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연평해전의 여섯영웅을 추모하며!
영관장교 연합회, 제2연평해전 10주기 추모 사진전 열어
제2연평해전이 10주기를 맞고 있다. 10년 전인 2002년 6월 29일 오전 10시 25분경, 북방한계선 북측 해상에서 북한의 꽃게잡이 어선을 경계하던 북한 경비정 2척이 남측 북방한계선을 침범, 선제 기습포격을 가해 우리 해군 고속정 참수리 357호의 조타실이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다. 이때부터 양측 함정 사이에 25분간의 교전이 이어졌다.
이 교전으로 우리 해군 윤영하 소령, 한상국 중사, 조천형 중사, 황도현 중사, 서후원 중사, 박동혁 병장 등 6명이 전사하고, 19명이 부상당했다.
제17회 월드컵축구대회 폐막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우리 국민들은 월드컵에 열광했고 북한의 도발에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심지어 당시 김대중 대통령조차 이들의 죽음을 외면하고 폐막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유족들은 분노했다. 누구를 위한 죽음인데 국가가 이렇게 무책임할 수 있단 말인가? 아들을, 남편을 가슴에 묻은 유족들의 슬픔은 아직도 가시지 않았다.
제2연평해전 10주기를 앞두고 대한민국 육·해·공군·해병대 영관장교연합회(회장 권오강)가 이들의 고귀한 희생을 애도하고 국민들의 안보의식을 고양하기 위해 사진전을 열고 있다.
지난 4월2일부터 오는 7월15일까지 김포공항, 청주공항, 김해공항, 제주공항, 여수공항, 인천공항, 오두산 평화전망대, 재향군인회관 등에서 열리는 추모사진전은 전사자 6명의 초상화와 흉상, 참수리 357호 인양 및 전시장면, 희생된 장병 6명의 이름을 딴 고속함 인수식 사진 등이 전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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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은 故 박동혁 병장의 모친이 국군수도통합병원에서 생(生)과 사(死)를 넘나드는 아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쓴 육필수기임.(주간조선 글 일부 인용)
“아들아 잘 지내고 있니. 오늘도 엄마는 너의 이름을 불러본단다. (네가) 너무나 아파했기에 쓰리고 저미어 오는 가슴 가눌 길이 없구나.
중환자실에서 너의 모습은 상상도 할 수 없이, 눈 뜨고는 볼 수가 없었어. 성한 데라고는 머리하고 왼손뿐이었어. 22개나 되는 링거줄에 의지하고 수많은 기계들. 3일 만에 죽었다가 심폐기능(소생) 기술로 살아났다고 하더라.
한 달 되어가면서 의식을 찾은 내 아들. 왼쪽 다리 빼고 파편 때문에 대장은 망가졌고 소장은 일곱 군데 꿰매고 배는 오픈시켜 반창고로 붙여놨고 허리는 끊어졌고 왼쪽 척추에 큰 파편이 있고 화상으로 인해서 푹 패어 그 밑에 인공항문.
오른쪽 다리엔 신경이 다쳤는지 감각도 없고 여기저기 파편 조각들이 상처를 내고 오른쪽 어깨에 총알이 들어있다. 뱃속에는 파편 쪼가리가 100개가 더 있다고 하더라.
깨어나면서 찾아오는 고통을 어찌 말로 할 수 있을까. 입을 벌리면서 통증을 호소하니까, 입술이 찢어졌다. 날마다 떨어지는 저혈압. 수없이 수혈해도 혈소판은 떨어지고 생과 사가 왔다갔다 한다. 교전 때 입은 충격일까. 총알이 날아오고 죽은 대장님이 달려든다네. 환청에 시달리며 눈이 빨갛게 부어 잠 못들고 통증과 고통에 시달리면서 힘들어 하는 아들의 모습. 내 손을 잡고 울부짖는다. 이 힘든 통증을 어이해야할지.
침상에 누워 꼼짝도 못하는 아들. 안쓰럽고 불쌍하고 처참했다. 다리가 없다는 걸 알았는지 왼손으로 엉덩이쪽을 만지면서 흐느낀다.
“엄마, 내 다리 어디로 갔어. 저리고 아프다.” “잠에서 깨어났는데 내 다리가 없어졌다.” 이런 현실 속에서 너와 우리 가족은 피눈물을 토했다. 네가 왜 총 맞고 병원에 누워있어야 하냐고 화가 나서 죽을 지경이다.
(너는) 물만 한모금 삼켜도 장출혈이 심했다. 밤이 되면 통증은 더 무섭다고 했다. 긴 밤을 꼼짝도 못하고 뜬눈으로 지새우는 아들. 뼈에 사무치는 고통 때문에 차라리 엄마가 아프고 싶었다. 건강하고 씩씩한 아들이었다.
무능력한 부모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너의 상처를 바라보며 사무쳐오는 슬픔을 되새길 뿐. 겨우 고개를 돌려 문쪽만 바라보는 아들. 아빠 엄마 오기를 기다리는 모습이 정말 가슴이 아팠다. 불쌍하기도 하고. 이런 속에서 약간 호전되더니 점점 심해져 (2002년) 9월 1일 중환자실로 내려갔다. 주렁주렁 매달린 약병들.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많은 상처에는 도움이 별로 되지 못했다.
엄청난 상처를 뒤로 한 채 9월 20일 새벽, 저 멀리 하늘 나라로 가버렸다. 그 힘든 통증 속에서도 살아준 내 아들에게 고마웠다. 대전에 너를 묻고 쏟아지는 빗방울을 보면서 엄마는 왜 이리 슬프고 초라한지 서글퍼진다.
6월 29일 (국군)수도병원으로 간 우리 가족은 가을이 되어서 피멍진 가슴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 아들에 대한 보고픔, 웃음을 잃어버린 가족들, 내 젊은 아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2003년) 6월 11일 기다리던 아들의 제대 날이다. 대문을 열고 ‘나 왔어’(하는 소리가) 귀에 들어올 것만 같다. 문도 열어보고 대문 밖에 나가 서성거린다. 안절부절못하는 어미의 심정을 (누가 알까). 해가 뉘엿뉘엿 져도 아들은 오지 않는다. 북받쳐오는 설움에 남편을 붙들고 ‘왜 동혁이는 오지 않냐?’고 미친 사람처럼 목놓아 울었다.”(konas)
코나스 최경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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