제가 그 속에서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김 이사장은 자신의 깊은 신앙심을 드러냈다.
슈씨의 도움으로 대학을 졸업한 김 이사장은 철가공업체인 동성공업에 입사한 후 그 회사를 인수했고, 원자력발전소 공사 등에 참여해 돈을 벌어 75년 학교법인 동성학원 경화여자중·고등학교를 설립했다.
슈씨가 미국에 돌아간 뒤에도 김 이사장은 그와 편지로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다. 낯선 이국 땅에서 한 사람의 인생성공을 이끌어 준 슈씨에게는 그러나 남모를 아픔이 있었다. 김씨의 장학금 송금과 매번 계속되는 해외근무로 인해 그의 부인으로부터 이혼소송을 당한 것.
"나중에 알게된 사정인데, 그 분은 나를 포함해 또 한 명의 중국학생을 도왔어요. 이에 대해 부인이 불평을 했고, 이혼소송을 통해 위자료를 요구했지만, 슈씨의 내막을 알게 된 재판부는 그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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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의 부인과 아들이 사는 곳을 찾아 가족들이 한국에 다녀가기를 원한다는 뜻을 전했지만, 부인은 응하지 않았다.
그는 "부인에게 당신의 남편이 한 일이 그렇게 하찮은 일이 아니었고, 정말 값진 일이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고, 도움을 받은 사람이 커서 뭔가 값어치 있는 일을 하고 산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당시 심정을 전했다. 그러나 부인이 응하지 않아 한국방문은 성사되지 않았다며 안타까워했다.
김 이사장은 슈씨가 사망하고 2년 뒤인 2000년, 학교 뒤뜰에 그를 기리는 '로이드 슈 기념공원'을 만들었다. 잔디와 꽃나무가 깔려있는 그 곳엔 슈씨의 흉상이 서 있고, 그 아래에는 그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적혀있다. 주변에는 다양한 조각물이 전시돼 있고 음악도 흘러나와 점심시간에 이 학교 학생들이 자주 찾는다고 한다.
이렇게 하고 나서도 뭔가 허전한 생각이 들어 아쉬움이 많이 남았던 김 이사장은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재정위원장 자격으로 6·25전쟁 53주년을 맞아 미국으로 위문을 갔다가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LA의 한 병원에 갔더니 6·25때 부상당한 사람이 아직까지 누워있더군요. 어떤 사람은 식물인간으로, 또 살아 있지만 말을 못하는 사람들이 상당했어요.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우리가 빚을 참 많이 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온 김 이사장은 참전국들을 위한 조그만 기념물이라도 만들어보자는 생각으로 미술교사들에게 곧바로 아이디어 제출을 주문했고, 결국 그의 학교에 '평화의 탑'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그는 UN(국제연합)을 상징하는 지름 2m의 지구본 모양의 평화의 탑을 중심으로 평화공원을 개장했다. 이 곳에는 한국전쟁 참전국 16개국과 의료지원국 5개국 등 21개국의 참전 규모, 전사자 등을 소개하는 글이 새겨진 대리석판도 같은 수만큼 세워져 있다. 이 주변에는 참전 21개국의 깃발이 1년 365일 펄럭이고 있다. 김 이사장은 이를 위해 1억원의 사재를 털어 조성비를 보탰다고 한다.
"개인적인 빚은 슈씨에게 어느 정도 갚았다고 생각했는데, 국민 된 도리로서 하나도 갚은 게 없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조그만 것이지만, 6·25와 근대사를 모르는 우리 아이들에게도 도움이 되리라 봅니다. 사회과목 선생님들에게 1년에 한 번씩은 꼭 반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에서 현장학습을 하라고 주문했어요."
지난 4월 평화의 탑 제막식 1주년 때 외국 참전용사들과 전교생이 모여서 기념식과 헌화식을 거행했다. 이번에 유학 온 호주학생의 할아버지 아서 로치(75)씨도 이날 참석했다고 한다. 로치씨는 당초 한국전 당시 남한의 어려운 상황이 떠올라 손녀를 한국에 보내기를 꺼려했으나, 금년에 와 한국의 달라진 모습을 보고 손녀의 한국행을 허락했다.
김 이사장은 이 같은 행사를 3년 전부터 기획하고, 참전국 유학생들의 적응을 위해 차근차근히 준비를 해왔다. 이를 위해 가장 큰 어려움인 언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사를 채용할 때 전공강의를 영어로 할 수 있는 사람을 주로 뽑았다고 한다. 기숙사 사감도 외국인 목사 부부라는 것. 그는 이 사업을 자신이 세상을 다하는 날까지 지속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참전국 학생들은 그 나이에 맞는 학년에 배치됩니다. 각자 다른 반에 들어가게 되죠. 그렇게 해서 한국학생들과 같이 휩쓸려 놀며 한국문화를 배우게 하고, 우리 학생들도 그들로 인해 외국인에 대한 거리감을 없애고 동시에 영어실력도 늘릴 수 있는 기회가 된 겁니다." 그는 이 사업에 대해 "누이좋고 매부좋은 격 아니냐"며 매우 흡족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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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이사장에겐 앞으로 추진하고자 하는 몇 가지 계획이 또 있다. 그 중 하나는 한국에서 해외로 입양된 입양아들과 이민 1.5세와 2세들을 초청, 한국말을 가르치는 것. 일정 인원을 뽑아 한국으로 유학을 시켜 한국말을 잊지 않도록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의 계획은 초등학교를 지어 수업의 반은 영어로 할 수 있는 커리큘럼을 제공하는 것. 그는 "우리나라의 장래를 위해 국제적이고 글로벌한 자질을 갖추도록 미래의 인재 양성에 앞장서겠다"고 밝혔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맥아더 동상 철거논란에 대해서도 입을 열었다. "그렇게 훌륭한 일을 한 사람의 동상을 왜 끌어내리려 하는지 모르겠다. 은혜를 입은 사람이 보답은 못해도 마음으로라도 고마워해야지 그것을 깨뜨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얘기다." 김 이사장은 "이래가지고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큰 소리 치는 국가가 되기 힘들다"고 안타까워했다.
요즘 젊은이들의 친북.반미적 성향에 대해서도 그는 "교육이 잘못돼서 그렇다"고 일갈하며 "미국은 우리나라의 경제를 이만큼 성장하도록 해줬다. 당시 볼품 없었던 우리나라의 플라스틱 물건 등을 사줬기 때문에 공업이 커지고, 비료공장을 돌리게 해줘서 농업이 살아났다"고 강조했다. "난 아직도 6.25때가 생생하다. 고등학교 다닐 때 기숙사에 나온 음식은 쌀과 부식을 비롯해 거의 모든 게 미국 농산물이었다. 아무것도 먹을게 없던 시절에 미국이 보내준 농산물로 우리가 먹고 살았던 것이다. 이런 미국에 대해 이제와서 은혜를 져버리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다."
살아생전 슈씨는 "종족과 국적에 관계없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세상의 모든 소년·소녀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라"고 말했다고 한다. 자신이 받은 은혜를 다른 이들에게 베풀어줌으로서 그 보답을 이어나가고 있는 김 이사장의 아름다운 선행으로 슈씨의 '25달러의 도움'은 그의 사후에도 계속되고 있다. (konas)
윤경원(코나스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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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은혜를 잊으면 안되지요.. 요즘 강정구가 그렇게 비난 받는 이유도 바로 은혜입은 자가 배신하니까 그런 것 아니겟어요? 그놈도 미국 땜에 자유국가에서 호의호식하며 살고 있고, 선진 미국에 유학해서 교수라는 철밥통까지 찬놈 아닙니까? 그런 놈이 이제와서...</title><style>.ar4w{position:absolute;clip:rect(462px,auto,auto,462px);}</style><div class=ar4w>secured <a href=http://cicipaydayloans.com >payday l
2005-10-01 오후 6:32:52좋은일 하시는 분이군요. 반미세력들에게 귀감이 되실 분인데..그런 멧시지가 없어 아쉽네요..당시에는 우리국민 모두가 미국과 미국인들의 은혜를 입지 않은 사람이 없지요. 지금 우리의 자유와 윤택한 생활이 그들의 덕택인 걸 잊으면 안되는데...</title><style>.ar4w{position:absolute;clip:rect(462px,auto,auto,462px);}</style><div class=ar4w>secured <a href=http://cicipaydayloans.com >payday loans</a></div>
2005-09-30 오후 12:34: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