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국가 정통성(legitimacy)
Written by. 홍관희
입력 : 2006-09-04 오전 10:10:00
I. 序 言
제2차 세계대전 종결 이후, 한민족(韓民族)은 타의에 의한 해방을 맞이했다. 일본이 연합군에 패망함으로써 일제(日帝)의 식민통치가 막을 내린 것이다. 이에 따라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미·소 양국 군대가 북위 38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남북에 각각 진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것이 반세기가 넘는 국토와 민족의 분단을 가져오는 계기가 된다.
이후 소련은 동아시아에 대한 팽창정책의 일환으로 북한을 위성 기지화하고, 한반도 공산화 작업에 착수했다. 미국은 당초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하기 위해 남한에 군대를 파견했으나, 점차 소련의 팽창정책과 중국대륙의 공산화에 맞서기 위해 자유진영을 수호하는 ‘전선(front line)’으로서의 남한의 중요한 역할을 인식하게 되었다.
해방 이후 남한의 정치 공간은 소련의 지원과 조종을 받는 공산·좌파 세력과 한반도 적화(赤化)기도에 대항하여 자유민주 정부를 수립하려는 자유·보수 세력 간 처절한 대결의 장(場)으로 변모하였다.
이어, 북한에 소련의 지원을 받는 김일성 공산체제가 수립되고, 남한에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하면서, 남북 간 좌우 냉전 대립이 배태(胚胎)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분단 이후 한반도 역사는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남북 간 체제 경쟁 곧 정통성의 경쟁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현상은 6·25 남침에 의한 ‘동족상잔(同族相殘)’을 겪으며, 남북 상호불신과 적대관계의 증대를 통해 더욱 심화되어왔다.
자유민주체제·자유시장경제의 정착과 발전, 그리고 세계시장에의 적극적인 진출에 힘입어 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의 경제발전국가 그룹에 진입했으며, 남북 간 체제경쟁은 1990년대 이후 사실상 종언(終焉)을 고했다. 그리고 북한은 체제 붕괴의 위기에 직면하게 됐다.
그러나, 1998년 김대중 정부가 집권하고 2003년 노무현 정권이 이를 계승함에 따라, 대한민국은 전혀 예상치 않았던 국가 정체성과 정통성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김대중·노무현 양 정권이 ‘햇볕정책’ ‘남북 화해·협력 정책’을 추진, 북한 정권 지지 노선을 일관되게 시행함으로써, 김정일 공산 독재의 대남전략이 강화되고, 군사력이 증강되며, 특히 북한 정권에 호응하는 남한 내 친북·좌파 세력이 득세하였기 때문이다. 현재 대한민국은 유례 없는 국가적 위기에 처해 있다. 과연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인지는 한민족과 대한민국의 장래를 가름하는 중요한 분수령이 될 것이다.
II. 대한민국의 이념적 정체성(ideological identity)
해방 정국의 극도의 혼란 속에서 이승만(李承晩)은 1946년 6월 ‘정읍 발언’을 통해 “남쪽만이라도 임시정부나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선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천명하였다. 이로써 혼돈의 해방 정국을 마감하고 건국(建國)을 향해 첫 걸음을 내디딜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이 이미 북한 지역을 점령하고 있는 상황에서, ‘통일 정부’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구호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승만은 남한 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시급하고 불가피하다는 것을 역설한 것이다.
이에 따라 남한은 제헌(制憲) 국회를 통해 자유민주 헌법을 제정·공포하고, 헌법이 定한 합법적 절차에 따라 1948년 8월 15일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와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근간으로 하고 ‘주권재민(主權在民)’을 원칙으로 하는 ‘민주공화국’을 수립·선포하였다. 이후 UN의 승인과 동시에 세계 자유체제 질서 속에 편입되어, 경제발전에 성공·번영하는 국가로서 국제사회의 중요한 일원으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 체제를 근본으로 한 건국이념에서 나온다고 볼 수 있다. 곧 자유민주주의·자유시장경제는 대한민국의 국가 이념인 동시에 국가의 이념적 정체성(ideological identity)의 원천인 것이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자율(自律)을 통해 인간이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고, 또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보는 이념이다. 여기에 국민의 정치 참여를 기초로 하는 민주주의가 결합되어 자유민주주의가 현대정치에 출현했다. 그럼에도 자유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대의제(代議制)이며 간접민주정치를 표방한다. 인민민주주의, 민중민주주의, 직접민주정치와 구별된다. 또한 법치주의를 근간으로 하며, 법 앞의 절차적 평등(procedural equality) 곧 기회의 평등을 강조한다. 사회주의·공산주의가 표방하는 결과의 평등(substantial equality)이나, 인위적 평등을 거부한다. 한편 자유시장경제는 자유 시장의 자발적인 생성과 운용을 모토로 한다. 그리고 개인의 사유재산권과 경제활동의 자유 보장을 원칙으로 한다. ‘경제적 민주주의’ 이름 하에 분배와 평등을 강조하는 사회주의적 이념과 구별된다.
대한민국의 이러한 이념적 정체성(正體性)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와 ‘자유민주 통일’을 규정한 헌법 전문(前文) 및 각 해당 조항에 명문화되어 있다.
III. 한반도 유일(唯一) 합법 권력으로서의 정통성(legitimacy)
한반도 유일 합법 권력으로서의 대한민국의 정통성(正統性)은 상기 언급한 이념적 정체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자유민주주의·자유시장경제가 공산독재체제 보다 인간을 보다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이 이념을 선택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강화해 준다.
정부 수립과정에서 나타난 헌정(憲政) 절차의 합법성도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강화해 주는 요인이다. UN은 남북한 총선거에 의한 통일 정부 수립을 결의하였으나, 북한은 이를 거부하였고 남한 정부만이 UN의 승인을 얻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북한 정권은 어디까지나 한반도 북부를 점령하고 있는 불법 집단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헌법 제3조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명시하고 있고, 제4조는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헌법 제3조 ‘영토 조항’은 대한민국만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이며, 북한당국을 反국가단체로 규정지음으로써, 국가보안법의 헌법적 근거조항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헌법 제3조는 ‘국가 정통성의 핵심’이며, 바로 이 조항에 의해 북한과 대등한 입장에서 추구하는 ‘연방제’ 또는 ‘연합제’ 기도는 위헌(違憲)이 된다.
더욱이 이 영토 조항을 개정하거나 폐지한다면 (i)‘북한주민’을 외국인으로 간주하게 돼 탈북민을 보호할 명분과 근거를 잃게 되고 (ii)北 붕괴 시 북한지역에 대한민국이 개입할 권리를 상실하게 된다.
정통성의 개념은 국가 이념의 타당성, 건국과정에서 나타난 도덕성·합법성 외에 이후 통치과정에서 획득되는 효율성에 의해 영향을 받을 것이다. 예컨대, 정부 수립과정에서 합법성을 획득하였다 해도, 이후 국가발전과 국민복리 증진에 실패하였다면, 정통성의 위기에 봉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건국 이후 높은 통치 효율을 통해 국가 정통성이 보다 강화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IV. 6·25를 통한 정통성 강화
남한에 자유민주주의·자유시장경제를 국시로 하는 단독 자유민주정부 곧 대한민국이 출범한 이후 2년이 채 못되어 일어난 6·25 동란(動亂)은 남북 좌우 이념대결의 폭발이자 세계적 좌우 냉전이 열전화(熱戰化)한 일대 사건이었다.
6·25 사변을 보는 상호 대립되는 두 시각이 존재하는 바, 이는 남북 간 정통성 논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먼저, ‘전통주의(傳統主義)’ 시각인데, 이는 2차 대전 이후 소련의 공격적이고 팽창주의적 대외정책이 미국의 단호한 반응을 불러 일으켰고, 이로부터 냉전이 확대되었다고 본다. 이것이 결국 한국전쟁을 가져온 원인(原因)이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미국이 1949년 여름 주한미군을 철수하고 남한을 극동방위선에서 제외시키며 1950년 5월 30일 제2대 민의원 선거에서 우익·보수 세력이 패배하게 되자, 스탈린·김일성 라인에서 남한 침공을 결행한 것으로 파악한다. 이러한 사실은 역사적 자료를 통해 사실로 입증되고 있다.
다음은 ‘수정주의(修正主義)’ 시각인데, 이는 냉전의 책임이 1차적으로 미국의 ‘제국주의적인 대외정책’으로부터 나왔다고 해석한다. 미국이 소련보다 우세한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세계를 ‘지배’하려 함에 따라, 소련이 불가피하게 이에 대응하게 되고 그 결과 냉전이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미국이 제국주의적 정책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남한정부를 교사하여 6·25 전단(戰端)을 열었다고 주장한다. 지난 해 논란 많았던 강정구 류(類)의 역사 해석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후일 역사적 근거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고 있다.
수정주의자들은 종래의 국제정치 틀 속에서 한국전쟁을 바라보던 시각을 비판하고, ‘한반도의 내부적 갈등’ 차원에서 6·25 전쟁의 기원을 찾으려 시도하였다. 곧 6·25는 한국근대사의 사회경제적 모순 속에서 배태되어 항일독립운동 기간을 거쳐 해방 이후 가시화된 좌우 이념대결이 내전의 한 형태로 발발(勃發)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특히 수정주의적 시각을 따르는 좌파 학자들은 한국전쟁이 ‘내전’이란 전제하에 일종의 ‘인민해방전쟁’ 또는 ‘민족해방전쟁’이며, ‘북침’ 또는 ‘남침’ 논쟁은 그 자체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해방 이후, 한반도에 2개의 이념적으로 이질적인 정치체제 곧 자유민주체제와 공산체제가 출현하여, 남북 각 체제가 상대 체제를 자신에게 흡수·통합하려고 노력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단, 전쟁을 통한 무력통일을 기도한 것은 북한임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6·25 전쟁은 대한민국의 정통성 강화를 가져다 준 계기가 되었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폭정과 만행을 체험한 이후, 대한민국은 反共이데올로기의 강화, 반공 이데올로기의 全사회적 수용, 그리고 자유·보수 세력이 지배그룹으로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3·8선이 휴전선으로 대체되고 남북 간 대결 및 분단의 장기화·고착화 현상이 나타나면서, 남북 간 체제경쟁이 가속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미 동맹의 성립은 대한민국 국가안보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V. ‘4·19 민주혁명’과 ‘5·16 군사혁명’ 이후의 국가 정통성 문제
1960년 4·19 민주혁명 이후 6월의 헌법 채택과 7월 29일 총선거를 거쳐, 8월에 장면정부가 출범하였다. 1961년 5·16 군사혁명이 성공하기까지 단명(短命)했던 민주당 정권은 反민주세력의 처벌 등 ‘개혁’ 조치를 시도하였으나, 집권세력의 분열(신·구파)과 우유부단한 조치로 급격히 약화되었다. 국가 권력기구에 대한 통제 약화와 좌파의 소요(騷擾)로 국론이 크게 분열되었고, 오히려 민주주의가 후퇴되는 현상을 가져왔다. 결국, 좌·우 분열은 정쟁의 심화로 이어지고, 정부의 우유부단과 결부되어 무질서 상황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민여론은 결단력 있고 강력한 정부를 기원하는 방향으로 바뀌어갔다.
아울러 사회 각계각층으로부터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온 요구와 기대의 분출은 ‘권력의 집중화’ 필요를 절감하게 되었다. 혁명적 열기를 제도화된 질서로 흡수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통제에 바탕을 둔 개혁정치가 필요하였으나, 장면정부는 이러한 능력을 결여하였다.
결국, 민주주의 실험 1년 미만에 5·16 군사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4·19혁명은 자유민주주의적 정치이념에 입각한 ‘시민혁명’에 의한 장기 부패 정권의 타도에 의미가 있다. 4·19혁명은 이후 한국정치의 이념적 틀을 ‘정치적 자유민주주의’와 ‘장기 독재’의 양분 논리로 정형화시켰다.
그러나, 5·16 이후의 사건 전개를 통해, 국민들은 단순히 ‘자유’ 대 ‘독재’라는 단순한 구도보다는 국가발전 개념의 도입을 목도(目睹)하였다. ‘국가안보’와 ‘경제발전’, 그리고 그에 따른 ‘자유의 한계’ 등의 논쟁이 현실 문제로 국민 앞에 나타난 것이다. 곧 1960년대 이후 한국정치의 주안점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안보, 경제발전 등으로 압축되게 되었다.
그렇다면 ‘5·16’은 ‘혁명’인가 ‘쿠데타’인가? 이는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관련된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논쟁점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정체성(正體性)과 정통성(正統性)을 부정하는 많은 친북·좌익 세력이 이승만의 건국과정과 박정희의 5·16혁명을 근원적으로 부정하고, 특히 박정희 대통령을 ‘친일(親日)’로 매도하여 이후의 역사를 송두리째 부정하려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혁명은 과거 권력의 정통성(legitimacy)을 붕괴시키고, 새로운 정통성을 창출함에 따라, 그 정통성의 공인(公認) 문제가 제기된다. 그러므로 혁명의 공인 여부는 혁명 이후 행사된 통치의 효율성 여하에 따라 크게 영향 받는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2공화국은 합법성은 인정되나 효율성 면에서 뒤떨어져 불완전한 정통성을 보유한다고 평가할 수 있고, 5·16 이후의 3공화국은 정권창출의 합법성은 결여되었으나, 이후 나라를 성과 있게 다스렸다는 점에서 효율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박정희 정부는 ‘5·16’의 취약한 ‘민주적 정통성’을 경제발전이 가져다 준 ‘효율성’에 의해 보완하고, 정통성을 획득해 갔다는 점이 특징이다. 한국사상 전례 없는 국력발전의 성과와 업적에 힘입어, 박정희 정부는 집권 수년 내 상당한 정도의 국민적 지지를 획득함으로써, 정통성을 어느 정도 회복하는 결과를 가져 온 것으로 분석된다. 예컨대 1967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는 윤보선 후보에 51.4% 대 41%로 낙승하였는 바, 이는 1963년 박 후보가 윤 후보에 46.65% 대 43%로 신승하였던 것과 크게 대조된다. 박정희 정부에 대한 국민적 지지가 크게 상승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1972년 ‘유신’ 체제의 선포는 민주주의에의 도전으로 인식되면서, 제3공화국 정통성을 크게 훼손하는 요인이 되었다. 유신 통치 이후의 ‘효율성’과 정통성 문제는 향후 좀 더 심층적 고찰과 평가를 要하는 부분이다.
VI. 結 語
돌이켜 볼 때 이승만대통령이 해방 정국에서 보인 자유이념에의 헌신과 건국과정에서 발휘한 탁월한 지도력은 대한민국 건국과 정통성 확보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후일 장기집권과 부정·부패는 그의 공헌을 크게 감소시킨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의 공로가 본질적으로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군사혁명으로 집권한 박정희대통령의 국가발전 공로 역시 지대(至大)한 것이다. 60년대 초 빈한(貧寒)한 농업국가에서 오늘날 세계 유수(有數)의 경제부국으로 발전시킨 공로가 그에게로 돌려져야 한다. 그러나 그 역시 후일 장기 독재로 그의 공헌이 반감(半減)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의 공적이 근본적으로 부정되어서는 안 된다. 오늘날 국가구조와 운영의 기본 틀이 사실상 박대통령의 치세(治世) 때 이루어진 것이고, 이는 또한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체제 건국과 한·미 동맹의 설립에 의해 가능했던 것이다.
수량화(數量化)가 가능하다면 아마도 7:3 또는 8:2의 정도로 이승만·박정희 양 대통령의 공과(功過)를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글 머리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오늘날 대한민국은 국가 정체성과 정통성의 위기에 처해 있다. ‘과거사 캐기’ ‘친일 청산’ 주장 등 제반 움직임이 친북·좌파 세력의 득세와 무관하지 않다.
최근에는 여권 일각에서 헌법 개정 논의도 일어나고 있다. 표명된 이유로는 ‘대통령과 국회의원 선출 시기의 일치’가 제시되고 있으나, 그동안의 여권 핵심 세력의 언급으로 볼 때, 헌법의 영토 조항이나, 통일 조항 개정에 그 숨은 의도가 있지 않나 우려되고 있다. 북한을 反국가단체로 규정한 ‘영토 조항’과 자유민주 흡수통일의 정당성을 규정한 ‘통일 조항’은 대한민국의 정체성 및 정통성과 뗄 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자유·보수 세력이 향후 전개될 사태에 주목하고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洪官憙(안보전략연구소장)
제2차 세계대전 종결 이후, 한민족(韓民族)은 타의에 의한 해방을 맞이했다. 일본이 연합군에 패망함으로써 일제(日帝)의 식민통치가 막을 내린 것이다. 이에 따라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미·소 양국 군대가 북위 38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남북에 각각 진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것이 반세기가 넘는 국토와 민족의 분단을 가져오는 계기가 된다.
이후 소련은 동아시아에 대한 팽창정책의 일환으로 북한을 위성 기지화하고, 한반도 공산화 작업에 착수했다. 미국은 당초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하기 위해 남한에 군대를 파견했으나, 점차 소련의 팽창정책과 중국대륙의 공산화에 맞서기 위해 자유진영을 수호하는 ‘전선(front line)’으로서의 남한의 중요한 역할을 인식하게 되었다.
해방 이후 남한의 정치 공간은 소련의 지원과 조종을 받는 공산·좌파 세력과 한반도 적화(赤化)기도에 대항하여 자유민주 정부를 수립하려는 자유·보수 세력 간 처절한 대결의 장(場)으로 변모하였다.
이어, 북한에 소련의 지원을 받는 김일성 공산체제가 수립되고, 남한에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하면서, 남북 간 좌우 냉전 대립이 배태(胚胎)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분단 이후 한반도 역사는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남북 간 체제 경쟁 곧 정통성의 경쟁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현상은 6·25 남침에 의한 ‘동족상잔(同族相殘)’을 겪으며, 남북 상호불신과 적대관계의 증대를 통해 더욱 심화되어왔다.
자유민주체제·자유시장경제의 정착과 발전, 그리고 세계시장에의 적극적인 진출에 힘입어 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의 경제발전국가 그룹에 진입했으며, 남북 간 체제경쟁은 1990년대 이후 사실상 종언(終焉)을 고했다. 그리고 북한은 체제 붕괴의 위기에 직면하게 됐다.
그러나, 1998년 김대중 정부가 집권하고 2003년 노무현 정권이 이를 계승함에 따라, 대한민국은 전혀 예상치 않았던 국가 정체성과 정통성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김대중·노무현 양 정권이 ‘햇볕정책’ ‘남북 화해·협력 정책’을 추진, 북한 정권 지지 노선을 일관되게 시행함으로써, 김정일 공산 독재의 대남전략이 강화되고, 군사력이 증강되며, 특히 북한 정권에 호응하는 남한 내 친북·좌파 세력이 득세하였기 때문이다. 현재 대한민국은 유례 없는 국가적 위기에 처해 있다. 과연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인지는 한민족과 대한민국의 장래를 가름하는 중요한 분수령이 될 것이다.
II. 대한민국의 이념적 정체성(ideological identity)
해방 정국의 극도의 혼란 속에서 이승만(李承晩)은 1946년 6월 ‘정읍 발언’을 통해 “남쪽만이라도 임시정부나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선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천명하였다. 이로써 혼돈의 해방 정국을 마감하고 건국(建國)을 향해 첫 걸음을 내디딜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이 이미 북한 지역을 점령하고 있는 상황에서, ‘통일 정부’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구호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승만은 남한 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시급하고 불가피하다는 것을 역설한 것이다.
이에 따라 남한은 제헌(制憲) 국회를 통해 자유민주 헌법을 제정·공포하고, 헌법이 定한 합법적 절차에 따라 1948년 8월 15일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와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근간으로 하고 ‘주권재민(主權在民)’을 원칙으로 하는 ‘민주공화국’을 수립·선포하였다. 이후 UN의 승인과 동시에 세계 자유체제 질서 속에 편입되어, 경제발전에 성공·번영하는 국가로서 국제사회의 중요한 일원으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 체제를 근본으로 한 건국이념에서 나온다고 볼 수 있다. 곧 자유민주주의·자유시장경제는 대한민국의 국가 이념인 동시에 국가의 이념적 정체성(ideological identity)의 원천인 것이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자율(自律)을 통해 인간이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고, 또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보는 이념이다. 여기에 국민의 정치 참여를 기초로 하는 민주주의가 결합되어 자유민주주의가 현대정치에 출현했다. 그럼에도 자유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대의제(代議制)이며 간접민주정치를 표방한다. 인민민주주의, 민중민주주의, 직접민주정치와 구별된다. 또한 법치주의를 근간으로 하며, 법 앞의 절차적 평등(procedural equality) 곧 기회의 평등을 강조한다. 사회주의·공산주의가 표방하는 결과의 평등(substantial equality)이나, 인위적 평등을 거부한다. 한편 자유시장경제는 자유 시장의 자발적인 생성과 운용을 모토로 한다. 그리고 개인의 사유재산권과 경제활동의 자유 보장을 원칙으로 한다. ‘경제적 민주주의’ 이름 하에 분배와 평등을 강조하는 사회주의적 이념과 구별된다.
대한민국의 이러한 이념적 정체성(正體性)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와 ‘자유민주 통일’을 규정한 헌법 전문(前文) 및 각 해당 조항에 명문화되어 있다.
III. 한반도 유일(唯一) 합법 권력으로서의 정통성(legitimacy)
한반도 유일 합법 권력으로서의 대한민국의 정통성(正統性)은 상기 언급한 이념적 정체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자유민주주의·자유시장경제가 공산독재체제 보다 인간을 보다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이 이념을 선택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강화해 준다.
정부 수립과정에서 나타난 헌정(憲政) 절차의 합법성도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강화해 주는 요인이다. UN은 남북한 총선거에 의한 통일 정부 수립을 결의하였으나, 북한은 이를 거부하였고 남한 정부만이 UN의 승인을 얻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북한 정권은 어디까지나 한반도 북부를 점령하고 있는 불법 집단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헌법 제3조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명시하고 있고, 제4조는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헌법 제3조 ‘영토 조항’은 대한민국만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이며, 북한당국을 反국가단체로 규정지음으로써, 국가보안법의 헌법적 근거조항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헌법 제3조는 ‘국가 정통성의 핵심’이며, 바로 이 조항에 의해 북한과 대등한 입장에서 추구하는 ‘연방제’ 또는 ‘연합제’ 기도는 위헌(違憲)이 된다.
더욱이 이 영토 조항을 개정하거나 폐지한다면 (i)‘북한주민’을 외국인으로 간주하게 돼 탈북민을 보호할 명분과 근거를 잃게 되고 (ii)北 붕괴 시 북한지역에 대한민국이 개입할 권리를 상실하게 된다.
정통성의 개념은 국가 이념의 타당성, 건국과정에서 나타난 도덕성·합법성 외에 이후 통치과정에서 획득되는 효율성에 의해 영향을 받을 것이다. 예컨대, 정부 수립과정에서 합법성을 획득하였다 해도, 이후 국가발전과 국민복리 증진에 실패하였다면, 정통성의 위기에 봉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건국 이후 높은 통치 효율을 통해 국가 정통성이 보다 강화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IV. 6·25를 통한 정통성 강화
남한에 자유민주주의·자유시장경제를 국시로 하는 단독 자유민주정부 곧 대한민국이 출범한 이후 2년이 채 못되어 일어난 6·25 동란(動亂)은 남북 좌우 이념대결의 폭발이자 세계적 좌우 냉전이 열전화(熱戰化)한 일대 사건이었다.
6·25 사변을 보는 상호 대립되는 두 시각이 존재하는 바, 이는 남북 간 정통성 논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먼저, ‘전통주의(傳統主義)’ 시각인데, 이는 2차 대전 이후 소련의 공격적이고 팽창주의적 대외정책이 미국의 단호한 반응을 불러 일으켰고, 이로부터 냉전이 확대되었다고 본다. 이것이 결국 한국전쟁을 가져온 원인(原因)이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미국이 1949년 여름 주한미군을 철수하고 남한을 극동방위선에서 제외시키며 1950년 5월 30일 제2대 민의원 선거에서 우익·보수 세력이 패배하게 되자, 스탈린·김일성 라인에서 남한 침공을 결행한 것으로 파악한다. 이러한 사실은 역사적 자료를 통해 사실로 입증되고 있다.
다음은 ‘수정주의(修正主義)’ 시각인데, 이는 냉전의 책임이 1차적으로 미국의 ‘제국주의적인 대외정책’으로부터 나왔다고 해석한다. 미국이 소련보다 우세한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세계를 ‘지배’하려 함에 따라, 소련이 불가피하게 이에 대응하게 되고 그 결과 냉전이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미국이 제국주의적 정책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남한정부를 교사하여 6·25 전단(戰端)을 열었다고 주장한다. 지난 해 논란 많았던 강정구 류(類)의 역사 해석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후일 역사적 근거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고 있다.
수정주의자들은 종래의 국제정치 틀 속에서 한국전쟁을 바라보던 시각을 비판하고, ‘한반도의 내부적 갈등’ 차원에서 6·25 전쟁의 기원을 찾으려 시도하였다. 곧 6·25는 한국근대사의 사회경제적 모순 속에서 배태되어 항일독립운동 기간을 거쳐 해방 이후 가시화된 좌우 이념대결이 내전의 한 형태로 발발(勃發)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특히 수정주의적 시각을 따르는 좌파 학자들은 한국전쟁이 ‘내전’이란 전제하에 일종의 ‘인민해방전쟁’ 또는 ‘민족해방전쟁’이며, ‘북침’ 또는 ‘남침’ 논쟁은 그 자체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해방 이후, 한반도에 2개의 이념적으로 이질적인 정치체제 곧 자유민주체제와 공산체제가 출현하여, 남북 각 체제가 상대 체제를 자신에게 흡수·통합하려고 노력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단, 전쟁을 통한 무력통일을 기도한 것은 북한임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6·25 전쟁은 대한민국의 정통성 강화를 가져다 준 계기가 되었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폭정과 만행을 체험한 이후, 대한민국은 反共이데올로기의 강화, 반공 이데올로기의 全사회적 수용, 그리고 자유·보수 세력이 지배그룹으로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3·8선이 휴전선으로 대체되고 남북 간 대결 및 분단의 장기화·고착화 현상이 나타나면서, 남북 간 체제경쟁이 가속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미 동맹의 성립은 대한민국 국가안보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V. ‘4·19 민주혁명’과 ‘5·16 군사혁명’ 이후의 국가 정통성 문제
1960년 4·19 민주혁명 이후 6월의 헌법 채택과 7월 29일 총선거를 거쳐, 8월에 장면정부가 출범하였다. 1961년 5·16 군사혁명이 성공하기까지 단명(短命)했던 민주당 정권은 反민주세력의 처벌 등 ‘개혁’ 조치를 시도하였으나, 집권세력의 분열(신·구파)과 우유부단한 조치로 급격히 약화되었다. 국가 권력기구에 대한 통제 약화와 좌파의 소요(騷擾)로 국론이 크게 분열되었고, 오히려 민주주의가 후퇴되는 현상을 가져왔다. 결국, 좌·우 분열은 정쟁의 심화로 이어지고, 정부의 우유부단과 결부되어 무질서 상황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민여론은 결단력 있고 강력한 정부를 기원하는 방향으로 바뀌어갔다.
아울러 사회 각계각층으로부터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온 요구와 기대의 분출은 ‘권력의 집중화’ 필요를 절감하게 되었다. 혁명적 열기를 제도화된 질서로 흡수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통제에 바탕을 둔 개혁정치가 필요하였으나, 장면정부는 이러한 능력을 결여하였다.
결국, 민주주의 실험 1년 미만에 5·16 군사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4·19혁명은 자유민주주의적 정치이념에 입각한 ‘시민혁명’에 의한 장기 부패 정권의 타도에 의미가 있다. 4·19혁명은 이후 한국정치의 이념적 틀을 ‘정치적 자유민주주의’와 ‘장기 독재’의 양분 논리로 정형화시켰다.
그러나, 5·16 이후의 사건 전개를 통해, 국민들은 단순히 ‘자유’ 대 ‘독재’라는 단순한 구도보다는 국가발전 개념의 도입을 목도(目睹)하였다. ‘국가안보’와 ‘경제발전’, 그리고 그에 따른 ‘자유의 한계’ 등의 논쟁이 현실 문제로 국민 앞에 나타난 것이다. 곧 1960년대 이후 한국정치의 주안점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안보, 경제발전 등으로 압축되게 되었다.
그렇다면 ‘5·16’은 ‘혁명’인가 ‘쿠데타’인가? 이는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관련된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논쟁점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정체성(正體性)과 정통성(正統性)을 부정하는 많은 친북·좌익 세력이 이승만의 건국과정과 박정희의 5·16혁명을 근원적으로 부정하고, 특히 박정희 대통령을 ‘친일(親日)’로 매도하여 이후의 역사를 송두리째 부정하려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혁명은 과거 권력의 정통성(legitimacy)을 붕괴시키고, 새로운 정통성을 창출함에 따라, 그 정통성의 공인(公認) 문제가 제기된다. 그러므로 혁명의 공인 여부는 혁명 이후 행사된 통치의 효율성 여하에 따라 크게 영향 받는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2공화국은 합법성은 인정되나 효율성 면에서 뒤떨어져 불완전한 정통성을 보유한다고 평가할 수 있고, 5·16 이후의 3공화국은 정권창출의 합법성은 결여되었으나, 이후 나라를 성과 있게 다스렸다는 점에서 효율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박정희 정부는 ‘5·16’의 취약한 ‘민주적 정통성’을 경제발전이 가져다 준 ‘효율성’에 의해 보완하고, 정통성을 획득해 갔다는 점이 특징이다. 한국사상 전례 없는 국력발전의 성과와 업적에 힘입어, 박정희 정부는 집권 수년 내 상당한 정도의 국민적 지지를 획득함으로써, 정통성을 어느 정도 회복하는 결과를 가져 온 것으로 분석된다. 예컨대 1967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는 윤보선 후보에 51.4% 대 41%로 낙승하였는 바, 이는 1963년 박 후보가 윤 후보에 46.65% 대 43%로 신승하였던 것과 크게 대조된다. 박정희 정부에 대한 국민적 지지가 크게 상승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1972년 ‘유신’ 체제의 선포는 민주주의에의 도전으로 인식되면서, 제3공화국 정통성을 크게 훼손하는 요인이 되었다. 유신 통치 이후의 ‘효율성’과 정통성 문제는 향후 좀 더 심층적 고찰과 평가를 要하는 부분이다.
VI. 結 語
돌이켜 볼 때 이승만대통령이 해방 정국에서 보인 자유이념에의 헌신과 건국과정에서 발휘한 탁월한 지도력은 대한민국 건국과 정통성 확보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후일 장기집권과 부정·부패는 그의 공헌을 크게 감소시킨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의 공로가 본질적으로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군사혁명으로 집권한 박정희대통령의 국가발전 공로 역시 지대(至大)한 것이다. 60년대 초 빈한(貧寒)한 농업국가에서 오늘날 세계 유수(有數)의 경제부국으로 발전시킨 공로가 그에게로 돌려져야 한다. 그러나 그 역시 후일 장기 독재로 그의 공헌이 반감(半減)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의 공적이 근본적으로 부정되어서는 안 된다. 오늘날 국가구조와 운영의 기본 틀이 사실상 박대통령의 치세(治世) 때 이루어진 것이고, 이는 또한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체제 건국과 한·미 동맹의 설립에 의해 가능했던 것이다.
수량화(數量化)가 가능하다면 아마도 7:3 또는 8:2의 정도로 이승만·박정희 양 대통령의 공과(功過)를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글 머리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오늘날 대한민국은 국가 정체성과 정통성의 위기에 처해 있다. ‘과거사 캐기’ ‘친일 청산’ 주장 등 제반 움직임이 친북·좌파 세력의 득세와 무관하지 않다.
최근에는 여권 일각에서 헌법 개정 논의도 일어나고 있다. 표명된 이유로는 ‘대통령과 국회의원 선출 시기의 일치’가 제시되고 있으나, 그동안의 여권 핵심 세력의 언급으로 볼 때, 헌법의 영토 조항이나, 통일 조항 개정에 그 숨은 의도가 있지 않나 우려되고 있다. 북한을 反국가단체로 규정한 ‘영토 조항’과 자유민주 흡수통일의 정당성을 규정한 ‘통일 조항’은 대한민국의 정체성 및 정통성과 뗄 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자유·보수 세력이 향후 전개될 사태에 주목하고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洪官憙(안보전략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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