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옥의 죽음'에 대한 통일부장관의 '弔電'은 옳은 것인가?
8월21일자 신문들은 한 건의 북한으로부터의 부고(訃告)를 전했다. 임동옥(林東玉)이 사망했다는 소식이다. 임동옥은 남북회담 종사자들에게는 오래 동안 알려진 인물이다. 남북대화는 1971년9월 판문점에서 ‘남북적십자회담 예비회담’이 열리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임동옥은 이때부터 남북대화에 참여한 북측 인물이다. 그러나 그때의 임동옥은 임동옥이 아니었다. 초기의 남북대화에 참가했던 북측 인물들 가운데는 ‘가명’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백남순’(초기 남북적십자회담 자문위원ㆍ남북고위급회담 정치분과위원장으로 필자의 상대역ㆍ현 북한 외무상)은 ‘백남준’이, ‘안경호’(‘조국펑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겸 서기국장ㆍ90년대 ‘남북고위급회담’ 대표 겸 대변인으로 필자의 상대역)는 ‘안병수’가, ‘전금진’(최고인민회의 대의원ㆍ남북조절위원회 대변인으로 필자의 상대역)은 ‘전금철’이 당시 각기 사용한 그들의 ‘가명’이었다. 임동옥의 경우도 그 당시는 ‘임춘길’(林春吉)이라는 ‘가명’을 사용했었다.
남북대화에 참가했던 북측 인물 모두가 ‘가명’을 사용했던 것은 아니다. 남북대화 초기 북측 참여 인물들은 크게 보아 2개의 부류로 대별되었었다. 하나의 부류는 말하자면 ‘백색 인물’들, 즉 명실 공히 ‘대표’들이었다. 이들은 대체로 그때도 ‘본명’을 사용했다. 또 하나의 부류는 ‘흑색 인물’들, 즉 ‘대남공작 요원’들로 이들은 대체로 ‘가명’을 사용했다. 그런데, 북측의 경우 ‘본명’을 사용하는 ‘백색 인물’들은 실제로는 ‘얼굴 마담’들이고 북측 대표단의 ‘실세’(實勢)는 통상 ‘가명’을 사용하는 ‘흑색 인물’들이었다. 남북대화에 참가하는 북측 인물 가운데 ‘흑색 인물’들이 ‘가명’을 사용하는 작태는 1998년 남한에서 김대중(金大中) 정권이 등장하면서 슬그머니 사라졌다. 그 뒤로는 이들도 남북대화의 자리에 나올 경우 ‘가명’이 아닌 ‘본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남쪽의 김대중 정권 등장 이후 어째서 남북대화 현장에서 ‘가명’ 사용을 고집하던 과거의 관행을 바꾸었는가? 그 이유는 지금도 풀어지지 않는 미궁(迷宮)이다.
남북대화 초기 ‘임춘길’인 임동옥은 ‘기자’ 신분으로 남북대화에 참가했다. 당시 북측 ‘기자’들은 말이 ‘기자’지 실제로는 ‘기사’를 쓰는 ‘기자’가 아니었다. ‘기사’는 이들이 쓰지 않고 ‘조선노동당 문화부’에서 북한에서 발간되는 신문(‘노동신문’ㆍ‘민주조선’ 등)과 방송(‘조선중앙방송’ㆍ‘평양방송’ 등) 및 통신(‘조선중앙통신’)의 특성에 맞게 작성하여 ‘공급’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남북대화 현장에 나오는 북측 ‘기자’들의 ‘임무’는 무엇인가? 이들의 임무는 남쪽에 대한 ‘정보’ 수집과 ‘공작’ 수행에 더하여 북측 대표단에 대한 ‘감시’ 역할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 임무 가운데는 남측 ‘기자’들을 상대로 하는 ‘정보’ 수집과 남측 대표단, 그 가운데서도 ‘기자회견’을 기회로 활용한 정치적 질문공세와 논쟁으로 남측 대표단의 ‘대변인’들의 기를 꺾고 이들을 ‘골탕’ 먹이는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1980년 2월부터 8월까지 남북간에는 판문점에서 열 차례의 ‘남북 총리간 대화를 위한 실무대표 접촉’이 열렸다. 임동옥은 이 접촉에 나온 북측 대표 세 사람 중의 하나였다. 단장은 ‘현준극,’ 대표는 ‘백준현’과 ‘임춘길’(임동옥). 이들은 ‘현준극’이 ‘조선노동당 부부장’ 겸 ‘정무원 참사,’ ‘백준현’과 ‘임춘길’이 각기 ‘정무원 국장’이라는 ‘직함’을 사용했다. 남측 대표단은 수석대표가 김영주 대사, 대표는 정종식 통일원 정책기획실장 및 필자(남북대화 사무국장)였다. 이때부터 임동옥의 특이한 ‘역할’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는 북측 대표단의 ‘말석 대표’였지만 실제로는 현준극 단장의 일거수일투족을 ‘지휘ㆍ조종’하고 있었다.
그 뒤 임동옥이 다시 남측의 ‘시야’(視野)에 들어 온 것은 1990년10월 서동권(徐東權)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약칭 ‘안기부’) 부장이 김우중(金宇中) 당시 대우그룹 회장의 주선으로 평양을 방문했을 때였다. 이때 임동옥은 김일성(金日成)ㆍ김정일(金正日) 부자가 함께 서 부장을 만난 자리에 배석했다. 그리고 그 뒤 남쪽의 대북 안테나에는 임동옥이 북의 ‘조선노동당 통일전선부’의 ‘실력자’로 사실상 북한의 ‘대남 공작’ 전반을 조종ㆍ통제하고 있는 인물로 줄곧 포착되기 시작했다.
필자는 1991년부터 1993년까지 남측 대표단의 대표 및 대변인으로 ‘남북고위급회담’에 참가하여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남북 공동선언’(‘비핵화선언’)를 생산하는 데 참여했다. 이 회담에 임동옥은 북측 대표단의 ‘수행원’의 한 사람으로 참가했지만 필자의 느낌으로는 그야말로 북측 대표단의 단장이었던 연형묵(당시 정무원 총리)을 원격 조종하는 막후의 실력자였다. 1997년에 남으로 넘어 온 황장엽(黃壯燁) 전 조선노동당 비서의 증언에 의하면 임동옥은 이미 이때 김정일의 절대적 신임 하에 북한의 대남 공작을 총괄하는 ‘조선노동당 통일전선부’를 그의 손아귀 속에 넣고 있었다.
2000년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여 김정일과 회담하고 6.15 ‘남북공동선언’을 만들어서 발표할 때 임동옥은 김정일의 대남정책에 관한 ‘오른 팔’이었다. 그는 김대중ㆍ김정일 회담에 줄곧 배석했고 그 뒤로는 남쪽에서 국가정보원 원장ㆍ통일부 장관으로 김대중 대통령의 대북정책을 맡아서 수행했던 임동원(林東源) 씨의 북측 상대역이었으며 남쪽의 정권이 노무현(盧武鉉) 정권으로 바뀐 뒤에는 정동영(鄭東泳)으로부터 이종석(李鍾奭)으로 악수 교대가 이루어진 남측 통일부 장관들의 북측 상대역이었다. 어느 사이에 남측의 언론들은 그가 북한 조선노동당의 통일전선부 ‘부부장’을 거쳐 ‘부장’으로 승진된 것으로 보도하고 있었다. 작년 8.15 때 김기남 조선노동당 비서 등과 함께 서울을 방문한 그는 북측 대표단 31명과 함께 동작동 국립묘지를 ‘방문’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볼 때 70세를 1기로 생을 마감한 임동옥은 2개의 얼굴을 가졌던 인물이었다. ‘지킬’ 박사로서의 얼굴과 ‘하이드’로서의 얼굴이다. 임동옥의 사망 소식에 접한 노무현 정권의 이종석 통일부장관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조전’(弔電)을 북측에 보냈다는 소식을 언론이 전하고 있다. 임동옥을 ‘지킬’ 박사로 보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생전의 임동옥은 시종일관 ‘하이드’의 입장에서 대남사업에 종사해 온 인물이다. 그는 그의 평생을 “남조선을 적화”시키고 이를 통해 “공산화 통일”을 이룩하는 데 바친 인물이다. 김일성ㆍ김정일을 정점(頂点)으로 하는 소위 북한판 ‘수령독재’의 하수인으로 북한의 ‘개혁ㆍ개방’을 완강하게 저지하면서 이른바 ‘민족공조’ 논리를 앞세워 남한을 ‘용공’ 내지 ‘연공’ 체제로 변질시키고 ‘한미동맹’을 와해시켜 ‘주한미군’ 철수를 관철시키는 수단으로 ‘남북대화’를 이용하는 데 평생을 바친 인물인 것이다.
그는 북한의 적화(赤化) 통일노선인 소위 ‘남조선 통일과 조국통일’의 화신(化身)이었다. 2000년의 6.15 ‘남북공동선언’은 사실은 ‘임동옥의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 통해 그는 “남조선을 사실상 ‘적화’시켰으면서 아직 ‘적화’ 통일만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를 이룩해 놓고 이제 그의 생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그가 이끌던 ‘조선노동당 통일전선부’는 지난 5.31 지방선거 때 외곽단체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보도기관들을 총동원하여 “이번 5.31 지방선거에서 ‘평화진보세력’(열린우리당)이 ‘친미보수세력’(한나라당)에게 자기의 陣地를 내어주면 다음 해 대통령선거에서 더 큰 것을 잃게 된다”면서 “그렇게 되면, 오늘의 6.15는 날아가고 평양-서울로 오가는 길, 금강산 관광 길은 막히게 되고 개성공업지구 건설도 전면 중단되며 온 나라는 戰爭의 火焰 속에 휩싸이게 될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남한의 유권자들을 협박ㆍ공갈하는 것을 서슴치 않았었다.
그러나, 남측의 5.31 지방선거 결과는 ‘한나라당 완승ㆍ열린우리당 몰패’였다. 여기에는 “남한의 정권이 좌경화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유권자들은 좌경화를 거부한다”는 남한 유권자들의 강력한 메시지가 담겨져 있었다. 이 같은 시점에서 이 나라의 통일부장관이 “임동옥의 죽음을 애도하는 조전”을 보냈다. 과연 그렇게 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필자는 대한민국의 뜻있는 많은 국민들이 함께 생각할 화두(話頭)의 하나로 이 의문을 던진다. 우리는 ‘지킬’ 박사의 ‘얼굴’로 우리 앞에 나서는 그의 ‘머리’와 ‘가슴’은 ‘하이드’의 그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평화적 분단관리’라는 ‘필요악’의 차원에서 상대하는 ‘현실적 선택’을 해야 했었다. 그러나 그 같은 우리의 ‘현실적 선택’은 그를 상대해 주는 것으로 족한 것은 아니었을까? 2천3백만 북한동포들의 고통을 가슴 앞아 하는 우리의 입장에서 우리를 대표하는 정부가 ‘하이드’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을 “그래도 좋다”고 묵과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끝]
李東馥 (前 국회의원/북한민주화포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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