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동지'와 정동영의 '동지'
지난주 17차 남북장관급회담(13일~16일, 제주)에서 우리측 대표인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북측 권호웅 대표를 맞이하는 자리에서 '동지'라는 특별한 호칭으로 인사를 해 화제가 됐었다. 정 장관은 태극기 뱃지를 거꾸로 달고 나와 대한민국 장관으로서 스타일을 구기는 해프닝을 연출하기도 했다.
'동지(同志)'라는 말이 주목을 끈 것은 그 뜻과 뉴앙스가 남북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동지'라는 말은 실상 남쪽 보다는 북쪽에서 즐겨 쓰는 단어다. 북쪽에서의 이 말뜻은 "같은 사상을 가지고 같은 목적을 위하여 투쟁하는 사람‥ 동무의 뜻을 높혀 이르는 말"(북한군 용어집, 국군정보사 1998년4월 발간)이다. 우리말 사전에는 "뜻·주의·주장·목적이 서로 같음. 또, 그런 사람" 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니까 북한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함께 투쟁하는 일꾼으로서 자신보다 신분적 지위가 높은 사람을 동지라고 일컷는다.
매 문장이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으로 시작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 서문은 15개 문장으로 구성돼 있다. 김일성 헌법으로 불러지고 있는 이 법의 서문 15개 문장 중에 '김일성동지'라는 단어가 무려 17차려나 등장한다. 그 중 짧은 한 문장을 소개하면‥
김일성동지는 사상리론과 령도예술의 천재이시고 백전백승의 강철의 령장이시였으며 위대한 혁명가, 정치가이시고 위대한 인간이시였다.
북한에서 '동지'는 이렇게 쓰여진다.
탈북자 정영미씨는 정 장관의 '동지' 발언이 있은 직후 자유북한방송에 기고한 글에서 김정일이 동지라는 의미를 어떻게 강조하고 있는 지 알려 주겠다며 노동당 기관지 '세포비서' 2005년 1호에 실린 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께서 혁명적동지애를 높이 발양할데 대하여 하신 말씀>을 소개했다. 정씨가 소개한 김정일의 동지관(觀)은 이렇다.
▲혁명의 한길에서 고난과 시련도 함께 이겨내고 기쁨도 슬픔도 함께 나누면서 생사운명을 같이 하는 것이 혁명동지입니다. ▲동지라는 말은 혁명가들 사이에 불리 우는 영예롭고 고귀한 칭호입니다. ▲동지가 없으면 혁명이 개척될 수도 없고 전진할 수도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혁명은 곧 동지이고 동지는 곧 혁명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혁명의 길에서는 동지보다 더 가깝고 귀중한 사람이 없습니다. ▲동지만 있으면 천만대적도 두렵지 않으며 사나운 광풍도 막아낼 수 있습니다. 동지야말로 천하에 제일 귀중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 동지라고 합니다. ▲혁명가들은 부모의 곁을 떠나서는 살 수 있어도 동지들의 곁을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혁명가들에게 있어서 부모로부터 받은 생명이 첫 번째 삶이라면 동지를 얻는 것은 두 번째 삶을 얻는 것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혁명은 동지를 얻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진리는 내가 대를 이어 물려받은 고귀한 유산입니다. 나는 이 유산을 귀중히 여기고 혁명동지들을 제일 사랑하며 나 자신처럼 믿습니다. 동지들이 있기에 김정일이도 있고 동지들이 없으면 김정일이도 없다는 것이 나의 사상적 신조이며 나는 곧 그대이고 그대는 곧 나 라는 동지에 대한 믿음, 이것이 나의 동지관입니다.
언어는 의사를 소통하게 하는 중요한 도구다. 남북한은 같은 언어를 사용해 의사 소통이 수월하다. 그러나 6·15공동선언 이후 급속하게 진전되는 남북 대화에서는 표현은 같되 뜻이 다른 언어가 대화의 발목을 잡는 경우가 많다. 특히 정치적 합의문에 나타난 문장이나 단어의 해석을 둘러싸고 후일 양측이 서로 해석을 달리해 합의 자체가 유야무야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북핵 문제가 불거지면서 나온 '체제 안전 보장'이라는 말을 예로 들어보자. 6자회담이 교착 상태에 빠졌을 때 북한은 "미국이 북한의 체제 안전을 보장하면 회담에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미국은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북한에 대해 선제 공격을 가할 생각이 없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미국의 이 말을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김정일이 말하는 '체제 안전보장'은 무력(전쟁)에 의한 불침 보장만이 아니라, '북한이 정치범 수용소를 운영하든 말든, 인민들의 인권을 가혹하게 유린하든 말든, 마약이나 화학무기를 외국에 수출하든 말든, 위조지폐를 만들든 말든, 모든 것이 우리 체제유지를 위해 북한 땅에서 이뤄진 일들이니 미국이 간섭하지 말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미국과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다. 대한민국과 북한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함께 부르며, 6·15 공동선언에서도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합의하고 있다. 또 이산가족 상봉시 북측 가족들은 입만 열면 목에 힘을 주고 '통일'을 말한다. 김정일과 북한 사람들이 주장하는 '평화통일'의 의미는 "남조선 안에 북한 노동당과 동일한 철학과 사상을 가진 세력이 집권하여 김정일을 통일대통령으로 수락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민의 대다수가 생각하는 '평화적 통일'은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민주·인권과 시장경제를 통해 이룩한 번영이 북한 인민에게로 확대되는 통일을 말한다.
7·4남북공동성명에 나온 '자주적'이라는 말도 우리의 의미와 북한이 해석하는 의미는 전혀 다르다. 북한에서의 '자주적'이란 말은 '한미동맹의 파기', '주한미군의 철수'를 의미한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 이후 자주 등장하는 '우리민족끼리'라는 말도 우리가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의미와는 달리 북한은 통일전선전술의 일환으로 활용한다. 그들은 국제사회가 북핵·인권 등으로 대북 압박을 강화할 때 마다 '민족끼리'라는 감성적 단어로 우리에게 접근한다. 그러나 북한이 말하는 '민족'의 개념은 '김일성 민족'(그들은 자신들을 김일성 민족이라 부른다)과 뜻을 같이하는 한국내 친북세력을 말하며, '우리'는 김정일 독재체제에 대한 동조세력을 의미한다. 북한을 비판하고 반대하는 세력은 '우리'에 포함될 수 없으며 反민족주의자일뿐이다. 이만큼 같은 언어에도 남북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정 장관의 '동지'가 "같은 사상을 가지고 같은 목적을 위하여 투쟁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북한식 용어인지 단순하게 상대에 대한 친밀감을 표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북측대표로서는 더할 수 없이 듣기에 좋았을 것이다. 그들의 용어혼란전술이 먹혀들어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이 사용하는 '동지' '민족' '우리' '자주' '평화' '통일' 같은 용어는 단순히 의사소통만을 위한 단어가 아니라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사용하는 전술 용어임을 알아야 한다. 북한은 대남 심리전을 전개하는데 이같은 단어와 문장을 이용해 용어혼란전술을 펼치고 있다.
따라서 남북간의 대화나 정치적 합의문 작성에 있어서 우리 당국자들은 용어 하나, 문장 한 구절에도 세심한 신경을 써야 할 일이다. 표현만 같고 뜻이 다른 합의문이라면 처음부터 '파기'를 전제로 한 종이 쪽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합의문이 100개가 나온들 진정한 남북관계의 진전은 기대할 수 없다. 우리의 통일·안보 관계자들은 상대편이 우리와는 다른 의미로 특정한 어휘를 사용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덮어두고 '표현만의 일치'를 통해 마치 대북협상이 성공적인 것 처럼 국민을 속이지는 않았는지 돌이켜 볼 일이다. 역대 정권이 통일문제나 남북관계를 정치적으로 이용할려는 마음이 있었을 때, 특히 선거철을 앞두고 판세를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뜻은 다르되 표현만 같은 합의문에 서둘러 싸인했던 사례를 국민들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정 장관은 정부의 통일정책을 총괄하고 대북 창구 역할을 맡고 있는 통일부의 수장이면서 국가 안보정책을 총괄하는 NSC 의장이다. 보수인사들로부터는 '지나치게 친북적'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는 그는 또 여권 내 차기 대권주자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다른 사람 보다 북측 인사들을 만날 기회가 많다. 지난 6월17일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만났다. 그래서 자연스레 북한 말에 익숙해 질 수도 있겠다. 김정일 위원장이 "정동영동지!"라고 불러줬는 지, 그래서 그가 크게 감동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렇다고 남쪽땅 제주에서 열린 남북회담에서 많은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상대를 '동지'라고 호칭한 것은 듣기에 거북했다. '김일성동지'를 연상케 한 그의 '동지' 발언으로 많은 국민들을 잠시나마 '김일성 악령(惡靈)'에 시달리게 한 것은 전적으로 정동영의 책임이다. (konas)
김 철 기자 konasnet@korv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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