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 칼럼 글씨확대글씨축소스크랩인쇄

[국토대장정 소감⑤]"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물집 따위는 그들을 막지 못했다.”
Written by. 이동엽 (John Dongyeop Lee)   입력 : 2010-08-26 오전 10:07:36
공유:
소셜댓글 : 0
twitter facebook

   "Don't you ever and ever give up!"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  영국의 뛰어난 정치가이자 웅변가인 윈스턴 처칠이 명문 옥스퍼드 대학에서 졸업식 축사를 하면서 뱉어내었던 말이다.  그동안 미국에서 오랫동안 생활하면서 내 마음속 깊이 새겨놓은 명언중 하나이다.  한국에 오기 전에 난 항상 한국에오면 어릴 적 뿌리를 되찾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체험을 하기 원했다.  

 그래서 이번 6.25국토대장정은 나에게는 오랜 가뭄 끝에 나의 마음을 흠뻑 젹셔준 단비와 같이 젊음과 패기, 열정으로 참여하게 되었고 6.25전쟁 당시 수많은 젊은이들이 피와 땀으로 물들인 전적지를 돌아봄으로써 조국에 대한 사랑과 동료애 및 희생정신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또한 6.25 참전용사이셨던 이종진 친할아버지의 혼이 살아 숨 쉬며 할아버지가 겪으셨던 전쟁을 6.25 전적지 답사 국토대장정을 통하여 몸과 마음으로 느낄 수 있어서 감회가 새롭다.

   실장님께서는 간단한 응급처치정도만하면 된다고 하시며 나의 걱정을 덜어주셨지만 나의 꼼꼼하고 한편으로는 집요한 성격상 나는 인터넷과 여러 가지 응급처치 책들을 넘겨보며 국토대장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응급 상황에 관하여 하나둘씩 습득해나갔다.  

 특히 다른 국토대장정 참가대원들의 블로그들을 관찰해본결과 물집환자들이 대다수라는 것을 파악했고 물집환자 응급처치 법을 중점적으로 숙지했다.  국토대장정 출정식이 조금씩 가까워지자 나는 의료팀장으로서 나에게 많은 책임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마음속으로 11박 12일 동안 최선을 다하여 환자대원들의 의료치료를 통하여 봉사하고 또 그들을 위해 희생할 수 있도록 몸, 마음, 그리고 정신을 무장하기 시작했다.  

 ▲ 답사단원들의 발은 물집과 피멍으로 불어터졌다. 발목을 붕대로 감고 불은 발에 파우더를 바르며 '투혼'을 발휘하고 있는 어느 답사단원ⓒkonas.net

[1일차, 6.25 금]
   “삐삐삐삐~삐삐삐삐” 새벽 4시에 맞추어 놓은 나의 알람시계에 그렇게 빨리 눈이 떠졌던 적은 처음일정도로 나는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왜냐! 오늘이 바로 내가 그렇게 갈망하던 6·25전쟁 전적지 답사 국토대장정의 날 이었기 때문이었다.  의료팀장인 나와 의료부팀장은 의료물품정리와 구급차 정리를 위하여 직접 동작동 국립 현충원으로 오면 된다는 실장님의 말씀에 나는 10시전에 국립현충원에 도착하였다.  벌써 현충원안에는 육해공군의 군인들이 와서 참배를 드리고 있었고 엄숙하고 진지한 분위기에 나는 아! 이것이 바로 나라사랑하는 마음이구나! 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른 대원들이 올림픽 체육관에서 올 때까지 나와 부팀장 그리고 수송팀장님은 구급차를 정리했고 나는 구급약들을 사용하기 쉽게 하나하나 리스트를 만들며 정리했다.  간이 병원으로 쓰게 될 구급차에 의약품들을 정리하면서 나는 우리 의료스텝들에게 그동안 내가 공부했던 응급처치 지식들을 알려주었다.  또한 대장정 중에 환자가 속출해서 스텝들이 우왕좌왕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작은 공책을 하나 마련하여 응급상황 종류별로 응급처치 요령들을 적어나갔다.  그동안 여러 가지 매개체로 습득한 지식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였다.  의료스텝들은 꼼꼼한 나의 성격이 맘에 들었는지 11박 12일 동안 아무 탈 없이 날 잘 따라주었다.  또한 동료스텝들에게 나는 낮지만 강하게 말했다.  우리의 임무는 대장정중 속출할 수 있는 환자 대원들 중에 누가 중환자인지 아님 미약한 상태의 환자인지를 잘 구별하면서 중환자는 빨리 응급실에 보내야하는 바른 판단의 눈을 갖추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행히도 11박 12일 동안 갑자기 응급실로 보내야했던 환자대원은 1명밖에 없었고 다시 한 번 응급 상황시 바른 판단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되었다.    
   드디어 모든 대원들이 현충원에 집합하였고 우리는 그곳에서 처음 도시락을 함께 먹었다.  배가 부르고 얼굴에 생기가 도니 우린 어서 빨리 행군을 하기 원했고 국립현충원에서 먼저 앞서간 호국영령들에게 참배를 한 후 수원으로 이동하였다.  
   수원 프랑스군 참전 기념비에서 참배를 하면서 다른 나라 젊은이들조차도 평화를 위해 고귀한 목숨을 던져 우리나라를 지켜 주었다는 말에 나는 고마움과 경이로움을 새삼 느꼈다.  현충원과 프랑스군 참전 기념비에 참배를 하고나니 나는 더욱더 6·25전쟁에 대하여 궁금한 것이 많아졌고 이번 국토대정이 그냥 걷는 것만이 아니라 6·25한국전쟁에 대해서 조금 더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 확신했다.  수원부터 우리 108명의 국토대장정 대원들은 다음목적지인 평택을 향하여 비록 배낭은 무겁지만 마음은 가벼운 행진을 시작 하였다.  나와 부팀장은 행군 제일 뒤에서 대원들과 함께 걸으며 혹시 발생할 수 있는 위급 상황을 위해 항시 대기하였다.  
   이날 오후, 우리 대원들은 수원 공군 제10전투비행단에 도착하였고 난생처음 가본 공군기지의 깔끔함과 기품에 우리 모두는 갈채를 보냈다.  그곳에서 맛있는 식사를 마치고 세미나실에 모여 공군 동영상을 보았다.   60년전 6·25전쟁당시 제10전투비행단에서 낡은 수입 비행기 몇대로 전쟁을 치렀던 한국 공군이 지금은 이렇게 발전했다는 사실에 가슴 한편이 뿌듯해졌다.  첫 날이어서인지 몰라도 이날저녁에는 다행이도 아픈 환자대원들이 없었다.

[2일차, 6.26 토]
   기상시간은 아침 6시!  전날 밤에 모기와의 사투를 벌여서 그런지, 아니면 낮선 사람들과의 동침 때문인지 몰라도 이상하게 아침에 일어나서도 피곤이 풀리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덜 피곤해서 숙면을 취하지 못했던 것 같다.  군대리아! 아침에 드디어 군대에서만 맛볼 수 있다는 군대리아를 먹었다.  고기패티, 치킨샐러드, 과일 잼과 스프를 곁들인 아침식사. 생전처음 맛보는 군대음식이였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공군의 상징인 전투기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었다.  답사단장님께서 특별히 F-16전투기 안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배려해주셨고 나는 영화 “탑건”에 탐크루즈처럼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멋지게 포즈를 취했다.  사진 촬영 후 우리는 유엔군 초전 기념비로 이동해서 묵념을 하였고 호국영령들의 희생정신 앞에 들뜬 마음들이 다시 차분해지며 다음 목적지인 평택을 향하여 행군을 시작했다.  점심식사는 이날 송탄소방서에서 삼삼오오 바닥에 둘러앉아 먹으면서 6·25당시 우리 군인들도 이렇게 자유스럽게 먹을 수 있었을까 잠시 생각해보았다.  
   이날 오후 6시 40쯤 우리는 공군 제 2 방공 포병여단에 도착하였다.  우리가 공군부대에 도착했을 때 대원중에 환자가 있다는 소리를 들었고 이날 유일하게 낙오되었던 남자 대원을 처음 만났다.  이 친구는 허리부터 허벅지 밑에까지 심각한 통증을 호소하고 있었고 우리는 근육 통증 약을 발라주고 마사지를 해주었고 압박붕대를 해주면서 내일까지 경과를 한번 보자고 했다.  다음날, 앞으로 열흘 동안의 행군이 무리라고 판단한 결과 결국 이 친구는 실장님, 단장님의 결정 하에 아쉽지만 다음날 귀가를 시켰다.

[3일차, 6.27 일]
   이날은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오고 어두컴컴하였다.  낙천적인 성격 때문일까? 나는 오늘은 덥지 않게 행군할 수 있겠구나, 일사병 환자들도 없겠구나 생각을 했고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천안을 향하여 행군을 시작했다.  점심을 야외에서 먹고 천안 삼거리 초등학교에서 대한민국 재향 군인회 여성 회원 분들과 함께 단체 사진도 찍었다.  그분들이 준비해주신 빵과 우유를 마시며 군대에서만 느낄 수 있다는 진정한 어머니의 마음도 느낄 수 있었다.  
   이날 대표적인 환자들은 두 명 이었는데 첫 번째, 안보팀 이00 대원은 어제 아침부터 계속 설사와 구토가 있어 정로환을 처방하였고 다행이도 이 대원은 더 이상 구급차를 들리지 않았다.  두 번째 환자는 안보팀 김00 대원 이였는데 구토감과 현기증 등을 호소하였고 이 대원은 그 후에도 몇 번씩 구급차를 타며 이동하였다.    

[4일차, 6.28 월]                
   드디어 4일차! 슬슬 피곤이 몰려오는 시기였던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서 맨발에 샌들을 신고 구급차에 물품을 정리하러 가는데 숙소 문틀에 걸려 오른쪽 엄지발가락이 찢어지는 찰과상을 입었다.  나는 문득 6·25 당시 우리 군인의 고통과 역경을 생각하며 이 사실을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붕대를 감고 양말을 신어도 조금씩 베어 나오는 핏자국을 숨길 수 없었고 우리 의료부팀장이 고맙게도 소독약과 연고로 치료를 해주었다.  나는 이때 처음으로 끈끈한 동료애를 느낄 수 있었다.  
   걷고 또 걸으며 오후 6시, 우리는 조치원에 있는 동원훈련소에 도착하였다.  조치원은 나의 할아버지, 아버지가 사셨고 지금도 친척들이 많이 살고계신 고향이라 나에게는 감회가 새로운 곳이다.  그래서 부강에 살고계신 큰아버지께 전화를 드렸더니 이쪽으로 먹을 것을 사가지고 오신다고 하셔서 우리는 하나이기 때문에 먹을 것 하나도 다 같이 나누어 먹어야 되므로 107명 모두에게 사주시는 것 아니면 혼자 먹을 수는 없다고 말씀드렸다.  조금씩 변해가는 나의 군인정신. 역시 환경이 사람을 바꾸는구나!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5일차, 6.29 화]
   조치원 동원훈련소에서 계룡산 쪽으로 가는 도중 우리는 계룡산 옆 휴게소에서 롯데리아 햄버거와 콜라를 먹었다. 물론 배가 많이 허기진 상태라 아주 맛있게 먹었다.  하지만 만약 훗날 롯데리아 햄버거와 군대리아중 더 먹고 싶은 햄버거를 뽑으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군대리아를 선택할 것이다 왜냐하면 보통 햄버거는 언제나 사먹으면 되지만 군대리아 햄버거는 돈 주고도 못 먹는 소중한 추억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체험을 하면서 내가 군인이 되었으면 멋진 군인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해본다.
  국토대장정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와서 사람들에게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 중 하나가 “너 계룡대 가봤어? 거긴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장성들이 하도 많아서 별 하나 단 장군들도 식판 들고 뛰어야하는 그런 곳이야”  물론 허풍이 조금 들어가기는 했지만 이날 오후 6시쯤 계룡대에 입성했을 때 나는 남한에서 제일 큰 군 기지이며 계룡시 시민 반 이상이 여기 계룡대 안에 살고 있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믿을 수 없는 대단한 규모의 철통보안 지역인 계룡대를 체험할 수 있었다.  사슴 어미와 새끼도 자유롭게 뛰노는 아름다운 계룡대. 여기가 혹시 포화속 천국이 아닐까. 이날 저녁 우리는 샤워도 호텔급 사우나 같은 곳에서 했고 최고급 군대시설에 눈을 어디에 두어야할지 몰랐다.      

[6일차, 6.30 수]  
   아침, 점심식사를 모두 계룡대에서 해결 한 뒤 대통령께서도 가끔 오셔서 회의를 하신다는 계룡대 대회의실에서 우리는 대한민국 육해공군 지휘본부인 계룡대에 대하여 설명을 들었다.  시원한 회의실 룸에서 편한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듣고 있어서 그런지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대원들도 많았지만 육해공군 장교 분들의 압도하는 카리스마와 스크린에 나오는 대한민국 병력의 화려함 앞에 차마 나는 눈을 감을 수 없었고 대한민국 육해공군 장병의 나라를 위한 책임정신에 우리는 감사의 마음으로 숙연해졌다. 이날 오후, 우리는 대전 현충원에 도착하였고 거기에서 우리는 또 한 번 호국영령들의 희생정신에 마음깊이 고마움을 느꼈다.

[7일차, 7.1 목]
   오늘도 어김없이 6시에 기상하여 나는 제일먼저 구급차에 가서 아침환자대원들을 맞이했다.  이젠 물집치료와 압박붕대는 당연한 아침치료가 되어버렸고 봉사정신 충만하게 조금씩 변해가는 나의 모습이 한편으로는 뿌듯했다.  영화 “라이언일병구하기”에서 나오는 의무병의 목숨 건 전쟁터에서의 치료처럼 나도 뭔지 모른 희열과 6·25전쟁의 참화 속에서 의무병 같은 착각 속에 자신만의 사투를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행군은 계속되었고 충청도 보은에 있는 소나무 숲에 도착한 우리 대원들은 재향군인회 여성회에서 정성스레 준비하신 슈크림 빵과 포도쥬스를 마시며 울창하게 솟아있는 소나무들을 뒤로하고 기념사진을 연방 찍어댔다.  이젠 아무대서나 앉아서 먹고 물병을 돌리는 우리들의 모습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웠고 6·25전쟁 중 우리 군인들도 전쟁터에서나 피난 중 주먹밥과 수통을 서로 돌리며 나누어 먹는 전우애를 생각하니 입가에 미소가 돌았다.  숙소에 도착한 우리 107명의 대원들은 이날 차가운 물로 샤워를 했는데 단 한명도 찡그리거나 불평하는 대원들을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은 벌써 동료애로 똘똘 뭉치고 있었고 차가운 물을 등에 지고 서로의 등을 씻어주며 담소를 나누는 여유까지 보였다.  

[8일차, 7.2 금]
   날씨가 이상했다.  아침에 일어나니 날씨가 굉장히 흐렸고 금방이라도 비가 올 기세였다.  나의 예상은 적중했고 점심 먹고 오후 1시쯤부터는 비가 억수로 내리기 시작했다.  다른 대원들은 비가 많이 오면 시원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들뜬 모습 이였지만 나는 비가 오면 물집환자대원들이 많이 생길 것이란 것을 알기에 나만의 전투상태에 돌입했다.  오마이갓! 스포츠 샌들을 집에서 가지고 오지 않은 대원들이 생각 외에 많았고 비가 그치자 물집환자들이 속출했다.  많은 환자들 사이에 안보팀 김00 대원이 있었고 11박12일중 유일하게 응급실로 후송시켰던 심각한 환자가 있었던 날로 몸과 마음이 무척 분주한 하루였다.  
   하지만, 이날은 나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왜냐하면, 역사책에서만 보았던 낙동강 구 철교를 보았기 때문이다.  6·25 전쟁 중 최후의 전선 방어선이었던 낙동강에서 수많은 젊은 피가 오직 나라사랑하는 마음하나로 이 전선을 지키기 위해 낙동강물이 시뻘건 물로 변할 정도로 치열하게 싸웠을 것을 생각 하니 마음이 무거웠고 생각보다 작았던 크기의 낙동강 물에 호국영령들의 영혼들이 우리들을 올려보며 힘내라고 응원해 주는 것 같아서 다음 목적지로 가는 발걸음에 힘이 들어갔다.  국토대장정 11박12일 동안에 내가 손꼽는 전적지중 가장 치열한 전적지인 낙동강 구 철교를 평생 잊지 못하리..

[9일차, 7.3 토]
   주말이 돌아왔다.  날짜와 요일을 잊어버린 지 오래였고 9일차라는 사실만 생각했던 걸로 기억한다.  몸과 마음은 이미 90%이상 군대 같은 생활에 적응한 상태였고 여기까지 같이 걸어온 나와 107명의 대원들이 자랑스러웠다.  9일차.. 이날이 12일중에 최고 기온의 날씨를 자랑했던 날로 기억한다.  전날에 비가 많이 와서 그런지 오늘은 구름이 많아 날씨는 흐렸지만 가을처럼 서늘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나의 걱정은 어제 응급실로 보냈던 김00 대원이었고 감염은 아니지만 호전을 보여 당분간 차를 타고 이동하면 문제없을 것이라는 말에 나는 깊은 안도의 숨을 쉬었다.  
   다부동 전적기념관에서 당시의 사진들을 보며 나는 수많은 희생자를 낸 이 참혹한 비극이 다시는 이 땅에서 일어나면 안 될 것이라 생각했고 나라를 구하고자 자기 목숨을 바친 호국영령들의 애국심처럼 우리도 나라가 위급상황이 되었을 땐 자기목숨도 버릴 수 있는 나라사랑정신을 마음속 깊이 새겼다.  애국심으로 재충전된 우리 대원들은 다음 목적지인 제2작전 사령부로 행군을 시작했다.
   대구 제2작전 사령부에 도착한 우리 대원들은 계룡대 만큼이나 큼지막하고 늠름한 부대에 연방 감탄의 함성을 지르며 의장대 시범을 보러 운동장 포디엄에 앉았다.  어디서 4성 장군과 악수를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장군님과 함께 멋진 의장대 시범을 관람하였고 나중에 대원들 한명씩 장군님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날 숙소는 시원한 에어컨바람과 함께 아주 쾌적하게 취침을 취했다.  숙소에서 대원들은 팀별로 삼삼오오 모여앉아 게임도하고 과자도 먹으며 회포를 풀었고 나는 1, 2일차의 난민 같았던 우리가 동창회 파티 같은 왁자지껄 해피한 분위기로 바뀔 줄 누가 알았으랴. 내심 웃음이나왔다.      

[10일차, 7.4 일]
   아침에 행군을 시작하기 전 심각한 발목통증을 호소하던 호국팀 강00 대원은 결국 오전 8:30에 구급차를 타고 이동하였으며 오늘의 종착지인 육군 3사관학교까지 계속 탑승해야만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늘 역시 대체적으로 흐리고 시원한 바람이 많이 불어 행군하기 최상의 조건이었다. 그래서 우리들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었고 발걸음 역시 가벼웠다. 하지만, 영천지구 전토 전승비에 도착했을 무렵 밖의 날씨는 상당히 더웠으며 우리는 더위도 식힐 겸 벤치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했다.  전승비에 참배를 하고 난후 우리는 재향군인회 여성회에서 준비한 시원한 수박과 점심식사를 하였다.  
   어린 시절에 군인을 무척 동경하여 고등학교 졸업 후 잠깐 미국 사관학교에 다녔던 적이 있는 나는 육군 3사관학교에 도착해서 한국의 사관학교 생도들 및 예비 장교들이 미국 사관생도 못지않은 절도 있는 동작과 늠름한 자태가 무척 보기 좋았다.  또한, 대한민국 국가안보의 미래가 그들로 인하여 발전하고 수준이 높아지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했다.  3사관학교에서의 채류하는 동안 대원들의 빨래도 빨아서 건조까지 시켜주었으며 환자치료 역시 (물집부터 피부병까지) 풀 서비스로 지원해주셨다.  모든 숙소들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이었다.

[11일차, 7.5 월]
   드디어 또 새로운 한주가 시작되었다.  나를 포함하여 많은 대원들이 오늘이 행군은 마지막이라는 사실에 모두 들떠있었다.  나도 역시 오늘은 6.25 당시 군인들을 생각하며 완전무장을 하고 걷기로 결심하였으며 스텝들은 원래 메지 않는 배낭을 짊어지고 힘차게 행군을 시작하였다.  다른 대원들이 왜 배낭을 메고 걷느냐 라고 물었을 때 나는, “1일차부터 계속 쉬지 않고 걷기는 하였지만 마지막 걷는 날에는 완전무장을 해서 걸어봐야 나중에 후회 없는 국토대장정이 되었노라” 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대답하였다.  역시 배낭을 메고 걷는다는 것은 그냥 걷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으며 그동안 나에게 물집이나 무릎 통증을 호소하던 대원들 얼굴 하나하나가 주마등처럼 내 머리를 스쳐가면서 마음 한구석에는 그들에게 약간 미안함 감도 없지 않았다.  
   영천 국립 호국원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영령들을 모시는 국립묘지의 웅장함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안내자께서 호국원의 면적은 약 36만 9,000평방미터로 2만 2,000여기를 안장할 수 있는 묘역과 1만 2,000여기를 안치할 수 있는 납골당 시설이 있다고 설명해주셨다.  참배를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시원한 한줄기 바람이 내 얼굴을 스쳐갔다.  꼭 호국영령들이 와주어서 고맙고 기특하다고 내 볼을 쓰다듬어 주는 것 같아 야릇하고 영롱한 기분을 느꼈다.  또한, 우리 스텝들은 이곳에서 점심식사를 하며 답사단장님의 생신을 축하했고 생신 선물로 준비한 생크림 케이크와 피자를 다른 대원들과 함께 나누어 먹었다.  서로 나누어 먹으면서 한입 한입 챙겨주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고 이것이 바로 진정한 동료애라고 생각했다.
   다음 목적지인 포항 학도의용군 전승 기념관에서는 요즘 영화관에서 상영하는 영화, “포화속으로”의 소재인 낙동강 최후 방어선에 육군 제3사단 소속 학도의용군 71명이 포항여중에서 단독으로 전투에 참전하여 김춘식외 47명이 산화한 곳이며 전국에서 제일 많은 학도의용군이 희생된 격전지를 기념하는 곳으로 학도병들의 희생정신에 나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특히 죽음을 앞두고 어머니께 쓴 중3 이우근 학도병의 편지가 새겨진 돌비석에 한동안 눈을 띠지 못하였다.

어머님!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저 많은 적들이 저희들을 살려두고 그냥은 물러갈 것 같지가 않으니까 말입니다.
어머님 죽음이 무서운 것은 결코 아닙니다.
어머니랑 형제들도 다시 한번 못만나고 죽을 생각을 하니
죽음이 약간 두렵다는 말입니다.
허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돌아가겠습니다. 왜 제가 죽습니까.
제가 아니고 제 좌우에 엎디어 있는 학우가
제 대신 죽고 저만 살아가겠다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천주님은 저희 어린 학도들을 불쌍히 여기실 것입니다.
어머님 이제 겨우 마음이 안정되군요.
어머님 저는 꼭 살아서 어머님 곁으로 달려가겠습니다.
웬일인지 문득 상추쌈을 개걸스럽게 먹고 싶습니다.
그리고 옹달샘의 이가 시리도록 차거운 냉수를
벌컥벌컥 한없이 들이키고 싶습니다.

 나는 이 편지내용을 속으로 낭독하며 죽음 앞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전쟁이란 다시는 일어나면 안 되는 무시무시한 것이구나! 라고 생각하며 한동안 그 자리를 뜨지 못하였다.  재향군인회 여성회에서 준비해주신 시원한 수박을 순식간에 해치우고 나서 우리는 오늘 마지막 종착점인 포항 해병대를 향하여 힘차게 걸음을 재촉하였다.  
   드디어 오후 5시쯤 우리는 마지막 숙소가 될 포항 해병대에 도착을 하였고, 해병대 부대의 첫인상은 말로만 들었던 귀신 잡는 해병 바로 그것이었다.  20미터는 족해 보이는 레펠 타워는 물론이고 곳곳에 해병대의 위상을 드높이는 문구들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구나 해병이 될 수 있다면 나는 해병대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러 가지 문구들 중에 이 문구는 해병대원들의 자존심과 그들만의 기백을 잘 나타내 주는 것 같아서 나는 사진기에 얼른 담았다.  연병장 곳곳에 보이는 해병들이 너무 멋지고 샤프해보였으며 군기 충만한 그들을 보니 든든한 국가안보에 마음이 한결 놓였다.  
   이날 밤, 우리는 해병대에서 기다리고 기다리던 전야제를 즐겼고 중간에 나는 다른 스텝들과 함께 스테이지에 올라가 설운도의 “사랑의 트위스트”를 힘껏 불렀다.  많은 대원들이 나에게 이런 끼 있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라고 칭찬해주었고 나는 불굴의 군인정신으로 열심히 했다고 말하며 전야제를 함께 즐겼다.  전야제가 막바지에 다다르자 우리는 캠프파이어에 불을 붙였고 술이 조금씩 들어가니 그동안 차마 하지 못했던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렇게 우리의 마지막 밤이 장작불과 함께 아름답게 흘러갔다.          

[12일차, 7.6 화]
“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
- 맥아더 장군.  
어느 날 북한이 남한을 쳐들어 왔다.  
그래서 한국을 도와주러 한국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경상남도 일부만 남기고 모두 점령당해 있었다.  
그 때 맥아더의 군사작전은 인천 상륙 이었다 그래서 인천 앞바다를 향해 일제히 공격했다.
  작전은 대 성공이었다.  
맥아더는 아예 통일까지 생각했지만 미국 대통령은 세계대전이 또 일어나지 않을까 염려하여 맥아더를 사령관직에서 해임하였다.
이렇게 미국의 맥아더 장군은 한국 통일을 누구보다 소망했던 사람 중에 한사람이다.  

   마지막 날 부산 UN 기념공원에서 참배를 하며 수많은 UN군의 젊은이들이 우리나라를 위해 희생되었음을 알게 되었고 6.25전쟁을 통하여 우리나라는 참 많은 나라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했다.  특히 제일 많은 병력을 파견하고 희생한 미국에게 우리는 항상 감사의 마음을 갖아야한다고 생각한다.      
   부산에서 대조영함에 승함을 한 후 해단식을 끝으로 우린 11박 12일의 짧고도 길었던 6·25전쟁 60주년 대학생 전적지 답사 국토대장정의 막을 내렸다.  

   이번 6·25 전쟁 전적지 답사 국토대장정 중에서 주로 발생한 여러 가지 응급상황에는 물집, 근육통, 화상, 변비, 설사, 피부병, 생리통, 빈혈, 그리고 구토감 등이 있었지만 그중에 90%이상이 물집과 근육통 이였다.  두 가지 모두 장시간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걸어서 생긴 것으로 새삼 느끼게 된 것은 물집과 근육통을 이겨내는 여자대원들의 강인한 정신력 이였다.  우리는 이제까지 여자들은 남자보다 약하다라는 편견이 있지만 이런 편견들이 없어져야한다고 생각하였다.  물론 여자 발은 남자 발보다 연약하고 부드럽다 그래서 똑같이 걸었을 때 여자가 남자보다 작고 큰 물집들이 생기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인간의 참 모습은 역경을 겪고 있을 때 본모습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해병대 지원자들처럼 우리 108명의 대원들은 모두 자가 지원을 해서 1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선발된 정예대원들이다.  그만큼 대원들 한명 한명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완주하길 소망했고 물집이나 근육통 따위는 잊어버린 지 오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완주에 대한 애절한 욕망이 남자 대원들보다 여자대원들이  한층 더 컸다는 것이다.  환자 70%이상이 여자대원들이었고 몸은 비록 그들에게 “NO!” 라고 했지만 그들의 정신력은 “YES!”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몇 가지 사례들이 있었다.
   첫 번째 사례.  안보팀 김00.  이 여자 대원은 3일차부터 구급차를 자기 집 드나들듯 자주 애용했던 대원중 한명 이였다.  증상이 구토감과 현기증 이었는데 오랜 도보에는 어떻게 보면 치명적일 수 있다는 판단아래 구급차로 이동을 결정하였다.  아래 눈꺼풀을 뒤집어보니 핏기가 없어서 물어보니 고등학교 때부터 빈혈 약을 복용하고 있었으며 월경불순도 오랫동안 앓고 있다고 했다.  김 대원은 구급차를 타면서도 다른 대원을 걱정하며 몸이 조금 나아질 때면 매번 다시 대원들에게 합류했던 웃음을 잃지 않는 정신력 강한 대원으로 기억한다.  마지막 날 해단식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환하게 웃는 김 대원의 모습이 참 아름답게 보였다.
   두 번째 사례.  호국팀 강00.  이  여자 대원은 강인한 마음이 몸을 지배한다는 예가 제일 어울렸던 대원 이였다.  4일차 물집과 발톱통증에 시달려 구급차를 방문했을 때 그 후 일어날 상황에 대하여 아무도 추측하지 못했다.  많은 대원들이 물집이나 발바닥통증에 시달리게 되면 걷는 자세를 바꾸려고 한다.  그래서 그동안 생각하지도 못했던 다른 통증을 초래하기도 하는데 강 대원이 그런 케이스였다.  강 대원이 5일차 구급차를 다시 방문했을 때에는 발목통증을 호소했는데 한눈에 딱 봐도 이 대원은 걷기 어려워보였다.  하지만 강 대원은 끝까지 완주하길 누구보다 소망하고 있었고 혹시 낙오시킬까 아픔을 참고 또 참으며 걷고 또 걷다가 구급차에 타기를 마지막 날까지 계속했던 강한 정신력의 소유자였다.  그녀가 나에게 무슨 일이 있더라도 걸을 수 있게만 해달라고 하며 절대 포기 할 수 없다고 했다.  끝까지 함께했던 강 대원의 강인한 정신력에 감탄의 박수를 보낸다.
   마지막으로 안보팀 김00.  그녀는 밤에 응급실로 후송시켰던 가장 심각했던 응급환자로 기억될 것이다.  언제나 의료팀은 환자대원의 몸 상태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마음자세로 인지해야하며 외부의 세력에도 굴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환자의 목숨과 미래는 결국 우리 결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김 대원은 8일차 비가 많이 와서 우비와 샌들을 신고 도보했던 그날 밤에 처음 구급차를 방문했다.  처음 그녀의 발바닥을 보고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물집들이 터지다 못해 찢어져 피 범벅이 되어있었으며 다른 쪽 발은 색깔이 감염의 우려가 있는 보라색을 띌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던 대원 이였다.  발에서 피는 뚝뚝 떨어지는데 김 대원은 시종일관 그 특유의 눈웃음으로 오히려 우리를 안심시키며 걸을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발바닥에 느낌이 없다는 말에 나는 그 심각함을 인지할 수 있었고 간단한 소독을 마친 뒤 단장님과의 상의 하에 김 대원을 응급실로 후송시켰다.  다음날 그녀는 웃는 모습으로 심각한 감염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녀의 정신력에 새삼 고개가 숙여졌으나 걷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되어 마지막 날까지 차로 이동하였다.  행군간 쉴 때마다 나와서 대원들을 응원하고 사기를 북돋아 주는 동료애가 참 보기 좋았다.    
   나도 4일차 아침 동원 훈련소에서 샌들 신은 맨발이 문턱에 걸려 엄지발가락이 찢어지는 찰과상을 입었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여자 대원들만큼 나도 정신력이 강했을까 새삼 돌아보게 된다.  또한 남자대원들도 지칠 줄 모르는 정열과 패기로 큰 문제없이 완주하였다.  단지 아쉬움이 있다면, 남자대원중 한명이 2일차 되는 날 심각한 다리 근육 마비와 통증 때문에 끝까지 완주하지 못하고 낙오된 것에 대해서 큰 아쉬움이 남는다.
  
   물집 따위는 그들을 막지 못했다.  
모든 고통과 역경을 이겨내고 3기 대원들은 인생에 그들만의 새 역사를 썼고 지칠 줄 모르는 불굴의 도전 정신과 인내와 끈기 그리고 조국사랑과 동료애를 배웠다.  그리고 다시는 이 땅에 6·25 전쟁과 같은 동족상잔의 비극이 생기면 안 된다는 것과 또한, 이번 국토대장정을 통하여 아무런 보답을 바라지 않고 우리나라를 도와준 수많은 UN군들의 평화를 위한 희생정신과 1950년 6·25 전쟁당시 우리 젊은이들의 애국심으로 무장된 용감한 기개와 자신감 넘치는 패기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조국을 지킬 수 있었고 지금과 같이 잘사는 우리나라가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현재의 우리 젊은이들이 이러한 정신을 받들어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지키고 세계제일의 꿈과 희망이 가득한 나라를 만드는 것이 앞으로 우리들이 해야 할 몫이 아닐까.(konas)

이동엽 (John Dongyeop Lee, 원광대학교 한의학전문대학원)

안보가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선다
관련기사보기
facebook twitter 인쇄하기 책갈피저장 메일보내기
소셜댓글
로그인선택하기 트위터 페이스복
원하는 계정으로 로그인 후 댓글을 작성하여 주십시요.
입력
    • 입력 된 100자 의견이 없습니다.
1
    2018.11.17 토요일
핫클릭 뉴스
포토뉴스 더보기
깜짝뉴스 더보기
퇴사 후 꼭 챙겨야 할 국가지원제도 5가지!
2017년 한국고용정보 자료에 의하면, 직장인 2명 중 1명은 퇴사를..
세상사는 이야기 더보기
아빠, 아빠! 세영이 먹고 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