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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종착역, 한반도 평화공존 ②

Written by. 김명배   입력 : 2012-12-22 오후 10:2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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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김일성의 남침준비와 소.중의 지원

 김일성이 남침전쟁의 승리를 자신할 수 있었던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하지 군정장관의 정치적 식견부족으로 인해 한국군은 치안유지를 위한 경찰수준의 병력에 불과했던 반면, 북한군은 전쟁수행 능력을 갖춘 10개 사단 규모의 정규군인 점에서 전투력에 있어서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둘째, 49.6월에 주한미군이 철수한 사실이다. 소련군은 48년도에 이미 철군했지만 국경을 접한 지리적 근접성으로 인해 언제라도 조기파병이 가능한 점에서 미군철수와는 근본적인 성격의 차이가 있었다. 김일성은 전격전 수행을 통해 미군이 한국에 복귀하기 전에 남한 전역을 점령할 수 있다고 자신했을 것이다.

 셋째, 50.1월 미 국무장관 애치슨이 발표한 ‘애치슨 라인’(Acheson Line)에 의하면 미국의 태평양 방어선이 알류산 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호주로 연결되면서 한반도와 대만이 제외된 점에서 스탈린도 김일성도 안심하고 남침전쟁을 야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애치슨 라인이야말로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를 깨닫지 못한 미국과 이를 숙지하고 있는 소련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부분이라 할 것이다.

 넷째, 2차대전 종전 후 미국은 이미 평시체제로 전환했음에 반해, 소,중, 북한은 군국주의를 표방하는 공산체제의 특성 상 전시체제가 상시화 되어 있는 점에서 스탈린도 김일성도 전쟁도발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다섯 째, 50.1월 김일성은 모스크바와 북경을 방문하여 스탈린으로부터 7개사단과 3개 기계화 사단의 장비와 탱크 250대, 항공기 150대의 지원과, 모택동으로부터 8로군에 소속된 8만5천 명의 조선 출신 병사 (항일전과 국공 내전에 참전한 전투경험이 풍부한 병사들로서 이들이 남침전쟁의 주력군으로 활약)를 인민군에 편입시키는 약속을 얻어 냈다.

 반면 남한군대는 대부분 자유를 찾아 남하한 월남 피난민으로서 전투경험이 없고, 당시 취직이 극히 어려운 남한사회에서 일종의 호구지책으로 군에 입대한 병사들이 대부분인 점에서 인민군과는 전투력에 있어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한 마디로 남한은 전쟁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는 상태에서 전쟁준비를 완료한 북한의 남침에 직면하게 되었다.

  4.  한국전쟁의 성격과 미.소간 전략의 차이

 한국전쟁은 작게는 북한이 남조선 적화통일을 기도한 민족 내부의 문제이지만, 크게는 한반도가 동서냉전의 전초기지인 점에서 미.소간 패권경쟁의 대리전의 성격을 띠고 있다.

 군사전략가인 스탈린은 세계공산화 혁명의 실현 차원에서 한국전쟁을 이용했다. 스탈린은 ‘애치슨 성명’을 통해 미국의 참전 가능성이 매우 낮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미국이 참전 안 하면 한반도 전체를 소련의 영향권 내에 쉽게 장악할 수가 있고, 설혹 미국이 참전하더라도 미군을 한반도에 가능한 한 오래 묶어 둠으로써 동 유럽은 물론 남 유럽으로 까지 소련의 영향력을 신장시키는 기회로 이용하려는 전략적 복안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소련의 유럽에서의 영향력 신장을 막기 위해 미국이 한국전쟁에 투입된 병력을 유럽으로 돌리기 위해 휴전협정을 서두르는 상황을 이용하여 협상에서 유리한 입지를 확보코자 하는 스탈린의 전략적 복안도 작용했을 것이다. 실제로 ‘NATO’를 신속히 강화하는 일이 미국으로 하여금 휴전협정을 서두르는 원인이 된 점에서도 스탈린의 전략이 주효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스탈린은 인구와 국토에서 엄청난 잠재력을 갖고 있는 중국이 한국전에서 국력을 소진함으로써 장차 공산권 내에서 계속적으로 소련이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전략적 구상도 갖고 있었을 것이다. 53.4월 스탈린의 사망 이후 급속히 중,소분쟁이 가시화 된 사실에서 이러한 분석이 뒷받침된다 할 것이다.  

 당시 중국 본토를 장악한 지 1년 밖에 안 되는 중국의 입장에서는 국내문제가 산적한 상황에서 한국전에의 참전여부를 결정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주은래 수상이 참전재고를 모 주석에게 수 차례 진언했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전략가인 모택동은 막강한 미국을 상대로 일전을 벌임으로써 중국인의 자긍심의 원천인 ‘중화사상’을 재현시키는 점에 비중을 두고, 또한 장차 중국이 국력을 신장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미,일 등 해양세력과의 대결이 불가피할 상황에 대비하여 북한을 완충국(buffer state)으로 확보코자 하는 전략적 판단 아래 참전을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과연 모 주석의 판단대로 막강한 미국을 상대로 대등한 전쟁을 벌인 한국전쟁이 아편전쟁 이후 침체되었던 중국인 들의 중화사상을 발양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이어 핵 실험(1964), 중,소분쟁 (한국전 이후), 미,중수교(1978), 경제대국화 추진(1970년대 초 이후), 국제금융위기(2008)등을 거치면서 오늘날 미,중 패권경쟁이 가시화되기에 이르게 된 일연의 과정을 통해 모택동의 전략적 혜안이 돋보인다 하겠다.

 소련의 유엔 대표 야곱말릭이 한국전 참전을 결정하는 유엔 안보리 결의에 불참한 것은 미국의 참전으로 미군을 한반도에 묶어 놓는 것이 소련의 유럽에서의 영향력 신장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스탈린의 전략적 판단과 장차 신생 독립국가들이 대거 유엔에 가입하는 경우에 대비하여 한반도에서의 ‘내전’에 미국이 참전하여 노골적으로 ‘내정간섭’을 벌인 점을 부각시켜 장차 비동맹 외교 등에서 소련이 유리한 고지를 찾이 하고자 하는 전략적 판단이 작용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후 소련의 비동맹 외교가 활기를 띠면서 미국이 수세에 직면한 사실이 스탈린의 전력적 판단이 상당부분 주효했음을 반영했다 할 것이다.

 투르만 대통령이 한국전에의 참전을 결정한 것은 ‘투르만 독트린’(Truman Doctrine) 에서 밝힌 바 대로 한국전쟁이 아시아에서의 미,소간 이념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계기가 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은 처음부터 전쟁 이전 상태에서의 현상유지(,status quo ante)와 세력균형(balance of power)이 목적이었을 뿐 소련처럼 세계공산화 혁명의 일환으로 한반도 전체를 자신의 영향권 아래 둘 생각은 없었다 할 것이다.

 오히려 미국이 아시아 안보와 경제의 보루로 간주해 온 일본을 방어하기 위해 남한의 완충역을 확보코자 하는 것이 참전의 목적이었다 할 정도로 당시 미국은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를 평가절하 한 점에서 소련과 대조적이었다 할 것이다.(3부에 계속)
(konas)

김명배(호서대학교 초빙교수, 전 주 브라질 대사, 평화통일국민포럼 고문)

*국보법개정서명바로가기 : http://konas.net/event/signature.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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