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교조를 고발한다⑪
전교조의 원죄, 여주상고사태
2002년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는 전교조 해직 교사들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했습니다. 이에 교단은 즉각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전교조 해직 교사들이 민주화운동 관련자라면 묵묵히 교단을 지킨 다른 교사들은 방관자들이라는 말이냐는 볼 멘 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동시에 전교조 해직교사들이 민주화운동으로 해직되었던 것이 아니라 불법과 폭력 등으로 해직된 것인데, 이를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한다면 법치주의는 어찌 되는 것이냐는 비난도 쏟아졌습니다.
특히 전교조의 폭력과 불법시위 등으로 홍역을 치른 당사자들은 우리 사회에 대해 좌절감을 느낀다며 이민이라도 가고 싶다고 토로하며 울분을 안으로 삼켜야 했습니다. 오죽하면 그런 자조적인 소리까지 나왔겠습니까?
무법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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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조의 K 선생님! 여주상고 사태는 전교조 결성 한 해 전인 88년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학교법인 수산학원이 경영하는 여주동중과 여주상고는 88년 10월12일 평교사협의회(평교협) 결성으로 소요사태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평교협은 법인 측에 평교협 인정과 박 모 교사의 복직 등을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재단(법인) 측은 이를 일축했습니다. 평교협 자체가 실정법에 어긋나는 불법단체인데다가 박 모 교사는 해직교사가 아니라 의원면직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박 교사는 이 학교 설립자가 덕성여대 교수 재임 시 가르친 제자로, 단순히 제자란 이유로 임용되어 근무하다 85년 의원사임했음에도 해직교사들이 복직되는 시류에 편승하여 해직교사임을 자처하고 나섰습니다. 그는 해직교사단체와 연계하고 학내 평교사와 연대하여 복직을 주장하고 평교협 결성 때는 교사도 아니면서 학교 여학생기숙사에 은거하며 평교협 결성을 주도했습니다.
평교협은 법인이 평교협을 불법단체로 규정하고 그 해체를 요구하자 재단의 퇴진을 요구하고 온갖 유언비어, 허위사실 등을 유포, 학생소요를 일으켰습니다. 이에 재단은 학생들이 요구하는 정당한 사항은 즉시 수렴하여 학내소요는 진정되는 듯 했습니다. 그러자 평교협 교사들은 새로운 사항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고, 그것이 해결되면 또 다른 것을 요구하며 트집을 잡았습니다. 재단 측으로서는 재단 퇴진과 평교협의 인정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습니다. 때문에 강경한 입장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평교협은 재단의 친인척 교사의 퇴진을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이 학교에는 교직원 77명중 재단의 친인척이라고는 15년 전에 부임하여 근무중인 상업교사 차 모 교사 단 한사람뿐이었습니다. 당시 여주상고는 재단 친인척 교직원이 없기로 소문난 곳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교협은 친인척 교원의 퇴진을 주장했습니다. 그런 요구나 주장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지는 지금 전교조 선생님들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평교협이 엉뚱하게도 재단 친인척 교사의 퇴진을 주장한 것은 마치 사학이 친인척을 많이 채용하고 있는 것처럼 선전함으로써 사학을 비리집단으로 오인케 하고 그에 따라 평교협의 요구가 정당한 것인 듯 보이게 하려는 저의에서 비롯된 게 아니냐는 게 당시 사학 관계자들의 분석이었습니다.
이런 일은 요즘도 발생합니다. 전교조가 멀쩡한 학교에 의혹을 제기하며 예결산 공개를 요구하고 나서면 주위에서는 마치 무슨 큰 비리라도 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생각하게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재단 측이 전교조의 요구를 수용하여 예결산을 공개하기도 곤란합니다. 재단이 교사들에게 예결산을 공개(사실상 보고)할 의무가 없기 때문입니다.
재단 측으로서는 만일 전교조의 요구를 받아들이면 그 이후 또 어떤 요구를 해 올지 몰라 전교조의 요구를 거부하게 마련입니다. 때문에 재단 측이 전교조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전교조는 기세를 올리며 더욱 압박을 가합니다. 이렇게 되면 학생들은 재단이 뭔가 떳떳치 못해 예결산 공개를 꺼리는 게 아닌가 생각하기 십상이지요. 하지만 재단측이 예결산 내역을 공개하지 않는다 해서 무슨 비리가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전교조가 국회의원을 통하거나 교육위원들을 통해서 재단의 회계자료를 확보하고 전문가들을 동원하여 이를 분석했지만 헛수고로 끝난 사례도 있습니다.
투쟁을 위한 투쟁
여주상고 평교협은 도서관, 기숙사 증축 등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재단 측은 거액의 예산이 소요되는 사안인 만큼 시간이 필요하다고 설득했지만 평교협은 당장 지어놓으라며 윽박질렀습니다. 이런 식이니 소요가 그칠 리 없었지요.
법인 측은 사안 별로 타당성이 있다 싶은 것은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합의가 이루어지면 그것으로 사태가 진정되어야 했건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평교협은 또 다른 요구사항을 들고 나왔던 것입니다. 평교협의 의도는 보다 나은 학교를 만들자는 데 있었던 게 아니라 여하히 소요를 이어가느냐에 있었다고 보아 무리가 아닐 것입니다.
평교협은 자의적으로 정관(안)을 마련하여 그걸 승인하라고 압박을 가해 왔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요즘 전교조가 주장하거나 요구하는 내용 그대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교무회의를 명실상부한 의결기구로 만들어야 한다든지 교장, 교감을 교무회의서 선출하고 인사위원회와 징계위원회도 교무회의의 선출로 구성, 교무회의가 교사의 임명과 해임 등 인사권을 행사하겠다는 게 그것입니다.
이들은 학교의 예·결산까지도 평교협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인사와 재정 등 학교운영에 관한 전권을 자신들이 갖겠다는 얘기입니다. 요즘 전교조가 사립학교법을 이런 식으로 개정해야 한다며 억지를 쓰고 있는데 이 경우 학교법인 이사회는 존재이유가 없습니다. 이런 식이라면 누가 사재를 털어 학교를 세우려 하겠습니까? 평교협은 심지어 법인의 이사회와 육성회, 어머니회까지 평교협의 지휘, 감독을 받도록 정관에 명시하고 그 승인을 요구하며 생떼를 쓰기도 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여주상고 전교조는 전교조의 입장에서 보면 선구자들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요구의 내용도 그렇거니와 막무가내로 생떼를 쓰는 등의 행태도 그렇습니다. 한 평교협 교사는 학교장이 평교협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자 교무실에서 “학교장도 똥물에 튀길 놈이다”라고 소리치는 등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해대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람을 교육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더욱 기가 막히는 것은 그가 국민윤리 담당 교사였다는 사실입니다.
평교협의 김 모 교사는 수업시간에 팝송을 틀어주는가 하면 수업중 학생이 떠든다는 이유로 “너희들은 다방레지나 창녀와 다를 것이 없다. 부산엔 일본사람 첩들이 많다. 너희들도 그런 여자처럼 살 수 있다”등의 험한 말을 서슴없이 내뱉기도 했습니다.
패륜과 만행
전교조의 K 선생님! 해가 바뀌어 89년이 되었지만 여주상고는 여전히 소요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사태는 악화되어 갔습니다. 학교측은 성행이 불량한 한 평교협 교사를 징계위에 회부했습니다. 평교협은 이에 반발했습니다. 그런데 평교협측의 항변이 듣는 이의 귀를 의심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성행불량행위는 사생활이며 요새 안 그런 여자가 어디 있느냐”는 것이었으니까요. 평교협 교사들은 평교협 경기지부 간부들을 앞세워 법인 사무실을 점거, 징계를 위한 조사와 진술을 방해하며 난동을 부렸습니다.
이제 여주상고는 더 이상 교육의 장이라고 보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에 학원소요로 신경이 쇠약해진 이 학교 윤 모 교장이 89년 2월, 그러니까 새 학기를 앞두고 사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정년퇴직에 이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그가 오죽하면 스스로 사직하고 30년을 몸담아 온 교단을 떠났겠습니까. 그는 사직하며 “평교협이 있는 한 교육은 불가능하다”고 토로했습니다.
3월 새학기를 맞아 후임 서 모 교장이 취임했습니다. 평교협은 그들이 직선한 교장이 아니라는 이유로 취임식에 불참했는가 하면 학교장의 모든 지시를 거부하고 그들이 학급담임을 모두 맡는다고 철야농성을 벌였습니다. 이런 독불장군이 또 어디 있습니까? 이들이 모두 담임을 맡겠다며 아우성을 친 것은 담임을 맡아야 학생 동원이 용이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다른 학교에서도 분규 시 전교조 교사들이 담임을 맡은 반 학생들이 비전교고 교사가 맡은 반 학생들보다 훨씬 많이 시위에 참가하는 경향을 보였지요.
평교협은 밤마다 음악실에 모여 대책회의를 열고 손뼉치고 노래부르며 밤을 지새웠습니다. 이들에게 수업은 관심 밖이었으며, 이들에게는 분규상태를 지속적으로 끌고가는 것만이 관심사가 아닌가 생각될 정도였습니다.
평교협의 송 모 여교사는 여학생이 결석하였다는 이유를 들어 수업시간에 학생들 앞에서 “술집접대부나 되라”며 구타하여 전치 3주의 고막천공상해를 입히고도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항의하는 부모에게 “마음대로 하라” “애가 전치 3주의 상해를 입었건 말건 내 알 바 아니다”라고 말해 분노를 샀습니다. 그는 또 평교협에서 탈퇴한 최 모, 탁 모 등 남자교사에게 학생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웃옷을 벗어제치고 주먹질을 하며 “최XX 개새끼, 탁XX 개새끼의 부모가 불쌍하다”고 외치며 학생들에게 따라 하도록 했습니다.
팀 스피리트 훈련이 한창이던 89년 봄 교장이 팀스피리트 훈련에 협조를 요청하자 그는 “양키 고 홈!”을 외치며 난동을 부렸습니다. 평교협 교사들은 “미국놈들은 무식하고 잔인한 놈들이며, 여자만 보면 유부녀라도 닥치는대로 겁탈하는 놈들이라 협조할 수 없다” “전에도 이천에서 여학생을 미국 수명이 잔인하게 겁탈했다”는 등 유언비어를 날조하여 학생들을 선동했습니다.
뿐아니라 “미국놈들은 우리의 밀농사, 보리농사, 다 빼앗아 가고 쌀농사마저 빼앗아 우리를 굶어 죽게 하려고 한다” “북한은 소련을 통해 핵을 보유할 수도 있으나 같은 동포를 살생하지 않기 위해 핵을 보유하지 않는다. 미국놈들은 전쟁을 일으켜 우리 민족과 국토를 황폐화시키려고 한다”는 등 학생들에게 반미의식을 심어주는 데 혈안이 되었습니다.
이게 도대체 북한사회도 아니고 대한민국의 고등학교에서 어떻게 이런 터무니없는 악선전이 있을 수 있는지 기가 막힙니다. 이를 보면 미국의 이라크전(戰) 당시 ‘반전’을 내세워 사실상 ‘반미’교육을 하여 물의를 일으킨 것은 전교조의 뿌리깊은 반미의식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평교협은 이런 식으로 학생들을 선동한 데 이어 학생들을 이끌고 학교 안팎을 돌아다니며 차고를 완전히 부숴버리고 수위실, 강당피아노, 교무실, 집기를 파손하는 난동을 부리게 했습니다. 학생들은 심지어 학교장의 승용차 타이어에 못질까지 해댔습니다.
평교협 교사들은 이를 유유히 바라보며 학생의 잘못이 아니라고 비호하는가 하면 오히려 부추겼습니다. 그리고 이는 극렬한 소요사태로 치닫는 전초전이었지요.
평교협의 정 모 여교사는 식칼을 들고 잠긴 교장실 문을 따고 들어가 교장 책상을 뜯고 물품을 뒤지다 때마침 출장나와 있던 교육위 장학관에 들켜 쫓겨나가기도 했습니다. 그는 오 모, 김 모 등 동료 여교사 두 명을 의식화시키기도 했는데, 그 수법이 참으로 교활합니다. 같은 여교사끼리 격의 없이 얘기를 주고받으며 이성간의 깊은 사연을 유도하여 과거의 행적을 캐내 약점을 이용하여 평교협으로 끌어들였던 것입니다. 그는 또 평교협을 결성할 때 교장을 찾아가 “교장선생님 영웅 만들어 줄려고 한다”며 평교협에 가입할 것을 수차에 걸쳐 권유하기도 했습니다.
학생들을 선동하여 소요를 일으키는 과정도 기가 찹니다. 당시 여주상고에는 전국의 어느 사학에도 볼 수 없는 많은 장학혜택이 있었습니다. 평교협은 장학금이 동결되었다는 새빨간 거짓말을 유포시켜 학생들이 그 해명을 요구하며 운동장에 집결케 했습니다. 그리고는 재단을 성토하는 시위로 확산시켜 나아갔지요.
평교협 회장 김 모 교사는 단상에 올라가 “학생데모에 동참하겠다”고 성명서를 낭독하고 “재단퇴진”을 외치며 학생들을 선동했습니다. 뿐 아니라 설립자를 화형식하고 이틀 뒤 삼오제까지 지내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평교협 교사들은 교장의 저지에도 아랑곳없이 학생들을 이끌고 근무지를 무단 이탈하여 설립자가 근무하는 건국대에 도착, 학생회관에서 농성을 벌였습니다. 그리고는 밤이면 학생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는 반교육적인 작태를 연출했습니다.
전교조의 K 선생님! 이게 교육자가 할 짓입니까?
학생들의 열기가 식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무슨 이유, 어떤 명분으로도 이같은 행위는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태연히, 또 아무런 죄의식 없이 이와 같은 반교육적인 행위를 저질렀습니다. 이로 인하여 설립자는 건국대 상임감사직에서 물러나야만 했습니다. 무슨 잘못이 있어서가 아니라 교육자로서의 책임을 지기 위해서였지요.
교장을 묶은 학생들
평교협은 건국대 농성을 알리는 전단과 “설립자는 죽었다”는 의미로 검은 테를 두른 사진의 유인물을 건국대학교와 설립자 자택이 있는 아파트 등지에 대량 살포함으로써 설립자와 관련이 있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설립자가 마치 큰 비리를 저지르기라도 한 양 비치게 했습니다.
평교협의 만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학생들을 인솔하여 법인사무실의 점거농성을 시도하다가 저지되자 설립자의 집으로 몰려가 소동을 벌였습니다. 설립자 가족은 이를 견디다 못해 모두 집을 비우고 피신해야 했습니다. 뿐 아니라 활동비 조달을 위해 학생들에게 모금함을 메고 하고 서울거리에서 모금운동을 벌이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학교측은 89년 4월 성행이 불량한 여교사의 징계파면을 결정했습니다. 이에 평교협은 기다리기라도 한 듯 징계철회를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며 학생들을 선동했습니다. 흥분한 학생들은 교장실에 난입, 교장을 폭행하는 끔찍한 패륜을 저질러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학생들은 교장을 전기줄로 기둥에 묶어 놓고는 “갈비뼈가 부러져야 하겠느냐”고 몽둥이로 협박하며 설립자의 주소를 대라고 다그쳤습니다.
훗날 이 교장은 “재단퇴진을 요구하며 설립자의 주소를 대라는데 거부하자 40여명의 학생이 구호를 외치고 노래부르며 학생회장 등 3명이 갑자기 달려들어 묶는데 꼼짝없이 당했다”고 그 날의 악몽을 되살리며 “생각만 해도 끔직하다”고 몸서리를 쳤습니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 설혹 교장이 무슨 범죄행위를 저질렀다 해도 제자가 스승에게 이럴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마땅히 교사라면, 학생들을 저지하고 나무라야 합니다. 하지만 평교협 교사들은 이를 빤히 보고만 있을 뿐 말리지 않았습니다. 지나는 사람이라도 이런 광경을 목격하면 말렸을 겁니다. 시정잡배라 해도 이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평교협 교사들은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암묵적으로 학생들을 응원했습니다.
전교조의 K 선생님!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제 생각에 만일 평교협 교사들도 평교협에 가입하기 전이었다면 우리의 상식을 배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평교협에 가입하지 않았다면 정상적인 사고방식대로 행동했을 겁니다. 말하자면 이들이 평교협의 일원이 되면서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른 사고를 하게 되지 않았나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건 어떤 이념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됩니다. 여주상고 사태를 보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학교분규와는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분규’라 하지 않고 굳이 ‘소요’라고 말한 것은 그래서입니다. 제가 보기에 당시 여주상고는 ‘혁명상황’이라 해도 무리가 아닙니다. 그러지 않고는 학생들이 시설물을 파괴하고 교장에 폭행을 가하는 패륜을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교장 폭행 사건 이후 평교협 교사들이 보인 행태도 교육자라기보다는 혁명가다운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이 사건으로 학생 3명이 구속되고 검찰에 소환되자 한결같이 “학생들의 잘못이었다”고 책임을 학생들에게 돌렸습니다. 평교협 교사들의 이런 태도는 이들 눈에 학생들은 소요, 나아가 혁명을 위한 소모품에 불과했던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징계교원의 재심과정에서도 이들은 거짓진술로 일관했습니다. 이에 “교사들이 웬 거짓말을 그렇게 하느냐”고 묻자 “살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하지 않는가”라고 당당하게 되물어 실소를 자아냈다고 합니다. 하기야 교무실을 점거해 고기, 닭죽까지 끓여먹으면서도 “단식농성 ○일째”라며 학생들을 선동했던 이들입니다.
학생들은 소요를 틈타 여러가지 물품을 훔쳐갔습니다. 교장실 난입 후 라디오, 녹음기, 양복 등의 물품이 없어졌습니다. 학생들은 이사장의 서재를 털고 침실의 옷과 장식품 그리고 수집품 등 무려 50여가지를 훔쳐갔습니다. 훔친 양복을 버젓이 입고 등교하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그걸 보고 평교협 교사들은 “그게 뭐가 나쁘냐, 원인과 동기가 중요하다”고 항변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참교육”을 외쳤습니다.
평교협 교사들은 비평협 교사가 학생에게 말을 건네기라도 할라 치면 “왜 애들과 얘기하냐”며 트집을 잡고 싸움을 걸기 일쑤였습니다. 그건 비평교협 교사들과 학생들을 차단하기 위한 목적에서였겠지요. 행여 학생들이 이성을 되찾으면 소요를 이끌어 가기 어려울 것이니까요.
죽인다 해도 私學은 하지 말라
평교협은 소요가 절정에 달하자 자신들의 의식을 서슴없이 드러냈습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반미의식은 물론 계급투쟁의식을 드러내는 발언도 거침없이 뱉어냈습니다. 문익환 목사의 밀입북 사건에 대해서도 “문익환 목사가 무엇이 잘못이냐. 안기부가 죽일 놈이다”라고 했지요. 물론 요즘에 와서야 사정이 달라졌는지 모르지만 당시만 해도 그런 생각은 이른바 ‘운동권’ 아니면 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89년 6월 들어 평교협은 전교조로 변신합니다. 전교조 여주지회 결성에 앞장선 여주상고 전교조 교사들은 7월초 여주지회장(여흥고 교사)의 징계해임에 여흥고교로 몰려가 항의, 심야농성을 벌이며 투쟁의 외연을 넓혀 나갔습니다. 정부의 전교조 불인정과 학교측의 설득으로 대부분의 학교에서 전교조를 거의 탈퇴하던 무렵에도 이 학교 전교조 교사들은 오히려 더 거센 저항으로 맞섰습니다. 전교조 핵심교사들이 농성을 하는 명동성당에 몰려가 노란 셔츠로 갈아입고 함께 농성하고 노조가입과 분회를 결성한 후 문교부장관의 퇴진을 외치며 기세를 올렸습니다. 물론 그 바람에 학교현장은 교육의 장이 아니라 정치투쟁의 장으로 전락했습니다.
이들은 7월말 교무실을 점거하고 ‘교원노조 사수’를 외치며 농성을 벌였습니다. 이 점거농성은 그 다음달 8일까지 계속되었지요. 이들은 동시에 서명운동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니 학교는 난장판이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농성 과정에서 전교조의 권 모(당시 27세) 교사는 김 모, 백 모 등 다른 전교조 교사와 함께 자신의 고교 은사이자 당시 동료인 박 모 교사(비전교조)를 집단구타하여 전치 2주의 상처를 입혔습니다. 이로 인하여 그는 구속되었습니다. 또 전교조 최 모 교사는 자기들의 일을 방해한다며 원로 여교사인 윤 모 교사의 배를 마구 구타하여 전치 10일의 상처를 입히고 입건되었습니다.
이렇듯 여주상고는 전교조 교사와 학생들의 불법무도한 패륜행위로 얼룩졌습니다. 때문에 대량징계가 불가피했고, 무려 25명이나 징계처분을 받고 나서야 사태가 진정될 수 있었습니다.
전교조의 K 선생님!
여주상고 사태는 학내 문제로 인해 촉발된 게 아닙니다. 여주상고는 면소재지에 자리한 학교로는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시설이 우수하여 매년 90% 이상의 높은 취업률을 자랑해 온 학교입니다. 뿐 아니라 산업체근로학생을 교육하기 위해 학교 측 스스로 특별학급을 개설하여 각종지원을 아끼지 않아 왔던 학교입니다. 시골의 학교지만 강당 겸용의 종합실내체육관을 갖추고 있었고, 교원의 사택과 학생기숙사 시설까지 보유하고 있어서 교사와 학생의 후생복리가 도회지의 그 어느 학교 못지 않았습니다.
비단 시설만 우수한 게 아닙니다. 여주상고는 그 당시 이미 교원의 해외연수를 실시할 정도로 선구적인 학교였습니다. 전 교직원의 수련회도 매년 봄, 여름 두 번에 걸쳐 실시했고, 교원 부인들을 위로관광까지 시켜주며 교원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애썼습니다. 교직원들이 생일을 맞으면 빠짐없이 고기를 사 보내고, 산업체 특별학급 교사에게는 음료수와 다과를 수년간 제공해 왔습니다. 그것도 설립자 사비를 들여서 말입니다. 이런 학교에 무슨 큰 문제가 있어 소요가 발생한단 말입니까.
결국 전교조 운동으로 인해 학생들만 피해를 입은 셈입니다. 전교조 교사들은 평교협 당시 학교측이 평교협 투쟁의 허구성을 지적하며 평교협의 해체를 요구하자 “우리도 끝내고 싶지만 외부의 도움을 받기 때문에 우리 뜻대로 안된다”고 거절하며 “우리의 투쟁목표는 따로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여주상고는 학교 일과는 아무 상관 없이 홍역을 치렀다는 뜻입니다. 전교조(평교협)는 재단이 부패 투성이기라도 한 양 몰아 감으로써 학생들을 선동했지만 전교조의 주장이나 의혹 제기는 투쟁을 위한 투쟁의 수단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당시 교장은 이렇게 말하더군요.
“학생들은 전교조 교사들의 사주를 받아 멋모르고 터무니없는 주장을 했습니다. 이를테면 교납금 예산을 가령 1억원이라고 하면 월 10%의 이자를 계산해서 그 돈이 어디에 갔느냐고 막무가내로 따지고 듭니다. 상식적으로 이자는 연 10%지 월 10%가 아니지요. 그런데도 무턱대고 재단을 의심하고 매도했습니다.”
이 학교 설립자 김 모 씨의 말을 들으면 정말로 가슴아픕니다.
“사학 설립자들이 다 그러했듯이 막대한 재산과 정성을 들여 애정으로 키워온 학교인데 그런 식으로 재단이 마치 비리의 온상이라도 되는 듯 매도한 것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농촌학교로서 교직원 사택과 기숙사를 마련해주고 장학제도를 확대하는 등 교직원과 학생의 복지에도 심혈을 기울였던 걸 생각하면 배신감을 느낍니다. 친인척을 안쓰고 순전히 남에게만 학교를 맡겨놓은 결과 평교협이 쉽게 태동할 수 있던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나는 죄가 많아 학교를 설립했지만 자식들에게는 이런 풍토에서는 누가 죽인다고 해도 학교는 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출처: www.newdaily.co.kr)
조남현(자유시민연대 대변인)
(kon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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