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양요(辛未洋擾)가 남긴 교훈
신미양요란 1871년 4월, 미국 함대가 조선에 통상조약 체결을 강요하기 위해 강화도(江華島)를 침략한 사건을 말한다. 1866년 7월, 상선을 가장한 보물찾기 탐험선인 미국의 제너럴셔먼(General Sherman)호가 평양의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남의 묘를 기웃거리며 노략질을 하자 평양감사 박규수와 평양 사람들이 합세하여 이 배를 소침(燒沈)시킨 사건이 일어났다.
미국은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고 무력을 동원하여 조선과 통상조약을 체결할 목적으로 청나라 주재 공사 프레드릭 로우(Frederik Law)에게 조선 원정에 나서도록 했다. 이에 따라 아시아함대 사령관 존 로저스(John Rodgers)제독이 이끄는 미국 군함 5척(해군 기함 콜로라도호, 순양함 2척, 전함 2척)이 85문의 대포와, 1,230명의 병력을 싣고 1871년 3월 27일 일본 나가사키[長崎]를 출발했다.
4월 1일 남양만에 도착한 미군은 뱃길을 탐사하면서 북상, 8일 물치도 앞바다에 이르렀다. 당시 강력한 쇄국정책을 실시하던 흥선 대원군은 미군의 불법 영해침범을 경고하고 즉시 철수를 요구하였다. 한편 49세의 어재연(魚在淵)을 진무중군(鎭撫中軍; 해상경계 부대의 전투지휘관)으로 임명하여 강화도로 파견하였고 서울에 있는 각 영(營)으로부터 군대를 차출하면서 대포·화약·군량미를 수송했다.
14일 오후 로저스는 블레익 중령으로 하여금 군함 2척을 거느리고 강화도 염하(鹽河) 일대를 측량하게 했는데 이들이 손돌목을 지날 때 연안을 경비하고 있던 조선 포대가 포격을 가했다. 이에 미군은 조선군의 경고용 포격을 오히려 미국 국기에 대한 모독으로 규정하고 조선 정부에 사과와 손해배상을 요구하였다. 미국 군함은 일단 후퇴하면서 2~3일 안으로 대신(大臣)으로 구성된 교섭사절이 오지 않으면 무력으로 공격하겠다고 통고하였다. 아무런 회답이 없자 로우는 무력을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4월 23일부터 블레익 중령 지휘 하의 두 척의 군함을 강화해협으로 들여보내 엄호포격을 가하면서 450명 정도의 육전대를 동원, 초지진과 덕진진을 함락시키고 강화 수로의 으뜸가는 요새인 광성진에 육박하였다. 24일 낮이었다.
당시 강화도에 배치된 조선군의 총 병력은 3천 명 정도였고 그 중 광성진에는 진무중군 어 재연이 지휘하는 조선군 600여 명이 수비하고 있었다. 조선군은 병력 수는 더 많았지만 무기의 성능은 사정거리, 명중률, 파괴력 등의 모든 면에서 미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전술 면에서도 그러하였다.
쌍방의 전투가 개시되자마자 우리 측 수비군은 미군 측으로부터 수륙 양면으로 협공을 당하여 고전하였다. 우리의 대완구 포와 화승총은 적군의 함포 사격 앞에 거의 쓸모가 없었다. 성벽이 무너지면 그 곳으로 적의 육전대가 돌격해 들어와 힘겨운 백병전이 벌어졌다. 조선군은 무기가 떨어지면 돌을 던지고 흙을 뿌리면서 끝까지 적수공권으로 혈전 사투를 벌였다. 호랑이를 잘 잡았던 강계 포수들도 미군의 함포와 기관총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더 싸울 수 없게 된 병사들은 포로 되기를 거부하고 바다로 뛰어들어 익사하였다.
미군 측 기록을 보면 처참했던 광성진의 전투에서 조선군의 피해는 다음과 같다. 성안에서의 전사자 100명 정도, 성 밖에서의 전사자가 243명, 백병전에서 피살 또는 투신자살이 100여 명, 부상당한 포로가 20명이었다. 미군 측 피해는 백병전에서 아군의 창에 찔려 죽은 맥키 중위 등 전사자 3명, 부상자가 10명 정도에 불과했다. 맥키 중위는 미 해사 출신의 첫 전사자였는데 아나폴리스 미 해군 사관학교 교회 앞에 그의 추념비가 서 있다.
전투가 끝난 뒤 광성진 손돌목 돈대에 높이 휘날리던 ‘장수 수(帥)’자가 새겨진 황색 깃발(수자기:帥字旗-조선군 사령관 기)이 내려지고 그 대신 성조기가 걸렸다. 이 수자기를 비롯한 50개의 군기와 대포 481문은 현재 미국 미 해사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미 해군 사상 첫 사진반이 승선하였기 때문에 그 당시의 전투상황이 사진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미 해군 측 기록에는 광성진 전투를 가리켜 미군 전사에서 최단기 ‘48시간 전쟁’이라고 부르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 전투가 우리 미군의 승리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도 그다지 자랑할 것이 못 되었고 누구 한 사람 기억에 남겨두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로우와 로저스는 당시 대규모의 침략전쟁을 감행할 수 있는 병력을 보유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대규모 군사행동을 한다는 것은 본국으로부터 받은 훈령 밖의 일이었다. 그래서 미군 측은 5월 15일, 조선 정부에 공문을 보내 외교교섭의 책임을 갖고 있는 특파대원의 접견을 거절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비난한 후 조선과의 통상이라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5월 16일(양력 7월 3일) 철수해 갔다.
이 전투에서 근대식 무기로 무장한 미군에 맞서 사력을 다해 싸우다가 죽어간, 재래식 무장을 한 조선 수비군 장병들의 군인정신과 용기는 우리 군의 정신전력 측면에서 오래도록 진한 감동을 남겨 주고 있다. 뒷날 이 전투에 참가했던 한 미군 장교는 “조선의 수비병은 아무런 두려움이 없이 호랑이처럼 용감하게 싸우면서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다가 죽어갔다. 민족과 국가를 위해 이보다 더 장렬하게 싸운 군인들을 다시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라고 적었다.
지금 광성진에는 당시 조선군을 지휘하다가 전사한 어재연과 선비이면서도 스스로 전투에 참가한 동생 어재순 형제의 지극한 충성심을 기리기 위한 ‘쌍충비’가 서 있고 그 아래로는 전사한 병사들의 시신을 모신 ‘신미순의총’이 말없이 자리하고 있다. 이 묘들은 당시 미군들이 철수해 가면서 삽으로 53구의 시신을 7개의 봉분으로 묻으면서 북두칠성처럼 만든 것이다. 광성진의 이 무명용사 묘는 실로 우리 ‘군인정신의 메카’라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우리는 신미양요의 역사에서 뼈저린 교훈을 배워야 할 것이다. 일본은 서양함포의 위력을 맛보기 전에 문을 열었고 중국은 그 위력을 맛 본 후에 문을 열었다.
대원군은 미국 함대가 스스로 철수해 갔으니, 우리가 이긴 것으로 간주하고 더욱 문을 굳게 닫고서 전국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는데 열중하였다. 이로 인해 조선의 근대화만 늦어지고 말았다. 만약 조선이 신미양요의 승리(?)를 자주적 문호개방의 계기로 삼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물론 대원군 자신은 누구보다 이 나라를 사랑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이처럼 중요한 시기에 이렇게 까지 국제정세를 착각할 수 있었는가?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대원군보다 더 현명하다고 할 수 있는가?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는 한반도 주변정세 변동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 우리는 신미양요의 교훈에서 귀한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다. (konas)
김지욱(성우회 정책연구실장 jeewoo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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