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과 대한민국, 李承晩 박사
세월은 빨라서 2006년도 하반기에 들어서 벌써 8월이다. 우리는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돼 그로부터 만 3년만인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이 만방에 선포되는 감격을 맞았다.
대한민국 건국 곧 대한독립의 중심 인물이 우남 이승만 박사님을 우리는 잘 알고 그분을 높인다. 그러나 이 박사는 1960년 3월 15일 실시한 제4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 박사 측근이 당선 가망이 없는 이기붕 국회의장의 부통령 당선을 위해 전무후무한 부정선거를 했기에 그 책임을 지고 하야하는 불명예를 맞았다. 그로 인해 그 분의 크나 큰 공마저 가려지고 있음이 안타깝다.
광복 61주년과 건국 58주년을 맞이해 국토의 반은 아직도 공산주의 일당 독재하에, 북한 전체가 인권 사각지대로 모든 자유가 박탈되었으며 독재자 김정일과 그 일당만 배불리 먹고 그 백성은 굶어 죽고 얼어 죽고 살기 위해 사선을 뚫고 국경을 넘어 중국 땅에서도 숨어 살고 있음은 인류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상황에 비춰 볼 때 우리 조상의 못남과 일제 침략으로 지구상에서 없어졌던 대한제국을 되살려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기초를 만세 반석과 같이 튼튼히 놓았으며 민족반역자 김일성의 6·25 불법 남침을 물리치고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자유 대한을 물려 준 이 박사의 크나 큰 공을 잊어서는 안 되리라 생각한다.
세종대왕의 형님인 양녕대군의 16대 손자인 그 분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13살 어린 나이에 벌써 과거에 응시할 정도였으며 미국의 아이비리그인 하버드와 프린스턴에서 그 옛날에 석사, 박사 학위를 받은 수재였다. 그분의 동서양 학문에 통달한 실력, 해박한 정치 감각과 선견지명 그리고 카리스마적 지도력이 있었기에 해방 직후의 혼란기에 당시 소련의 흉계도, 미군정의 무지와 비협조도 이길 수 있었고 국내 다양한 정치세력도 잘 조정하여 신생 대한민국의 탄생을 가져 왔던 것이다.
특별히 6·25 동란이 그분과 우리 국민의 염원인 남북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휴전 협정으로 종결되려 할 때 그 분은 북진통일을 외쳤으며 또한 3만7,000여 명의 반공포로를 독단적으로 석방함으로써 온 세계를 놀라게 한 대정치가였다. 그리고 호전적인 공산주의자들의 재도발을 예견했기에 당시의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설득하여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이끌어낸 것이다.
이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있기에 동방의 작은 나라지만 국제적 신임을 받게 되었고 외자도 유치할 수 있었다. 또한 이 박사의 교육정책이 전 국민의 교육 수준을 높였고 고급 두뇌를 우대했기에 오늘날의 조선(造船) 최강국, IT선진국임과 동시에 세계 10대 경제대국의 대열에 설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음을 알아야겠다.
그 분은 41년 전인 1965년 7월 19일에 몽매에도 그리던 고국에 돌아오지도 못하고 하와이에서 세상을 떠났지만 그 분의 미국 망명 33년 동안 이 넓은 미국땅을 그 옛날 그 불편한 교통수단으로 하와이, 덴버, 워싱턴, 뉴욕,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엔젤레스 등 동분서주하던 곳에서 우리는 잘 살고 있다.
새 달 8월을 맞아 우리 대한민국을 세웠고 우리에게 물려준 이승만 박사의 은혜와 크나 큰 공로를 잊어서는 안 되리라. 그리하여 그분의 귀국 제일성이던“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니다”고 하신 그 말씀 따라 대동단결하여 애국애족의 대열에 굳게 서서 부강한 대한민국을 우리 후손에게 물려줘야겠다. (Konas) (출처 : http://www.freedomkorea.org)
여경호 (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 시애틀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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