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국헌신과 백선엽
나는 대한민국 예비역 육군대장 백선엽(白善燁)이다. 63년 전 6월은 잔혹했다. 북한의 기습으로 병사들은 폭우를 맞은 볏단처럼 쓰러졌다. 나의 사단(師團)은 개성(開城)을 잃었고 문산(汶山)을 잃었으며 파주(坡州)를 잃었다.
나흘을 꼬박 굶은 나는 미군 중위에게 설탕 한줌을 얻어 물에 타먹고 패주(敗走)를 거듭했다. 도망가는 길은 고달팠다. 시흥에서 용인을 거쳐 오산~괴산~속리산을 넘어 상주까지 후퇴했다. 북한은 전차와 대포와 전투기를 갖고 있었다.
국군은 거의 맨주먹이었다. 병사들은 수류탄을 안고 전차 밑으로 기어들었다. 그들의 갈기갈기 찢어진 몸을 밟고 붉은 군대는 행진했다. 그해 8월 나라의 운명은 외줄기 낙동강에 걸려 있었다. 전선(戰線)이 무너지면 ‘대한민국’도 무너졌을 것이다.
다부동(多富洞)에서 나는 말했다. “여기서 한 발자국도 물러설 수 없다. 물러서면 바다뿐이다. 대한 남아로 다시 싸우자. 내가 후퇴하거든 나를 쏘아라!”
1950년 8월18일 밤부터 23일까지 나의 사단은 북한군과 7차례 맞붙었다. 국군 2300명이 전사했다. 미군은 1282명이 전사했다. 북한군은 5690명이 죽었다. 군인들의 자리를 청년학도들이 메웠다. 주민들은 탄우(彈雨) 속에 지게로 보급품을 날랐다. 괴멸한 것은 대한민국이 아니라 김일성의 군대였다.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북진(北進)이 시작됐다. 그 대열에 국군은 제외돼있었다. 나는 밀번 미1군단장 앞에서 울면서 호소했다. “평양공격에 국군이 빠진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걸어서라도 평양에 제일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대동강 물 어디가 깊고 얕은 지 다 압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미 21군단장으로 알사스 로렌 공격전에서 용맹을 떨친 밀번은 씩 웃으며 말했다. “제너럴 백, 차량 150대로 어떻게 선두에 서겠는가.” 그랬다. 나의 사단은 미군의 소총과 박격포와 대포와 지프차와 전차를 빌려 북으로 향했다. K레이션도 미군에게 얻어먹었다.
1950년 11월19일 오전 10시50분, 약속대로 국군 1사단은 평양 대동교 입구 선교리 로터리에 가장 먼저 도착했다. 한 달 뒤 UN군은 중공군(中共軍)의 인해전술에 밀려 후퇴와 진격을 거듭해야 했다. 피리에 북에 꽹과리에, 그것도 모자라 ‘싸(殺) 싸’하는 중공군의 함성을 나는 지금도 듣고 있다.
세상이 편안했다면 63년 전 나의 기억은 먼지 쌓인 전사(戰史) 속에 머물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갈라진 국론과 한반도 상공을 맴도는 북한의 미사일은 구십을 넘긴 늙은 몸을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4층 집무실에 머물지 못하게 하고 있다.
지금 나는 전쟁기념관 벽에 새겨진 전우 김백일 장군의 이름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는 함께 월남했다 대관령에서 사망했다. 그런데 몇 년 전 만난 어느 기자와의 대화가 지금도 생생하다. 그는 이렇게 물었다. “만일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의 상황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나는 답했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한 말입니다. ‘배고픈 것은 참을 수 있고 굴욕도 참을 수 있지만 나라 없는 설움은 참을 수 없다’고 하셨어요. 나라가 있고 백성이 있는 것이지요.”
오십 줄에 들어선 기자는 이런 질문도 했다. “6·25가 일어나기 전에도 지금처럼 국론이 갈려 있었습니까.” 나는 말했다. “갈려있었지요. 해방 전 정당과 시민사회단체 수가 200개가 넘었습니다. 군사단체만 30개였어요. 하지만 전쟁이 일어나면서부터는 일치단결했지요. 우리 국민은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짓궂은 기자가 물었다. “혹시 전쟁이 일어나면 장군은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나는 분연히 외쳤다. “나가 싸워야죠!”
그는 또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최근 군에 입대해서도 ‘왜 북한을 주적(主敵)으로 삼아야 하나’ 하는 것을 놓고 고민하는 젊은이들이 있다고 합니다. 6·25 남침설(南侵說)을 믿는 사람들도 있고요.”
일단 군인이 된 사람은 국가방위가 최고의 목표가 돼야한다. 나도 그런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지금 젊은이들이 과거와 달리 많이 깨어있다고 봐야한다. 그건 군 지휘관의 통솔과 교육에 의해 극복돼야한다. 6·25 남침설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나의 기록을 세심하게 읽은 기자는 “장군의 기록을 읽다 보면 한국 현대사의 주역들이 다 등장하더군요. 북한 김일성은 필생의 앙숙이었던 것 같습니다. 1950년 10월1일 평양에 맨 먼저 진주했을 때 김일성을 잡고 싶은 생각은 없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때 김일성은 이미 압록강 근처로 내빼고 없었다. 평양의 김일성 집무실에 가보니 텅 비어있다. 그가 앉았던 의자에 앉아본 적은 있다. 하지만 평안북도 운산까지 진군했을 때 불길했던 예감이 적중했다. 중공군이 등장한 것이었다.
영변 농업학교에 사령부를 차렸을 때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이상한 포로를 하나 잡아왔는데 제가 직접 신문해보니 중국인이었다. 고향이 저 멀리 남쪽에 있는 해남도(海南島)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영변 농업학교 주변 산에 전부 중공군이 매복해있었던 것이었다.
그때 기자가 물었다. “후퇴했습니까?” 나는 말했다. “그냥 밀려나지는 않았다. 청천강을 사이에 두고 전투를 벌였으니까. 그때 중국이 개입하지 않았으면 통일이 됐을까? 그것은 부질없는 가정(假定)이다. 역사에서 ‘만일 이랬으면?’ 하는 말은 해봐야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 후 나는 지리산에서 빨치산 토벌을 했다. 당시 낙동강에서 붕괴된 북한군의 주력은 양 갈래로 나뉘었었다. 일부는 태백산 줄기를 타고 북으로 후퇴했고 2~3만 명이 지리산에 은거했다. 나는 수도사단과 8사단을 이끌고 3~4개월 대 소탕전을 폈다. 제일 고민했던 것은 어떻게 하면 민폐를 줄일까 하는 부분이었다.
이런 전쟁을 치러놓고 지금 우리는 63년 전의 일을 모두가 까맣게 잊고 있다. 우리 민족이 외침을 많이 당한 게 바로 그런 망각 증세 때문이 아닐까? 외침 부분은 지정학적 요인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 내부의 좌우대립을 말해야할까? 적어도 원로급에 속한다는 사람이 그런 소리를 해 나라의 분열을 조장할 수는 없다고 본다.
기자는 안타까운 듯 말했다. 왜 우리 민족은 그렇게 역사에서 얻은 교훈을 그렇게 쉽게 잊어버리나 하는 생각을 하면 안타깝다고. 그래도 우리 민족은 위대한 국민이다. 6·25 때 단결해서 외침을 막았던 것을 얼마 남지 않은 노병은 기억하기 있기 때문이다.
나는 대한민국 국민과 함께 전쟁에서 이겨본 적이 있다. 목숨을 버려도 아무 보장이 없던 시절에 우리 국민들은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고 피를 흘렸다. 한마디로 위국헌신(爲國獻身)의 정신이다. 지금 잠시 소란이 있어도 나는 우리 국민에게 실망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은 위대한 국가이기 때문에.
세계 최강인 미군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가운데 한명이 한국의 백선엽이라고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이리 말했다. “존경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미 8군이 매년 각급부대별로 저를 초청해 강의를 듣기는 합니다. 왜 그럴까, 한미동맹의 역사와 역대 한미연합사 인맥을 나만큼 아는 이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사족(蛇足)-이글은 한국전쟁의 살아있는 신화 백선엽장군과의 인터뷰를 1인칭 화자(話者)가 보는 각도로 바꿔본 것이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핵 실험에 이어 서해 5도에 대한 위협이 올들어 계속됐다.
최근에는 남북당국회담이라는 것이 성사될 뻔 하다가 이른바 ‘격(格) 문제’로 무산되기도 했다. 여러모로 뒤숭숭한 계절인데 마침 이글이 게재되는 시점이 6월말이다. 6월, 어찌 우리가 그 계절을 잊을 수 있을까.
무덥고 때로는 장마가 끊임없이 내리는 그해, 우리와 우리의 선배들과 후배들이 맞는 6월은 과연 일치하는 것일까?(konas) 출처: 월간자유
문갑식(조선일보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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