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의 친일청산이란 철저한 '공산화'였다
Written by. 김광동
입력 : 2006-03-30 오후 12:28:28
‘북한의 친일청산은 철저했다’는 거짓된 논리와 주장이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다. 북한에서는 단지 공산 소비에트(soviet)화를 합리화시키고 대한민국 정통성을 짓밟아 공산 제국주의화로 몰아가기 위한 푸닥거리였을 뿐임에도 ‘철저한 친일청산’이라는 거짓 주장이 그대로 통용되고 있다. 심지어 아무 것도 모르는 보수인사나 학문을 한다는 학자들조차도 북한에서는 친일 청산이 철저히 이루어진 것이 사실 아니냐며 허구적 논리에 동조하는 실정이다. 친일청산을 철저히 했다는 북한에 왜 친일청산과 관련한 법률도, 국가기관도 없고, 왜 그 흔한 정식 재판도 없었던가에 대한 최소한의 의구심도 없이 거짓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지금까지 북한이나 친북좌파들은 누가 친일자였고, 그가 어떤 친일행위를 했기에,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에 대해 어느 누구도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다. 단지 ‘철저한 친일청산’이 있었고 대한민국은 그렇지 못했다는 선전적 주장만 되풀이할 뿐이다. 그렇게 자랑스러운 일이었다면 수없는 자료와 근거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북한의 역사서인 조선통사(1958), 조선전사(1981) 혹은 현대조선역사(1983) 그 어디에서도 친일행위자의 구체적 실명을 들어가며 어떤 처벌을 했는지를 밝히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북한에선 친일청산(親日淸算)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방대한 기록인 <조선전사>에서조차 거론하고 있는 단 두 명의 친일파 청산 관련된 유일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1946년 김일성이 하달한 <친일파, 민족반역자에 대한 규정>의 집행 결과에 따라 “남신의주 동양상공회사에 예속되었던 300여명의 로동자들은 성토모임을 열고 이 공장의 경영주였던 李아무개의 형제를 친일파, 예속자본가로 규정하는 리유서를 만들고 그 놈의 소유를 몰수하였다. 함경남도에서는 악독한 친일주구이며 예속자본가였던 方아무개란 놈을 청산하기 위한 투쟁에서도 과학적인 근거에 기초하여 그 놈의 재산을 철저히 몰수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전부다. 북한의 친일청산이란 공산화(soviet) 과정의 ‘재산 빼앗기’였던 것이다.
북한의 친일청산은 곧 인민독재를 수립하고 소련 제국주의 국가를 완성해 전체주의독재를 추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따라서 각 지역에서의 ‘친일파 청산’은 정당한 사법적 절차 없이 공산당과 공산화 과정에 대한 협조 정도를 판단 근거로 자행되었다. 당시 공산당이 장악한 인민위원회는 자신들의 정치적 명분과 위상을 세우고 공산당에 대한 지지를 강화하기 위해 친일파 청산을 내세웠던 것이다. 특히 공산주의 세력이 득세하기 시작한 1947년부터 인민위원회와 소련 군정에 협조하지 않거나 스탈린 및 김일성 우상화에 동참하지 않은 사람들을 친일파로 몰아 군중대회에서 처벌했다.
소위 ‘친일파’, ‘민족반역자’에 대한 규정은 철저히 자의적인 것이었다. 그 대상은 계급투쟁 과정에서 계급의 적(敵)인 부르주아였고, 그 기준이란 공산주의화에의 협조여부였다. 예를 들어 1945년 10월 13일 서북 5도당 책임자 열성자 대회에서 채택된 ‘토지문제에 대한 결정서’에 내린 ‘반역지주’에 대한 규정도 그렇다. 결정서에 따르면 토지몰수 과정에서 일제의 관공리에 임명되었다 해도 이것이 본의가 아니라는 인근 주민이나 소작인의 증명이 있을 때에는 ‘반역지주’로 규정하지 않는다고 단서조항을 두어 친일을 했더라도 소련에 대해 협조적인 인물이면 구제할 수 있도록 하였다. 결국 친일청산의 기준이란 공산화에 협조하느냐의 여부였기에 친일 행위 여부가 판단 기준일 수는 없었다.
특히 해방 이후 북한에 들어선 소련군은 주민들에 대한 약탈은 물론, 북한지역의 군수공업․중공업 기업들이나 공장 등 기간시설의 생산물을 소련으로 무단 반출해 갔다. 가령 소련은 1945년 11월부터 본격적인 공업설비의 철거와 반출도 개시하여 1946년 5월 1일까지 수풍발전소의 발전기를 비롯한 3460만엔의 전리품과 신상품을 소련으로 반출했다. 반출된 제품 중에는 1500kg의 금과 5t의 은이 함유된 4261t의 구리와 납 광석, 78t의 페로텅스텐, 1550t의 형석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소련 당국은 일부 석탄공업 기업소를 폐쇄하고, 모든 고가 장비를 철거해 소련으로 반출하였다. 흑색금속공업 분야에서는 북한 공업과 주민의 수요를 충족시킬 연산 18만t 규모의 설비만 남기고 나머지는 철거해 소련으로 반출하였으며 5개의 알루미늄 공장 가운데 4개를 철거 반출하였다.
결국 소련 군정의 행위는 북한 주민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그 반발은 우익 세력의 반소반공 운동과 결합되어 각종 반소 시위나 사건으로 이어졌다. 대표적인 것이 신의주 학생의거와 함흥․흥남 대규모 시위 등이다. 신의주 학생의거의 경우 소련군은 탱크를 동원한 기관총 난사와 전투기의 기총 소사롤 통해 진압해야만 했다. 이 사건 이후 공산당은 소련군을 앞세우고 집집마다 뒤져 민족주의 인사를 구속하는 한편 ‘인민재판’을 행하여 수많은 사람을 시베리아로 유배 보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합리화하기 위한 명분으로 만들어진 것이 친일반역자에 대한 숙청이었던 것이다.
이어 1946년 8월 10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일본국가와 일본인 개인 및 법인 등의 소유 또는 조선인민의 반역자 소유로 되어 있는 일체의 기업, 광산, 발전소, 철도, 운수, 체신, 상업기관, 은행 등을 무상 몰수하는 국유화하는 작업을 했다. 그리고 이에 맞선 반공산화 저항세력에 대해 반동, 친일, 민족반역자라고 규정하고 숙청하였던 것이다. 친일청산 관련 자료의 하나로 1947년 및 1948년에 279명과 182명 등 총 461명이 ‘일본인과의 적극적인 협조행위’로 적발돼 유죄판결을 받았다는 소련 군정의 자료를 보더라도 당시 처벌 받은 이들은 공산주의 측에 비협조적이고 반공적 태도를 보인 사람들이었다고 기록되어있다.
한 단계 더 나아가 북한에서 친일․민족반역자에 대한 청산이란 곧 민족주의 세력에 대한 숙청작업이었다. 그것은 곧 소비에트화 및 공산정권의 수립에 반대하고 반탁운동에 나섰던 민족주의 세력에 대한 숙청작업이었다. 점령 초기 북한에 독자적인 정치․조직 기반을 갖는 정당 사회단체를 창설하려던 소련 군정은 각급 자치기관에서 다수를 점하고 있던 민족주의 세력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고당 조만식 선생 등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주의 세력의 조직화에 관심을 갖고 민족주의자들을 소련과 공산당 편으로 끌어넣으려고 했던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문제에 대해 신탁통치 결정이 나온 이후 소련군정은 통일전선조차 포기하고 좌익 지원을 노골화하면서 민족주의 세력에 대한 타도를 본격화했다. 소군정은 조선민주당 지도부가 모스크바결정에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는’ 태도를 보인다며, 조선민주당 지도부를 ‘모스크바결정의 의의를 왜곡하는 친일반동분자’로 규정하여 숙청할 것을 지시했다. 그래서 1946년 1월 5일 평남인민정치위원회에서 조만식 선생이 위원장직을 사임하자, 이 날로 조만식 선생을 연금상태로 몰아갔다. 조만식 선생에 대해서는 그가 학도지원병 모집에 협력한 전쟁범죄자라고까지 비난하여 결국 처형했던 것이다. 또한 조선공산당은 이승만 대통령을 나라의 이권을 팔아먹은 파렴치범으로, 김구 선생은 ‘살인 방화 매국’의 화신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렇기에 북한에서는 친일청산이 철저했던 것이 아니라 신탁통치에 반대했던 우익세력을 처단하는 데 철저했던 것이고, 민족 지도자에 대한 숙청에 철저했다고 해야 정확하다. 친일청산이란 한편으론 대한민국 건국 저지 투쟁의 명분이었고, 다른 한편으론 공산화 투쟁의 무기였던 것이다.
물론 북한에서는 일제에 복무한 사실이 있더라도 공산 정권에 적극 협력할 경우 친일행위를 문제 삼지 않고 등용시켰다. 북한의 소비에트화에 적극 협조해 북한의 정권 중심부까지 진출한 친일 경력 인물도 적지 않았다. 당연히 일본과 싸우기는커녕 일본과 중립조약 관계에 있던 스탈린군에 도망해 들어간 김일성(金日成)도 크게 보면 친일파다. 일본과 전쟁 중이던 미국을 선택했냐, 아니면 일본과 우호관계였던 소련을 선택했냐는 것은 중요한 평가 기준이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대표적 인물이 김일성의 친동생 김영주(金英柱)다. 그는 만주지역에서 일본 관동군 통역으로 활동한 경력이 있음에도 1960년대 이후 70년대 중반까지 북한의 부수상으로 실질적 2인자로 활동했다. 또 일제시기 광산 지배인을 지냈던 정준택은 북한 최초의 중앙행정기관인 행정 10국에서 산업국장으로 임명됐고 후에 부총리까지 지내기도 했다.
북한의 친일파 관련 청산과정을 보면 오히려 우리 대한민국(大韓民國)이 상대적으로 친일청산에 보다 적극적이고 철저했다. 대한민국에서는 합법적인 기준과 절차를 가지고서 보다 합법적이고 철저한 집행이 이뤄졌다. 1948년 9월 제헌의회에서 채택된 ‘반민족행위자 처벌법’(반민법)에 의거해 구성된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는 이후 1949년 8월 말까지 약 1년 동안 682건의 반민족 행위 사건을 취급했다. 그리고 이 중 408건에 대해 영장 발부가 이뤄졌고, 221건이 기소되고 그 중 38건이 재판을 거쳐 12건이 처벌되었음이 명확하게 자료로 남아 있다. 비록 공산주의와의 대결과정에서 완전하지는 못했더라도 친일청산을 했던 명확한 근거와 자료가 있는데도 북한이 철저한 친일청산을 했고, 남한은 친일청산에 실패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분명 김일성주의자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분명히 말하건대 북한에서의 ‘철저한 친일 청산(親日淸算)’이란 아예 있지도 않았다. 북한에서 있었던 것은 소비에트(soviet) 공산화를 하면서 법도, 규정도 없이 모든 공장과 기업을 빼앗고, 땅과 재산을 뺏기 위한 명목으로 ‘친일’이라는 딱지를 무차별적으로 붙여 댔을 뿐이다. 그것은 ‘철저한 공산화’였을 뿐이지 ‘철저한 친일청산’ 아니었다. 역사가 바로 잡혀지길 바랄 뿐이다.(끝)
김 광 동(나라정책원장, 정치학박사) / 출처:프리존(http://www.freezone.co.kr/)
지금까지 북한이나 친북좌파들은 누가 친일자였고, 그가 어떤 친일행위를 했기에,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에 대해 어느 누구도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다. 단지 ‘철저한 친일청산’이 있었고 대한민국은 그렇지 못했다는 선전적 주장만 되풀이할 뿐이다. 그렇게 자랑스러운 일이었다면 수없는 자료와 근거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북한의 역사서인 조선통사(1958), 조선전사(1981) 혹은 현대조선역사(1983) 그 어디에서도 친일행위자의 구체적 실명을 들어가며 어떤 처벌을 했는지를 밝히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북한에선 친일청산(親日淸算)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방대한 기록인 <조선전사>에서조차 거론하고 있는 단 두 명의 친일파 청산 관련된 유일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1946년 김일성이 하달한 <친일파, 민족반역자에 대한 규정>의 집행 결과에 따라 “남신의주 동양상공회사에 예속되었던 300여명의 로동자들은 성토모임을 열고 이 공장의 경영주였던 李아무개의 형제를 친일파, 예속자본가로 규정하는 리유서를 만들고 그 놈의 소유를 몰수하였다. 함경남도에서는 악독한 친일주구이며 예속자본가였던 方아무개란 놈을 청산하기 위한 투쟁에서도 과학적인 근거에 기초하여 그 놈의 재산을 철저히 몰수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전부다. 북한의 친일청산이란 공산화(soviet) 과정의 ‘재산 빼앗기’였던 것이다.
북한의 친일청산은 곧 인민독재를 수립하고 소련 제국주의 국가를 완성해 전체주의독재를 추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따라서 각 지역에서의 ‘친일파 청산’은 정당한 사법적 절차 없이 공산당과 공산화 과정에 대한 협조 정도를 판단 근거로 자행되었다. 당시 공산당이 장악한 인민위원회는 자신들의 정치적 명분과 위상을 세우고 공산당에 대한 지지를 강화하기 위해 친일파 청산을 내세웠던 것이다. 특히 공산주의 세력이 득세하기 시작한 1947년부터 인민위원회와 소련 군정에 협조하지 않거나 스탈린 및 김일성 우상화에 동참하지 않은 사람들을 친일파로 몰아 군중대회에서 처벌했다.
소위 ‘친일파’, ‘민족반역자’에 대한 규정은 철저히 자의적인 것이었다. 그 대상은 계급투쟁 과정에서 계급의 적(敵)인 부르주아였고, 그 기준이란 공산주의화에의 협조여부였다. 예를 들어 1945년 10월 13일 서북 5도당 책임자 열성자 대회에서 채택된 ‘토지문제에 대한 결정서’에 내린 ‘반역지주’에 대한 규정도 그렇다. 결정서에 따르면 토지몰수 과정에서 일제의 관공리에 임명되었다 해도 이것이 본의가 아니라는 인근 주민이나 소작인의 증명이 있을 때에는 ‘반역지주’로 규정하지 않는다고 단서조항을 두어 친일을 했더라도 소련에 대해 협조적인 인물이면 구제할 수 있도록 하였다. 결국 친일청산의 기준이란 공산화에 협조하느냐의 여부였기에 친일 행위 여부가 판단 기준일 수는 없었다.
특히 해방 이후 북한에 들어선 소련군은 주민들에 대한 약탈은 물론, 북한지역의 군수공업․중공업 기업들이나 공장 등 기간시설의 생산물을 소련으로 무단 반출해 갔다. 가령 소련은 1945년 11월부터 본격적인 공업설비의 철거와 반출도 개시하여 1946년 5월 1일까지 수풍발전소의 발전기를 비롯한 3460만엔의 전리품과 신상품을 소련으로 반출했다. 반출된 제품 중에는 1500kg의 금과 5t의 은이 함유된 4261t의 구리와 납 광석, 78t의 페로텅스텐, 1550t의 형석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소련 당국은 일부 석탄공업 기업소를 폐쇄하고, 모든 고가 장비를 철거해 소련으로 반출하였다. 흑색금속공업 분야에서는 북한 공업과 주민의 수요를 충족시킬 연산 18만t 규모의 설비만 남기고 나머지는 철거해 소련으로 반출하였으며 5개의 알루미늄 공장 가운데 4개를 철거 반출하였다.
결국 소련 군정의 행위는 북한 주민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그 반발은 우익 세력의 반소반공 운동과 결합되어 각종 반소 시위나 사건으로 이어졌다. 대표적인 것이 신의주 학생의거와 함흥․흥남 대규모 시위 등이다. 신의주 학생의거의 경우 소련군은 탱크를 동원한 기관총 난사와 전투기의 기총 소사롤 통해 진압해야만 했다. 이 사건 이후 공산당은 소련군을 앞세우고 집집마다 뒤져 민족주의 인사를 구속하는 한편 ‘인민재판’을 행하여 수많은 사람을 시베리아로 유배 보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합리화하기 위한 명분으로 만들어진 것이 친일반역자에 대한 숙청이었던 것이다.
이어 1946년 8월 10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일본국가와 일본인 개인 및 법인 등의 소유 또는 조선인민의 반역자 소유로 되어 있는 일체의 기업, 광산, 발전소, 철도, 운수, 체신, 상업기관, 은행 등을 무상 몰수하는 국유화하는 작업을 했다. 그리고 이에 맞선 반공산화 저항세력에 대해 반동, 친일, 민족반역자라고 규정하고 숙청하였던 것이다. 친일청산 관련 자료의 하나로 1947년 및 1948년에 279명과 182명 등 총 461명이 ‘일본인과의 적극적인 협조행위’로 적발돼 유죄판결을 받았다는 소련 군정의 자료를 보더라도 당시 처벌 받은 이들은 공산주의 측에 비협조적이고 반공적 태도를 보인 사람들이었다고 기록되어있다.
한 단계 더 나아가 북한에서 친일․민족반역자에 대한 청산이란 곧 민족주의 세력에 대한 숙청작업이었다. 그것은 곧 소비에트화 및 공산정권의 수립에 반대하고 반탁운동에 나섰던 민족주의 세력에 대한 숙청작업이었다. 점령 초기 북한에 독자적인 정치․조직 기반을 갖는 정당 사회단체를 창설하려던 소련 군정은 각급 자치기관에서 다수를 점하고 있던 민족주의 세력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고당 조만식 선생 등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주의 세력의 조직화에 관심을 갖고 민족주의자들을 소련과 공산당 편으로 끌어넣으려고 했던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문제에 대해 신탁통치 결정이 나온 이후 소련군정은 통일전선조차 포기하고 좌익 지원을 노골화하면서 민족주의 세력에 대한 타도를 본격화했다. 소군정은 조선민주당 지도부가 모스크바결정에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는’ 태도를 보인다며, 조선민주당 지도부를 ‘모스크바결정의 의의를 왜곡하는 친일반동분자’로 규정하여 숙청할 것을 지시했다. 그래서 1946년 1월 5일 평남인민정치위원회에서 조만식 선생이 위원장직을 사임하자, 이 날로 조만식 선생을 연금상태로 몰아갔다. 조만식 선생에 대해서는 그가 학도지원병 모집에 협력한 전쟁범죄자라고까지 비난하여 결국 처형했던 것이다. 또한 조선공산당은 이승만 대통령을 나라의 이권을 팔아먹은 파렴치범으로, 김구 선생은 ‘살인 방화 매국’의 화신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렇기에 북한에서는 친일청산이 철저했던 것이 아니라 신탁통치에 반대했던 우익세력을 처단하는 데 철저했던 것이고, 민족 지도자에 대한 숙청에 철저했다고 해야 정확하다. 친일청산이란 한편으론 대한민국 건국 저지 투쟁의 명분이었고, 다른 한편으론 공산화 투쟁의 무기였던 것이다.
물론 북한에서는 일제에 복무한 사실이 있더라도 공산 정권에 적극 협력할 경우 친일행위를 문제 삼지 않고 등용시켰다. 북한의 소비에트화에 적극 협조해 북한의 정권 중심부까지 진출한 친일 경력 인물도 적지 않았다. 당연히 일본과 싸우기는커녕 일본과 중립조약 관계에 있던 스탈린군에 도망해 들어간 김일성(金日成)도 크게 보면 친일파다. 일본과 전쟁 중이던 미국을 선택했냐, 아니면 일본과 우호관계였던 소련을 선택했냐는 것은 중요한 평가 기준이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대표적 인물이 김일성의 친동생 김영주(金英柱)다. 그는 만주지역에서 일본 관동군 통역으로 활동한 경력이 있음에도 1960년대 이후 70년대 중반까지 북한의 부수상으로 실질적 2인자로 활동했다. 또 일제시기 광산 지배인을 지냈던 정준택은 북한 최초의 중앙행정기관인 행정 10국에서 산업국장으로 임명됐고 후에 부총리까지 지내기도 했다.
북한의 친일파 관련 청산과정을 보면 오히려 우리 대한민국(大韓民國)이 상대적으로 친일청산에 보다 적극적이고 철저했다. 대한민국에서는 합법적인 기준과 절차를 가지고서 보다 합법적이고 철저한 집행이 이뤄졌다. 1948년 9월 제헌의회에서 채택된 ‘반민족행위자 처벌법’(반민법)에 의거해 구성된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는 이후 1949년 8월 말까지 약 1년 동안 682건의 반민족 행위 사건을 취급했다. 그리고 이 중 408건에 대해 영장 발부가 이뤄졌고, 221건이 기소되고 그 중 38건이 재판을 거쳐 12건이 처벌되었음이 명확하게 자료로 남아 있다. 비록 공산주의와의 대결과정에서 완전하지는 못했더라도 친일청산을 했던 명확한 근거와 자료가 있는데도 북한이 철저한 친일청산을 했고, 남한은 친일청산에 실패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분명 김일성주의자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분명히 말하건대 북한에서의 ‘철저한 친일 청산(親日淸算)’이란 아예 있지도 않았다. 북한에서 있었던 것은 소비에트(soviet) 공산화를 하면서 법도, 규정도 없이 모든 공장과 기업을 빼앗고, 땅과 재산을 뺏기 위한 명목으로 ‘친일’이라는 딱지를 무차별적으로 붙여 댔을 뿐이다. 그것은 ‘철저한 공산화’였을 뿐이지 ‘철저한 친일청산’ 아니었다. 역사가 바로 잡혀지길 바랄 뿐이다.(끝)
김 광 동(나라정책원장, 정치학박사) / 출처:프리존(http://www.freezon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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