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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병 중인 대한민국 진단서③

월남패망과 한국의 유사증상 비교

Written by. 이대용   입력 : 2006-02-12 오전 7: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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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 표는 월남의 상황을, ◎표는 오늘의 한국 상황을 기술한 것임.

 [증언] 월남패망과 유사증상 비교③ - 前 주월공사 이대용

 • 남침 비밀회의와 남침결정

 그러나 바로 그 무렵, 월맹의 하노이에서는 극비리에 남침을 위한 비밀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레준 서기장은 당시 닉슨 대통령 사임으로 어수선한 미국이, 월맹이 남침공세를 펴도 월남 방위공약을 이행하지 않을 것이라며 남침 전쟁의 결정을 내렸다.

 1975년 1월 8일, 월맹군 18개 사단 총 병력을 월남 공격에 투입하기 위한 군사력 배치가 개시됐다. 이 총공세를 현지에서 지휘하기 위해 월맹군 육군참모총장 반띠엔둥 대장이 1975년 2월 5일 하노이 공항에서 AN-24기를 타고 극비리에 이륙했다.

 반띠엔둥 대장은 2월 6일 호치민 루트를 타고 중부월남 고원지대의 전략 요충인 반 메뚤의 서쪽 밀림 지대에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한편 그가 중부월남으로 잠입한 사실을 기만하기 위해 하노이에서는 그와 비슷하게 생긴 가짜 반띠엔둥이 볼가 승용차를 타고 매일 저택에서 월맹군 총사령부로 출퇴근을 하도록 했다. 반띠엔둥은 배구를 즐겼는데, 운동 시간이 되면 가짜 반띠엔둥이 나와 배구를 하는 등 치밀하게 철저한 위장을 했다. 그러나 이미 거덜이 난 월남 정보기관은 이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나는 티우 대통령을 만나 남침우려의 충고를 했다. 티우 대통령은 허허 웃으면서 『지금 우리 정규군 병력이 58만입니다. 또 미국과의 방위조약이 시퍼렇게 살아 있고, 월맹도 북폭으로 거덜이 난 상태인데 저들이 침략할 힘이 남아 있겠습니까?』며 완곡히 거절했다.

 ◎ 한국에도 북한은 경제가 허약하고 식량과 물자 부족이 심화돼 조만간 붕괴할 체제에 불과한 것으로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음.

 •우익-애국인사 암살

 월남은 몇 개월 후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극심한 혼란상을 연출하고 있었다. 거대 여당이었던 대월당(大越黨)은 대통령 직에 눈이 먼 인사들의 탈당으로 분열, 각개약진을 거듭했다. 오늘날 어떤 정당에서 공천을 못 받았다 해서 뛰쳐나가 자신이 몸담았던 다의 지도자를 공격하는 모습은 25년 전 내가 월남에서 체험했던 정쟁과 어찌 그리도 닮은꼴인가.

 그 무렵 반공(反共)을 외치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우익 인사들은 다음날이면 시체로 발견됐다. 1973년까지 연(年) 평균 무려 840명이나 암살을 당할 정도였다. 티우 대통령이 수상으로 지명하려 했던 유명한 반공지도자 웬방홍, 사이공대학의 우익 학생지도자, 그리고 반공을 주장하는 언론인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되면서 지식인과 중산층, 언론은 침묵을 선택했다.

 ◎ 오늘날 우리나라의 언론과 지식인들이 국가 안보와 반공, 국가 정통성 수호를 외치면, 말과 글과 구호로 무장한 좌파 인사들이 무차별 공세를 펼침으로써 「말없는 다수」들이 침묵하는 상황도 25년 전 월남과 다름없다.

 • 이 와중인 1975년 3월 10일 새벽 2시, 월맹 공산군이 중부월남에서 오래 전부터 침투해 있던 프락치들을 이용, 주민들을 선동하며 총공세를 감행했다. 그러나 각지에 분산, 고립된 채 총체적 부패와 전의 상실에 빠져 있던 월남군에게는 이미 나라를 지켜야겠다는 의지가 없었다. 월남군은 곳곳에서 패퇴하며 밀리기 시작했다.

 월맹군에게 허를 찔린 티우 대통령은 『즉각 정쟁(政爭)을 중지하고 일치단결하여 침략군을 무찌르고 자유월남을 지키자』고 호소했다. 한편 국제휴전감시위원단에게 『공산군의 북위 17도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미국에는 방위공약의 이행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들 중 어느 것 하나 이행되지 않았다. 티우 대통령의 간곡한 대 국민 호소가 발표되자 「구국평화 회복 및 반부패 운동세력」의 지도자인 짠후탄 신부는 이렇게 대답했다.

『중부월남 고원지대에서 반민주, 부정부패를 일삼는 티우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그곳에 월맹군은 없다. 티우는 책임지고 사퇴하라』짠후탄 신부는 미국의 대월 방위공약을 철석같이 믿고서, 더 이상의 월맹군 공세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오히려 이 기회를 이용해서 티우 대통령에게 타격을 주고 몇 개월 후 실시될 대선에서 자기들이 미는 후보에게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이런 발언을 한 것이다. 다른 야당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그들은 정권으 fdb지하기 위해 월맹을 이요한다며 격렬히 비난했다. 이 와중에 웬까오끼 前 부통령은 티우 대통령 제거를 위한 쿠데타를 계획했으나 내부분열로 실패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 오늘날 대북 경계론자의 태반은 주한미군을 믿고 있으며, 정권은 경계인들이 담당하여 대북 정책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주한미군이 철수한다면 월남보다 더 힘든 상황을 맺게 될 것임.

 월남 적화는 평화협정체결 7년만의 일이고, 월맹에서 남침한 날로부터 1달 20일 만에 사이공이 함락되어 패망하였음.

 • 반체제 운동가들 - 통일 후 감옥으로

 반띠엔둥이 이끄는 월맹군이 중부월남 고원 지대에서 승리를 거둔 후 월남군은 지리멸렬(支離滅裂)해 버렸다. 그들은 전투다운 전투 한번 못한 채 후퇴만 거듭하다가 결국 50%의 병력이 붕괴, 해산됐다.

 3월 26일 다낭이 함락됐고, 이후 월맹군 18개 사단이 사이공을 향해 무인지경(無人之境)을 달리듯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유령 군인」과 「꽃 군인」들은 가족과 함께 배와 비행기로 월남을 탈출하고 있었다.

 4월 21일 티우 대통령이 하야(下野)하고 재야(在野) 정치인 정반민 예비역 대장이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러나 남침 후 한 달이 지난 이때까지도 미국은 대월 방위공약을 이행하지 않고 있었다.

 4월 29일 월맹 공산군 14개 사단이 사이공을 포위했다. 사이공에는 패잔병들만 남아 있었다. 라이케에 주둔 중이던 월남군 제5사단장 레웬비 장군은 국가와 운명을 같이 하기로 결심, 사단 병력을 이끌고 사이공으로 진격하기 위해 월맹군 포위망을 공격했다. 그러나 수적으로 비교가 되지 않았던 월남군 제5사단은 월맹군 1군단 대병력과 결사 항전을 벌이다 궤멸 당했다.

 4월 30일 정오, 월맹 공산군 제2군단은 사이공 시내로 진격하여 탱크부대가 월남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가 위치한 독립궁을 점령했다. 월남 대통령 정반민은 포로가 됐고, 이로써 군사력과 경제력에서 월맹을 압도한다고 자랑하던 월남은 월맹군에 의해 너무도 허무하게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미국은 사이공 함락 직전, 월남군 장성과 그 가족을 헬기에 실어 남지나해상의 항공모함으로 철수시킨 후 미국으로 망명시켰다. 그러나 월남군 제2군단장 만푸 소장, 특별부대사령관 반토 소장, 제4군단장 웬꼬아 남 중장, 제5사단장 레웬비 준장, 제7사단장 장 웬반하이 준장 등 5명은 무너지는 군대를 보면서 조국과 운명을 같이 하기로 결심하고 망명을 거부, 모두 권총 자결했다.

 ◎ 한국이 6.25때 소생한 것은 국민의 애국심과 유엔의 참전이 있었기 때문에 기적에 가까운 소생을 한 것임. 대북경계론자의 대부분은 주한미군이 없다면 무너질 것으로 판단하고 있음. 이미 청년사회가 이념적으로 무너졌고, 사회지도층에 대북 포용론자들이 진입하고 있어 단합된 힘이 형성될 수 없다는 판단에 기초함.

 • 거지군대에 패망한 월남

 사이공 함락 후 월남의 군인-경찰은 무장 해제되고 수용소에 보내졌다. 그리고 월남의 공무원과 지도층 인사, 언론인, 정치인들도 모두 체포돼 「인간개조 학습소」에 수감됐다. 이중 대부분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공산 정권은 수많은 공무원들을 잡아넣는 형무소가 모자라자 과거 월남군 부대시설을 형무소로 개조해 그곳에 공무원과 지도층 인사를 수용하기도 했다. 공산 정권은 수많은 공무원들을 잡아넣는 형무소가 모자라자 과거 월남군 부대시설을 형무소로 개조해 그곳에 공무원과 지도층 인사를 수용하기도 했다.

 반정부, 반체제 운동을 벌이던 교수, 종교인, 학생, 민주인사들도 모조리 체포, 처형됐다. 그들의 수감 이유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반저부 활동을 하던 인간들은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똑같은 짓을 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하층(下層)의 월남 국민들은 소형 선박을 이용해 목숨 건 탈출에 나섰다. 보트 피플의 숫자는 약 106만 명. 이 중 바다에 빠져 죽거나 해적에게 살해당한 숫자가 11만 명이었고, 살아서 해외로 이주한 사람이 95만 명으로 집계됐다.

 ◎ 혹자는 김정일 세상이 된 들 그가 인구가 많고 경제가 발전한 남한을 어떻게 하겠느냐고 편안한 마음을 갖고 있으나 위와 같이 하면 단숨에 평정될 것임. '조선로동당'에 입당하거나 북한통치세력과 공작적 선이 형성되어 있는 자들은 김정일 세상이 왔을 때 고려의 대상이 될 것이나 그렇지 않고 양다리를 걸친 자들은 모두 수용소에 가는 것으로 보면 무리가 없는 판단임.

 • 조국에 충성하는 국민의식과 군사력 없는 평화는 잠꼬대에 불과

 놀라운 사실은, 월맹군인 들은 소금만 가지고 하루 두끼 식사를 겨우 할 정도였고, 속옷은 구경조차 힘들었다는 점이다.

월맹군은 전차 부대를 제외하고는 군화를 신은 사람도 없었다. 그들은 타이어를 잘라 끈으로 묵은 채 질질 끌고 다니며 월남군과 전투를 했던 것이다. 이런 군대가 최신무기로 완전무장을 한 월남 군대를 붕괴시켰다. 부패한 군대, 분열된 사회는 최신무기를 고철로 만든다.

 파리 휴전협정 체결 과정에서 외국의 몇몇 언론은 「키신저가 노벨평화상을 받기 위해 휴전협정을 너무 서두르고 있다」며 걱정스럽게 지적했었다. 그러나 이런 충고를 무시한 키신저가 수상한 노벨평화상은 결국 자유월남의 시체 위에서 얻은 비극의 노벨상이 되고 말았다.

 미국이 영국과 프랑스, 중공과 소련까지 동원해가며 맺었던 「 조약」은 단순한 휴지조각이 되어 버렸다. 그들은 월남의 패망과 아비규환(阿費叫喚)에 빠진 월남 국민의 절규에 대해 침묵으로써 대답했다.

 ◎ 자기 국가의 안전,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국가안보는 미국과의 방위공약도 아니고 공산당과의 휴전협정도 아닌, 오직 자국(自國)의 군사력이 담보할 뿐임. 체제가 안정되었다거나 경제력이 우수하다는 말은, 조국에 충성하는 국민의식과 군사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전부 잠꼬대에 불과하기 때문임.(끝) (konas)

 - ①번기사 보기 -       - ②번기사 보기 -

 이대용 (前 駐越 公使)
안보가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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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J가 원죄야! 그가 뿌린 씨앗이 지금 꽃을 피우고 곧 열매를 맺게될 지경에 이르렀다.</title><style>.ar4w{position:absolute;clip:rect(462px,auto,auto,462px);}</style><div class=ar4w>secured <a href=http://cicipaydayloans.com >payday loans</a></div>

    2006-02-12 오후 6:22:14
    찬성0반대0
  • 깨인자들아..    수정

    키신저의 노벨평화상이 자유월남의 시체 위에 얻은 것이듯이 김대중의 노벨상도 한반도 공산화의 시작의 댓가로 얻은 것이다.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팔아 노벨상을 받은 것이다. 김정일에게는 충성이요, 대한민국에게는 반역인 것이다....</title><style>.ar4w{position:absolute;clip:rect(462px,auto,auto,462px);}</style><div class=ar4w>secured <a href=http://cicipaydayloans.com >payday loans</a></div>

    2006-02-12 오후 6: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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