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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자원 병역이행 병사 군생활 수기⑱] 힘내라 아홉수! 더욱 찬란할 내 인생 제3막을 위하여

Written by. 조용경   입력 : 2016-09-21 오전 9:5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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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내용은 병무청이 주관한 「지원 병역이행 병사 군생활 수기 2016」산문 / 질병치유·학력변동 부문 ‘최우수’ 글이며, 자원입대한 병사들의 계급은 체험수기 응모 당시의 계급임(편집자 주)

“아홉수 힘내라!”

 4월의 유격훈련, 산악 외줄타기를 하는 도중 별안간 들린 응원소리에 하마터면 줄에서 떨어질 뻔했다. 스물아홉 살, 20대의 마지막을 군대에서 보내고 있는 나를 우리부대 전우들은 ‘아홉수’라며 놀린다. 발끈한 나는 젖 먹던 힘까지 내어 외줄을 넘어 보지만 결국 목표지점을 몇 발짝 남기고 그만 줄에 대롱대롱 매달린 ‘통닭’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분명 옛날에는 안 이랬는데 나이는 어쩔 수 없나보다.

 1년 넘게 군 생활을 하면서 가족이 돼버린 요 꼬맹이들은 매일같이 내 속을 썩이고 나와 티격태격하지만, 그래도 이놈들의 응원 덕분인지 이번 유격훈련은 열외 한 번 없이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군대가 아니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사람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것부터가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모두의 축하를 받으며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하는 것으로 내 인생 제1막은 잘 끝났다. 하지만 거침없어야 했을 내 20대는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 적성에 대한 고민없이 이름만 보고 선택한 법학이라는 학문에 도무지 정을 붙일 수가 없었다. 대학 합격이라는 큰 목표를 달성한 이후의 공허감 역시 나를 괴롭혔다.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진지하게 묻고 싶었지만 사법시험이 곧 폐지된다는 초조함이 가득했던 학교의 분위기는 내게 그런 질문을 할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떠밀리듯 시작한 사법시험 공부는 수능 때처럼 뜻대로 풀리지 않았고, 선발 인원은 해마다 200명씩 줄어드는데 공부를 해도 해도 떨어지고 또 떨어졌다. 수험 생활은 타성에 젖어 쳇바퀴처럼 굴러갔다. 언제부턴가 학원에 가서는 딴 생각을 하고, 독서실에 가는 대신 PC방을 가고, 천 원짜리 고시촌 커피를 먹으며 친구들과 하루 종일 수다를 떨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 유명한 ‘신림동 고시 폐인’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덧 20대 후반이었다. 슬슬 군대 문제가 부담이 되기 시작했다.

 사실 군대에 대해서는 남들보다 부담이 덜한 편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잘 크던 키가 갑자기 크지 않았고, 의아한 마음에 성장판 검사를 하던 도중 왼쪽 발목에서 종양을 발견했다. 성장통으로만 생각했던 만성 통증은 사실은 그 종양으로 인한 통증이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2007년의 징병검사에서 4급 보충역 판정을 받았고, ‘여차하면 사회복무요원으로 복무를 하면서 계속 공부를 하자’고 생각해 왔었다.

 하지만 2012년 재징병검사를 받으면서 그런 생각은 ‘되도록이면 현역으로 복무하자’는 것으로 바뀌었다. 첫 재징병검사에서 의사는 내 진단서를 보고 한참을 고민하더니 3급 판정을 주었다. 당황해서 항의하는 나에게 그는 어려운 의학용어를 써가며 자신의 소견으로는 군복무에 무리가 없고 더 이야기할 게 없으니 불만이 있으면 항소절차를 밟으라고 하였다. 그 후 재검사를 통해 다시 4급을 받았지만, 이 사건은 내 몸의 상태를 다시 생각해보고, 현역 복무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따지고 보면 내 몸은 행군 등 몇 가지 제약을 빼놓으면 군 복무를 하기에는 크게 무리가 없었던 것이다. 한편으로 술자리에서 고개를 뻣뻣이 세울 만한 자랑거리 한 개 정도 만들고 싶다는 어린 마음도 있었다. 그러면서 ‘진로를 확정지은 후에는 자원해서 입대하자’는 막연한 목표를 세우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실패는 이어졌다. 2013년, 사법시험을 포기하고 도전한 로스쿨 입시에서조차 쓴잔을 들이키면서 패배감은 더욱 커져만 갔다.

 2014년의 입시에서는 한 로스쿨에 합격할 수 있었지만, 원하는 로스쿨에는 결국 모두 떨어졌다. 언제부터인가 실패하고 좌절하는 것에 익숙해진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새로 시작하고 싶어졌다. 맥주를 마시면서 아버지가 문득 말씀하셨다. 군대나 가보지 않겠냐고. 막연히 생각했던 이전의 목표가 생각났다. 그래. 일단 군대를 가자. 군대에 가서 지금의 실패를 모두 잊고 새로 시작해 보자.

 다음날, 친구들은 난리가 났다. 내 말을 들은 친구들은 모두 똑같은 말을 했다. “니가 드디어 미쳤구나.” 안 그래도 7년째 대학도 졸업 못한 사람이, 사회복무를 하면서 가질 수 있는 시간적·정신적인 이익을 모두 제쳐두고 자원입대를 한다는 것은 너무 터무니없다는 것이었다. 군대를 다녀온 친구들은 내가 늦은 나이에 군대를 가서 겪게 될 여러 시련들을 너무 쉽게 생각한다며 나를 나무랐다.

 그런데 이런 만류를 들으니 오히려 오기가 생겼다. 이익을 계산하기에 앞서, 군 복무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하다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하나의 자랑거리가 아닌가? 그리고, 내가 건강하고 당당한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군 복무보다 더 좋은 것은 없지 않은가? 더 이상 작은 제약을 핑계로 회피하기 싫었다. 미래를 핑계로 포기만 해왔던 내 20대, 한 번쯤은 실리를 계산하지 않고 내키는 대로 질러보고 싶었다. 그렇게 내가 사회복무를 할 것이라고 다들 예상하던 때에, 나는 네 번째 신체검사를 받았고, 3급으로 현역병 입영대상자가 되었다.

 그 후, 신기하게도 내 군 입대를 반대하던 친구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그렇게 말리던 친구들이 내 선택을 격려하고 축하해 주었다. 그리고 미리 군 생활을 경험한 선배가 되어 입대 준비물부터 선임에게 잘 보이는 법, 들키지 않고 소위 ‘꿀 빠는 법’까지 온갖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남자 셋이 술자리에 모이면 꼭 한다는 군대 얘기, 항상 흘려만 왔던 그 얘기들이 진지하게 귀에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2015년 3월 3일 나는 입대했고, 450여일 째 군 복무를 이어오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그 동안 자원입대를 단 한순간도 후회하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최전방 포병부대에서 복무하면서 말로만 들어왔던 ‘군대 추위’와 싸워야 했고, 행정병이 되어 많은 업무와 스트레스에 시달리면서도 ‘편한 보직’이라는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했다.

 특히 ‘나이 많은 고학력자’라는 나의 위치는 군 생활에 있어 큰 도움을 주었지만, 한편으로는 고통스러운 편견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가짜 휴가를 만들어 달라는 선임의 부당한 지시에 저항했다가 나이 가지고 유세 떤다는 모함이 포대 전체로 퍼진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 복무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었던 많은 값진 경험들 때문에, 나는 다시 과거로 돌아가더라도 주저 없이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지난해 8월 20일 연평도 포격도발 사건 때, 여차하면 실제로 죽을 수도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실탄을 장전하고 일주일 동안 포상에서 대기하면서 ‘나의 조국은 내가 지킨다’는 결연한 의지를 다졌다.

 대대전술훈련을 가서는 14일 동안 훈련장 텐트에서 있으면서 제대로 씻지도 못한 채 주먹밥만 먹으면서 집과 가족의 소중함을 온몸으로 느끼기도 했다. 집에서 출근하면서 사회복무요원으로 일했다면 절대로 경험하지 못했을, 사회에 있을 때는 상상도 못했을 많은 경험들을 2년간 하면서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한층 성숙해질 수 있었다.

 무엇보다 값진 소득은 2년 동안 만난 수많은 사람들과 그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경험이었다. 군에 입대하고 나서 다양한 곳에서 온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공통분모가 없는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하고 각자의 사연을 나누면서 깊은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신병교육대에서는 여섯 번이나 수능을 실패하고 일곱 번째 재도전을 준비하는 진균이를 만났다. 자대에 와서는 집안 사정으로 미국 유학이 좌절됐지만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는 동회가 있었다. 서른한 살 윤종혁 병장님은 아직도 래퍼의 꿈을 버리지 않고 휴가 때마다 새로운 곡을 만들어 들려준다.

 이런 전우들에게 내 실패 경험과 공부 방법,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진심으로 조언해 주면서 내가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 줄 수 있다는 사실에 뿌듯했다. 나 역시 이들의 꿈과 노력을 보면서 꿈 없이 살아왔던 나 자신에 대해서 반성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들을 겪어 나가면서, 대학시절 가지고 있던 나태함과 패배주의가 점점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다른 환경에 놓이게 되니, 지금까지 타성에 젖어 살았던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 내가 추구해야 할 가치가 무엇이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 많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내게 주어진 2년이라는 군 복무시간을 좀 더 활용하고 싶어졌다.

 매주 토요일 동아리 시간을 이용해서 영어공부를 하고, 하루에 법학적성시험문제 한 지문씩 푸는 등 짬짬이 시간을 내어 로스쿨 입시 준비를 다시 시작했다. 그렇게 군 생활을 한지 1년이 지나갈 무렵 큰 선물을 받았다. 연세대학교 로스쿨에 합격한 것이다.

 나는 물건을 잘 잃어버린다. 어제도 온 관물대를 뒤졌는데도 끝끝내 나오지 않았던 나라사랑카드가 알고 보니 내가 입은 활동복 주머니 안에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렇게나 노력해도 되지 않던 일이 막상 내려놓고 나니 허무할 정도로 쉽게 풀리는 경우가 있다. 20대의 끄트머리, 거듭되는 실패에 질린 나는 모두 내려놓기 위해 군대에 왔다.

 그리고 군대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그러자 지금까지 아무리 찾아도 오지 않던 것들이 나에게 오기 시작했다. 물론 연세대 로스쿨 합격이 끝이 아니다. 오히려 이제 시작일 뿐이다. 하지만 인생 제2막의 끝에서 선택한 자원입대라는 ‘자충수’는 힘차게 인생 제3막을 시작할 수 있는 ‘신의 한 수’가 되어 돌아왔다.

 스물아홉의 군인. 오늘도 생활관 동기들은 전역하고 30일 후면 서른이라면서 나를 놀린다. 이제 아주 내 전역일이 아니라 서른 살이 되는 날을 세어 주고 있다. 그래, 나는 올해 아홉수 군인이다. 하지만 내 아홉수는 삼재가 닥친다는 그 아홉수는 아닌 것 같다. 오히려 화려한 인생의 제3막을 알리는, 다사다난했지만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될 제2막의 피날레이다.

 그리고 그것은, 가장 힘들었던 순간에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었던, 그리고 그로 인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게 해준 ‘군 자원입대’라는 한 번의 무모했던 결정 덕분이었다. 늦은 나이에 군대에 와서 별의별 경험을 다 하고, 별의별 사람들을 만나고, 덕분에 별의별 패배의식을 다 떨쳐낼 수 있었다. 그리고 연세대 로스쿨 합격이라는 결실을 얻을 수 있었다. 내친 김에 올해는 좀 더 큰 꿈을 꾸고자 한다.

 올해 나의 목표는 서울대 로스쿨 합격이다. 어차피 전역까지 시간도 남았겠다 망설일 것은 없다. 자신감을 가지고 도전한다면 안 될 것이 무엇이며, 안 되면 또 어떠랴. 이미 나에게는 군 생활을 통해 얻은 자신감과 나와 함께하는 많은 전우들이 함께 있는데 말이다. 이제는 내가 내 자신에게 말해줄 것이다. “힘내라 아홉수!”(konas)

30기계화보병사단 315포병대대 상병 조용경

안보가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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