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정권의 비현실적 대북인식이 문제
경의선·동해선 열차 시험운행을 하루 앞두고 북한이 24일 전격적으로 이를 무산시킴에 따라, 정책 담당자들의 얼굴을 무색케 함은 물론, 북한의 이 같은 결정 배경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아울러, 6월 말로 예정된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육로 방문이 실현될지도 관심거리다. 특히 북한의 조치가 앞으로 남북관계와 한반도 정세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분석가들은 ‘군부 개입’ 가능성을 거론하기도 하지만 ‘국방위원장’ 직함을 가지고도 당·군·각료 등 체제 전체를 1인 통치할 수 있는 곳이 북한이다. 군부의 영향력을 쉽게 언급할 단계가 아니다. 의사결정 과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불규칙성은 김정일 개인에서 비롯된 것으로 봐야 한다. 이번 사건은 2000년 6월, 정상회담을 불과 며칠 앞두고 북한 당국이 취했던, 국제관례상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회담 일정의 일방적 연기 조치를 연상시킨다. 이러한 돌변사태에 당황해한다면, 이는 북한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소치일 것이다. 언제라도 이해득실에 따라 합의 번복과 약속 위반을 감행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 온 북한 정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민족끼리’라는 이름 아래 북한 정권을 ‘합리적이고 믿을 수 있는 상대’로 간주, 끊임없는 신뢰를 보내 온 DJ-노무현 정부의 현실 인식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전후 사정을 보아, 북한이 열차 운행을 불허한 것은 결코 전격적인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심사숙고한 결과로 보아야 한다. 며칠 전 장성급회담에서 서해 북방한계선(NLL) 재설정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데다가 열차 운행이 자칫 체제 개방 효과를 가져올지 모른다는 경계도 있었을 것이다. 우려되는 것은 이번 조치가 보다 큰 것을 얻어내려는 북측의 협상전술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지난 DJ-노무현 정권 8년 동안 북한에 대한 ‘비현실적’ 인식, 곧 북한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희망적 사고(wishful thinking)’에 입각하여 북한을 바라보고 대북정책을 수행해 온 결과가 우리 사회 내에 참담한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과 6·15공동선언은 남한 사회에 파탄에 가까운 대북인식·정책상의 분열과 혼돈을 야기시켰다. 그리고 한미동맹을 결정적으로 균열되게 함은 물론 한국 정부와 국민을 국제적으로 한없이 고립되게 했다.
그럼에도 노무현 정부의 대북 유화(宥和)정책 기조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고, 최근에는 오히려 남북관계에 어떤 돌파구 내지 승부수 같은 것을 던지려는 자세마저 감지되고 있다. 지난 5월 9일 노 대통령의 몽골 발언에 이은 정부 고위관계자들의 일련의 언급은 이런 메시지를 국내외에 던지기에 충분하다. 어제는 대통령 자문 동북아시대위원장이 6자회담과 관련, “판을 흔들어 돌파해야 한다”는 발언을 했다.
특히 ‘조건없는 제도적·물질적 지원’을 언급한 노 대통령의 몽골 발언을 환기시키며, 이미 정부가 ‘판흔들기’에 들어갔다고 설명까지 했다. 그동안 추정돼 온, ‘민족공조’ 토대의 대북 독자노선 추진이 사실로 확인된 것이다.
이제 노 정부는 그동안 대북지원의 걸림돌로 여겨왔던 ‘북핵 선결’과 한미 공조의 ‘멍에’를 벗어던질 기세다. 그리하여 DJ의 방북을 기회삼아 극적인 ‘통일 환상’과 선전 효과를 국민에게 던지면서, 자유롭게 그러나 무모하고 위험한 한반도 안보 구도 ‘새 판짜기’ 실험에 들어가려 하고 있다. 여기에 NLL 재설정, 평화 체제 수립, 합의통일 논의 등 자유민주 체제 대한민국의 국가적 근간을 흔들 수 있는 어젠다가 다수 포함돼 있다. 그러나 그 후 밀어닥칠 위험과 혼란을 어떻게 감당하려는 것인지는 충분한 설명이 나오지 않고 있다. (문화일보, 06, 5, 25)
홍관희 / 안보전략연구소장 (http://www.khho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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