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의 실질적 진전 긴요
정전 60주년, 한반도와 중국의 미래....동북아 평화번영 협력체계를 위한 제언
5월 22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 친서를 전달할 목적하에 북한 인민군 총정치국장 최룡해가 김정은의 특사자격으로 군복을 입고 북경에 나타났지만, 시주석은 21일 이미 북경을 떠나 사천성의 지진피해 복구 현장에 있었다. 올해 7월 27은 북중혈맹이 항미 제국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자평하는 한국전쟁 정전 60주년이다.
두 달여밖에 남지 않은 기간이니, 대대적인 행사준비를 위한 협의가 한창이어야 할 시점에서 특사 형식의 대화 자체가 말 그대로 특별하고, 혈맹을 자랑하며 돈독하던 북중관계에 특사는 낯설다.이번 최룡해 방중의 성패가 시주석을 만날 수 있는가에 있었다.
친서를 들고 이틀을 군복차림으로 북경 이곳 저곳을 두리번거리던 최룡해의 초조함은 표정에서부터 읽혔다. 귀국 예정보다 7시간을 넘기고 간신히(?) 시진핑 주석에게 친서를 전달한 최룡해의 긴장된 표정이 바로 현존하는 북중간의 미묘한 현실이다.
최룡해는 왜 이틀 동안 입었던 군복을 벗고 인민복으로 시주석을 접견했을까? 시주석이 민생현안을 살피고 돌아온 점과, 중국이 이틀간 일관되게 북한에게 보낸 신호에서 북한은 비핵화와 대화를 통한 평화분위기 조성을 강조하는 중국의 강경한 입장을 읽었을 것이다. 따라서 더 이상 군사혈맹과 정전 60주년의 공감대 형성을 통한 국면전환에 대한 기대감이 어려울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아니었을까?
북중관계에서 특별하게 특사를 보내야 하는 북중간의 정세변화도 그렇지만, 시주석이 특사 방중을 알면서도 북경을 비우고, 최룡해의 예정된 귀국 일정을 고려하지 않은 채 오후 5시가 넘어서야 사전 통지 없이 만나주는 행보를 보인 것은 중요한 의미이다.
2009년 9월 후진타오 주석이 외교를 담당하는 중국의 국무위원인 다이빙궈를 특사로 파견하였으나, 김정일은 대담하게도 지방 시찰을 이유로 특사의 귀국일정에 맞추어 마지막에 마치 선심을 쓰는 듯이 다이빙궈를 만났다. 이것은 ‘김정일의 2차 핵실험’에 대해 중국이 대북제재에 동참한 것에 대한 김정일 식의 불만 표시였던 것이고, 시진핑 주석은 인민군 총정치국장의 신분인 최룡해에게 같은 방식으로 “김정은의 3차 핵실험”에 대한 명확한 경고와 이전의 수모를 되돌려 준 것으로 봐야한다.
“중일수교 40주년 기념식을 성대하게 준비해 가던 양국이 다오위다오(釣魚島:센카쿠열도) 분쟁으로 결국 단 한번뿐인 40주년 기념행사조차 포기했던 사례가 북중간의 정전 60주년 기념에도 적용될 것인가”라는 생각은 지나치게 앞서간 것일까 민족의 비극이 되어 매년 어김없이 찾아오는 정전협정은 올해에는 회갑이 되어 우리 앞에 있다. 이제 우리가 네 가지를 생각할 때이다.
누가 먼저 쏘았는가 : 전쟁 책임론과 정의론
매년 한국전쟁의 발발과 정전협정 시점이 되면 되풀이 되는 논쟁은 아직도 유효하다. “누가 먼저 쏘았는가”의 문제는 결국 한국전쟁이 “누구의 잘못이었나”와 “누가 정의의 전쟁을 하였는가”의 전쟁 책임론과정의론의 문제이다. 초기 전쟁 당사자인 남북 모두 이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이후에 참여한 미국 주도의 연합군과 중소 공산진영에서도 간과할 수 없는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중국의 한국전쟁 발발에 대한 지금까지의 논의는 세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북침론이다. 중국의 교과서에서는 오랜 동안 북한의 주장대로 남한이 삼팔선을 침공하여 북한 인민군의 반격으로 전쟁이 발발했다고 되어 있다. 그 근거로는 1950년 6월 25일 당일의 해외 신문에 한국군이 옹진반도에서 북한의 해주시를 공격하여 점령했으며,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세 시간 전인 당일 새벽 1시에 이미 한국군대가 삼팔선을 넘었다는 것이다.
최근 연구에는 한국군이 이러한 대규모 전쟁을 당시에 준비할 수 있었을까에 대한 의구심을 제기한다. 특히 북한이 남한에 보낸 유격대를 소탕하기 위해서 당시 한국군 전체 8개 사단에서 절반인 4개 사단이 이 유격대 토벌을 위해 남한의 후방에서 접전을 벌이는 상황에서 어떻게 전면전을 벌일 수 있겠는가라는 주장으로 북침론에 대한 의구심을 표현하고 있다.
둘째, 남침설이다. 북한은 이미 중국으로부터 항일전쟁과 중국 내전에 참여하여 전투에 숙달된 중국의 조선인 군대를 전쟁 발발 이전에 인계받았고, 그 인원은 5만에 달하여 개전시의 절반에 육박하는 인민군의주력군을 형성했다. 소련으로부터는 탱크와 무기를 지원받는 등 전면전을 준비했으며, 유격대를 남파하여 한국군의 전력을 분산시켰다. 김일성은 모택동과 스탈린에게 남침에 대한 계획을 수차례 상의했고, 최종적으로는 스탈린의 동의에 따른 모택동의 암묵적 지지를 바탕으로 만일에 있을 개전 이후의 중소 지원에 대해서도 미리 논의했다는 것이다.
셋째, 침략 무용론이다. 초기 한국전쟁은 같은 민족간의 ‘내전’이다. 따라서 내전에 대해 ‘침략’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주장이다. 더구나 1949년 1월부터 한국전쟁이 발발하는 시점까지 약18개월의 기간 동안 삼팔선에서의 충돌이 874차례나 있었고, 남북한 모두 이러한 충돌에 대한 보복으로 상호간 적진에 침투하여 유격전을 벌이는 등, 삼팔선을 포함한 한반도 전역에서 남북의 무장충돌이 끊이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6월 25일 새벽 4시 이전에는 그럼 누가 먼저 쏘았는가”, 혹은 “24일에는 그럼 누가 먼저인가”라는 질문은 미묘하다.
침략 무용론은 오히려 전쟁발발의 원인을 강조한다.남북분단을 결정한 미소 위주의 극동전략이 외부요소이고, 이로 인하여 외부적으로 분단된 하나의 민족이 통일’을 이루려는 것이 내부요소라는 것이다. 결국 이는 남북한 모두 이념과 냉전을 대표하는 미소의 극동전략에 의해 희생된 피해자라는 것이며, 이는 다시 일본을 포함한 서구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중국 근대사의 아픈 기억과도 연동된다.
누가 먼저 쏘았는가에 대한 논쟁은 반드시 필요하다.그러나 이는 전쟁발발에 대한 책임공방보다, 자칫 정의를 앞세운 집권체제의 정당성을 추구하는 소모적인 정치논쟁일 수 있고, 과거 지향적이다. 60여년이 지나는 이 시점에서, 다시는 불행한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는 미래지향점을 설정해야 한다. 과거에 대한 책임논쟁은 잠시 덮어둘 수도 있으나, 미래지향적인 설계는 더 이상 미룰 수 없기 때문이다.
충분히 미래의 발전을 공동으로 이룬 뒤에 적당한 시점에 과거의 책임론을 논하는 것도 늦지 않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역사적사실을 잊자는 말은 결코 아니며, 잊어서도 안 된다. 실패한 역사를 잊으면, 실패의 반복을 피할 수 없다. 미래를 먼저 준비하되, 과거의 실패는 시간을 두고 철저히 분석하자.
무엇을 위한 전쟁인가 : 무력통일론 vs 평화통일론
한국전쟁은 초기의 ‘남북 내전’에서 미군과 연합군의 참전을 계기로 ‘국제전’으로 변모했고, 중공군의 대규모 참전과 소련의 일부 참여로 자유주의와 사회주의간의 ‘이념전’으로 변모했다. 제3차 세계대전으로의 확전을 두려워한 미중소의 암묵적 확전금지 인식으로 인해, 투입된 쌍방의 전체 전력규모와는 달리 ‘국지전’으로 정전에 이른 것 또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남북 당사자에게는 ‘통일전쟁’이었으나,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모두 ‘정의의 전쟁’이라는 아이러니도 특이하다. 둘 다 정의라면, 결국 정의는 힘의 논리에 움직이는 역사의 궤적과같은 것인가 철학적 난제에서 벗어나, 지금 시점에서 우리의 고민은 무엇을 위한 전쟁이었는가에 있어야 한다.
특히 가장 큰 피해자로서 6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그 아픔과 후유증이 가슴을 짖누르는 우리한민족에게는 통일이 목적이다. 이 고민의 정점에는 통일 방법론으로 실패한 ‘무력통일론’의 종말과 ‘평화통일론’에 대한 민족적 공감과 실천이 있어야 한다. 이제는 반드시 남북한 백성의 행복이 최우선이어야 한다.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었는가 :과거반성과 미래지향적인 손익계산
이 질문은 지금의 동북아 정세에 있어서 매우 적절하다. 먼저 한국전쟁으로 이득을 본 사례들을 짚어보자.
첫째, 일본이다. 가장 최대의 수혜국이며, 이 전쟁으로 인하여 1) 정치적으로 태평양전쟁 패배의 전후처리가 신속하게 처리되었고 2) 경제적으로 연합국 병참보급기지로서의 역할을 통해 신속하게 폐허에서 부흥으로 탈바꿈하였으며 3) 군사안보면에서도 미일동맹을통해 안보문제와 자위대 창설을 이룰 수 있었다.
둘째,독일이다. 한국전쟁에 집중하기 위해 미국은 소련으로 부터의 유럽안보를 위해 독일을 재무장시켰고, 이를 위한 경제부흥을 지원했다.
셋째, 대만이다. 미국은 전쟁발발 이틀 뒤인 6월 27일에 제7함대를 대만해협으로 파견하여 대만의 공산화를 막았고, 대륙에서 패전한 국민당은 안보문제를 해결했다.
넷째, 소련이다. 중국과 북한을 뒤에서 조정하여 항미전쟁에 대신 활용하는 성공적인 전략적 성과를 거두었다.
다섯째, 미국이다. 유럽과 극동에서 2차대전 상대국이었던 독일과 일본을 활용하여 소련을 효율적으로 방어하며 패권국 지위를 공고히 하였으며, 이와 연관된 안보산업을 통해 경제대국의 성과를 거두었다.
이와는 달리, 엄청난 손실을 감수해야 하는 경우를 보자.
첫째, 남북한이다. 막대한 인적 손실과 경제적 손실은 물론이고, 이를 통한 기회손실과 분단고착화로 인한 손실은 천문학적이라 산정조차 불가능하다. 게다가 남북내전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으로 근원적인 분단 원인 제공자인 일본이 최대수혜국이 되는 억울한 결과도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항일전쟁 승전국으로서의 지위조차 인정받지 못한 채, 한국전쟁으로 전쟁 배상과 영토문제를 포함한 역사적 사실 왜곡이 현재에 이르기까지 청산되지 못하는 가중 손실은 산정조차 불가한, 앞의 손실보다도 더 상상할수 없이 크다.
둘째, 중국이다. 남북한과 마찬가지로 인적손실과 경제적 손실은 물론이고, 전쟁의 결과로 미국으로부터의 경제제재와 금수조치, 국제연합 가입 무산, 대만통일무산 등의 실질적인 피해 역시 오랫동안 중국을 억눌렀다.
물론 중국은 내부적으로는 서구 제국주의에 승리한 전쟁으로서, 중국은1) 서구 제국주의에 대한 항미전쟁 승리로 중국 공산당의 체제 정당성과 민족 자존심을 회복했고 2) 대륙에 잔재한 100만여명의 국민당 잔당을 효과적으로 소탕했으며 3) 청대의 영토인 티벳과 위그루 지역을 수복했고 4) 모택동의 정적인 친소련파 만주군벌을 숙청하는 내부적인 성공을 거두었다고 자평하고 있지만, 이러한 점들이 한국전쟁의 결과라고 연결짓는데는 무리가 있다. 결국 최대의 피해자는 한반도와 중국이다.
한반도와 중국의 미래 지향적인 협력으로 과거의 손실을 함께 회복하자
한반도와 중국은 근대사의 과정에서 동병상련의 많은 아픔을 공유하고 있다. 따라서 이제부터라도 공동의 아픔을 되풀이하는 실수를 금해야 하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한반도와 중국의 평화번영 협력체계를 미래지향적으로 설계해야한다. 첫째, 한반도에서의 전쟁과 대립관계를 끊어야 한다. 둘째, 한반도 비핵화 평화체제 구축을 주도해야 한다. 셋째, 한중이 동북아 경제발전에 대한 핵심체가 되어 동북아 평화번영 협력체계를 완성해야한다.
이러한「동북아 평화번영 협력체계」의 절차를 보면, 우선 한중간의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의 실질적인 협력체계가 재구성 되어야 한다. 둘째, 이를 기반으로, 한중미북의 4개국간에 3개의 양자관계와 1개의 4자관계를 동시에 진행해야 한다. 즉 1) 남북대화 재개와 평화통일 협의 2) 북중관계 회복과 비핵화 소통 3) 북미정상화를 위한 북미대화가 동시에 진행되고, 이 3개의 양자관계를 통해 4) 한미중북의 4자 비핵화 평화회담을 진행하고 5)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해야 한다. 셋째, 동북아 평화발전과 경제협력을 위해 러시아와 일본이 참여하는 6자 협력체계로 「동북아 평화번영 협력체계」를 최종적으로 완성해야 한다.
한중 양국은 어려운 근대사에서 동병상련의 아픔을 이기는 과정을 통해 평화적 발전과 공동번영에 대한 가치를 충분히 인지하고 공감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공통의 인식과 경험이 이념대립의 장벽을 넘어 불과 20년만에 세계 외교사에 유래가 없는 평화공존의 한중관계를 만들었고, 성공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과거사의 추궁은 더 뒤로 미루어도 늦지 않다. 그러나 공동번영을 위한 미래지향적인 평화협력체계의 구축은 시급하다.
정전 60주년은 그런 의미에서 좋은 전환점이 될 수있다. 정전 60주년의 기념식을 ‘판문점’에서 전쟁당사자인 남북한과 미중이 함께 치루는 것은 어떨까? 혹은 한발 더 나아가, 한국전쟁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던 모든 관련국들이 “개성공단”에서 함께 성대하게 정전 60주년을 기념하는 것은 어떨까? 이는 정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전환될 수 있는 시발점이 될 수도 있지않겠는가?(konas) 출처:월간충호
김 상 순 (칼럼니스트/민주평통 북경협의회 통일연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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