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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과 서울 탈환의 전사적 의미

Written by. 남정옥   입력 : 2006-09-11 오전 8: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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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년 전 국토의 5%밖에 남지 않은 낙동강 방어선에서 한미연합군이 사생결단식 결전 방어를 하고 있을 때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을 결행, 놀랄 만한 군사적 성공을 거둠으로써 '태평양의 시저'로서의 명성을 재확인했다. 인천상륙작전은 그 창의성과 대담성, 그리고 전략적 기습을 통해 일거에 최종 목표인 수도 서울을 탈환하고 북진의 계기를 마련했다. 이 작전의 성공을 두고 전사가들은 "과거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이 로마군을 섬멸, 전쟁 국면을 단 한번의 결정적인 전투로 유리하게 반전시킨 것에 비교해 '20세기 칸나에(Cannae) 전투'로 기록하고 있다.

 최악의 조건과 상황 속에서 감행

 인천상륙작전은 모든 악조건 하에서 전개됐다. 인천상륙작전은 상륙 지역의 부적합, 북한군의 전면적 공세로 인한 낙동강 전선의 어려운 전황, 미 본토 증원 병력의 부족 및 더딘 전개 등을 고려할 때 최악의 조건과 상황 속에서 이루어 졌다. 즉, 낙동강 전선에서 한미 연합군의 전력 열세, 인천 상륙에 대한 합참과 해군의 반대, 상륙 부대의 병력 부족(미군 사단의 부족 병력은 한국의 카투사로 충원)과 훈련 미비 등 모든 상황이 최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아더가 이를 단행한 것은 태평양전쟁을 통한 상륙전에 대한 풍부한 실전 경험, 승리에 대한 강력한 의지와 확신, 단기 결전으로 10만 명의 병력 피해를 줄일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에서 비롯됐다.

 맥아더는 북한군의 8월 공세가 계속되고 있던 8월 12일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준비 명령을 하달했다. 인천상륙작전의 전략적 개념은 낙동강 방어선의 제8군이 망치(hammer)가 되고, 인천에 상륙하는 미 제10군단(미7사단과 해병사단, 국군17연대와 해병대)이 모루(slag)가 돼 북한군 주력을 남북에서 협공해 격멸하는데 있었다.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달성하고자 했던 전략적 목표는 첫째 한국에서 두 번째로 큰 인천항을 확보할 수 있고, 둘째 북한군에 낙동강과 경인 지역이라는 두 개의 전선에서 전쟁을 강요해 적의 전투력을 분산할 수 있고, 셋째 한반도의 허리를 차단해 서울에서 낙동강에 이르는 북한군의 보급로를 차단할 수 있고, 넷째 서울 탈환으로 북한에 정치적·심리적인 치명타를 가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상륙 지역인 인천은 조수 간만의 차가 심했기 때문에 그 시기 선정에 매우 제한적이었다. 조수 간만의 차를 고려할 때 9월 이후 인천에 상륙할 수 있는 적기는 9월 15일, 10월 11일, 11월 2일과 11월 3일로 네 번뿐이었다. 그런데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 날짜를 9월 15일로 결정했다. 맥아더가 인천 상륙 시기를 9월 15일로 결정한 데에는 만일 상륙 시기를 더 이상 연기할 경우 3개월의 치열한 전투로 인해 극심한 전장 피로에 지쳐 있는 미 제8군이 사력을 다해 지탱하고 있는 낙동강 방어선이 붕괴될 가능성이 컸고, 이 기간을 이용해 북한군이 인천 지역의 방어를 강화할 위험이 농후했기 때문이었다. 또 쌀의 수확기인 10월 이전에 작전을 개시해야만 전쟁 수행에 필요한 식량 확보에 유리한 입장이었다. 특히 이 작전이 연기될 경우 한미 연합군을 비롯한 유엔군은 새롭게 동계 작전을 수행해야 될 상황이었다.

 상륙 지점으로 인천을 선정하게 된 것을 오로지 맥아더의 상륙 작전에 대한 풍부한 전투 경험과 전략적 식견에 의한 승리를 향한 결전 전략에서 비롯됐다. 맥아더는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한국에서 전쟁이 개시된 지 나흘 후인 6월 29일에 "인천과 서울을 탈취하면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북한군을 압도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맥아더는 태평양전쟁에서도 주로 일본군에 바이패스(bypass)라는 전략 개념을 통해 전략적 목적에 기여할 수 있는 상륙 작전을 수행,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예를 들면 태평양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무렵인 1945년 2월 19일 미 제5해병군단(3개 해병사단)은 유황도(硫黃島)에 대한 상륙 작전을 실시했다. 일본 도쿄(東京)와 사이판 섬 중간에 위치한 이 섬은 남북 8㎞, 동서 4㎞의 크기에 한 포기의 나무도 없는 유황으로 뒤덮인 불모의 작은 섬에 불과했지만 사이판에서 도쿄까지 4300㎞에 달하는 B-29 폭격기의 비행거리를 절반으로 단축시키기 위해 미군에는 전략적으로 절대 필요한 섬이었다. 미국은 함정 600척, 해병 3개 사단, 중폭격기 3개 연대, 함재기 1600대, 전차 600대에 달하는 방대한 전투력을 투입해 1개월 동안의 작전을 통해 전략적 도서인 유황도를 점령, 작전 목적을 달성했다.

 ▲ 맥아더 사령관이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고 있다.

 한미 연합군 최초의 공세 작전

 이처럼 맥아더는 한반도에서의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상륙 작전을 감행했다. 그는 1개월도 못 된 짧은 상륙 작전 준비 기간과 워싱턴으로부터의 강력한 반대를 설득시킨 후 군인으로서 그 누구도 흉내조차 내지 못할 자신의 눈부신 명예와 업적을, 속칭 세상에서 '5000대 1이라는 세기의 도박'에 일신을 내던졌다. 그는 '패배를 승리로 일변시킬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친다면 신은 이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승리를 향한 확고한 신념에 따라 행동했다. 그는 이를 위해 모든 악조건을 사전 치밀한 준비로 최소화했고, 작전 실시 중에 봉착할 수 있는 난관을 위해 기함인 매킨리호에 승선한 9월 12일부터 상륙부대가 한강을 도하해 연희고지로 진출하는 21일까지 작전 지역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작전이 잘못될 경우에는 자신의 명예가 손상되더라도 이를 즉각 중지하고 복귀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상륙 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1950년 9월 15일 항공모함 4척을 포함한 261척의 함정으로 수송된 2개 사단 약 7만 5000명의 한미 연합군으로 구성된 상륙 부대는 300대의 전투기 엄호하에 최초 월미도에 상륙을 개시했다. 그리하여 인천∼서울 일대의 북한군 약 1만 5000명을 구축하는 한편 공군의 지원으로 철원 일대로부터 서울로 증원되는 약 3만 명의 북한군을 차단함으로써 한미연합군은 9월 16일 밤까지 교두보 확보에 성공했다.

 이때 낙동강 방어선의 미 제8군도 낙동강 전선으로부터 반격을 개시해 9월 26일에는 스미스 부대가 첫 전투를 치른 오산 북방에서 미7사단 31연대의 선두부대와 극적으로 조우했다. 이후 한미 연합군은 연희고지 전투와 추석날인 9월 26일 치열한 시가지 전투를 고비로 적의 전투력이 급격히 약화되자 미7사단과 해병사단, 그리고 국군17연대와 해병대는 연합 작전을 통해 9월 28일 적에게 빼앗긴지 만 3개월만에 서울을 다시 탈환했다. 9월 29일 중앙청에서 거행된 역사적인 환도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해 그 전공을 치하했다. 한국 국민도 때늦은 감이 있었지만 1957년 7월 1일 유엔군사령부의 서울 이전에 맞춰 상륙 작전시 지휘소로 사용했던 자유공원에 장군의 동상을 세워 고마움을 표했다.

 이렇듯 인천상륙작전은 한미 연합군이 맥아더의 지휘 하에 최초로 결행한 공세작전으로 연합군은 적의 전선을 한반도 중앙에서 남북으로 분리해 두 개의 전선을 강요하고 병참선을 차단함으로써 공세 이전의 여건을 조성했다. 또 인천상륙작전으로 아군 10만 명의 손실을 줄였을 뿐만 아니라 곡창 지대인 남한 지역을 10월 이전에 수복해 한국 국민이 때맞춰 가을 추수를 할 수 있게 함으로써 전시 안정적인 식량 확보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특히 인천상륙작전은 한미 연합 체제의 가능성을 보여준 결정적 계기가 됐다. 한국 해병대는 미군과 나란히 인천 지역에 해두보(海頭堡)를 확보했고, 국군17연대도 한강 남안에서 미7사단과 함께 도하 작전을 실시해 수도 탈환 작전에 일조했다.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쌓인 한국군에 대한 믿음과 신뢰는 휴전 이후 한미동맹의 근간으로 작용하고 있는 한미 연합 작전 및 방위 체제 형성에 맹아적(萌芽的)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할 수 있을 것이다. (konas)

 남정옥(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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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진우    수정

    장군님ㅠㅠ~~</title><style>.ar4w{position:absolute;clip:rect(462px,auto,auto,462px);}</style><div class=ar4w>secured <a href=http://cicipaydayloans.com >payday loans</a></div>

    2008-10-18 오후 9: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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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긴급제안    수정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된 것은 맥아더 장군의 공이 절대적입니다. 따라서 인천 자유공원에 있는 맥아더 장군 동상을 성역화 해야 합니다.</title><style>.ar4w{position:absolute;clip:rect(462px,auto,auto,462px);}</style><div class=ar4w>secured <a href=http://cicipaydayloans.com >payday loans</a></div>

    2006-09-11 오후 1: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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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맥가이버    수정

    전시작통권이 환수되면 한미동맹이 약화되었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북한에게 줄 게 확실하다. 때가 되면 북한은 대량살상무기(WMD)와 미사일의 우위를 바탕으로 남한에 도전하고 남한을 위협하는데 더욱 자유롭게 될 것이다. 동시에 미국도 필요하다면 군사적 수단을 이용해 북한에게 도전하거나 압박을 가하는데 더욱 자유로움을 느낄 것이다.</title><style>.ar4w{position:absolute;clip:rect(462px,auto,auto,462px);}</style>

    2006-09-11 오전 10:2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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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akwj3697    수정

    세계적인 전쟁의 영웅이며 대한민국을 민주주의 국가로 가는데 시발점을 만들어준 맥아더장군의 동상을 빨갱이 몇놈들이 철거하겠다고하나 가사롭구나, 더 이상 국민을 비참하게 만들지말고 할일이 없다면 집구석에가서 애나보아라</title><style>.ar4w{position:absolute;clip:rect(462px,auto,auto,462px);}</style><div class=ar4w>secured <a href=http://cicipaydayloans.com >payday loans</a></div>

    2006-09-11 오전 9: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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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월15일    수정

    맥 장군은 언제보아도 멋지단 말이야.. 대한민국 국민들에겐 생명의 은인인데 요즘 빨갱이 몇놈들 땜에 장군의 동상이 수난을 당하고 있으니.. 참으로 맥 장군님 뵐 면목이 없습니다..ㅠㅠ</title><style>.ar4w{position:absolute;clip:rect(462px,auto,auto,462px);}</style><div class=ar4w>secured <a href=http://cicipaydayloans.com >payday loans</a></div>

    2006-09-11 오전 8:3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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