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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군의 뿌리, 어디서 찾아야 할까

Written by. 한시준   입력 : 2013-09-18 오후 6: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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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은 17일 오전 용산구 백범기념관에 열린 '한국광복군 창군 제73주년 기념식 및 학술회의'에서의 한시준 단국대학교 역사학과 교수의 학술강연 내용임.(편집자 주) 

  국군의 뿌리, 국방경비대에 두어야 하나

  이와 같이 나라 안이 어려워지고 있을 때 뜻있는 청년들이 도시와 농어촌에서 그리고 해외에서 귀국하여 조국을 수호하겠다는 일념으로 미군정이 치안유지를 위하여 조직한 경찰경비대인 남조선국방경비대에 입대하여 국방군이란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묵묵히 국방임무를 수행하였다. 이처럼 조국수호의 첨병이 되고 국군의 뿌리가 된 국방경비대와 국군의 역사를 찾기 위하여 (후략)

 이는 건군 50주년을 맞아 ‘50동우회’가 펴낸『국군의 뿌리, 창군·참전용사』에서 ‘국군의 뿌리’에 대해 설명한 내용이다. 국군의 뿌리를 국방경비대라 하고 있다. ‘국군의 역사’에 대한 설명도 국방경비대에서 시작한다. “이 시기의 경비대는 광복군을 비롯하여 일본군 및 만주군  출신 등을 중심으로 모집하였으며”라고 하면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조선경비대는 국군으로 편입되어 국군의 중추가 되었다”고 하였다. 조선경비대는 국방경비대의 이름을 바꾼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국방경비대는 미군정에서 설립한 것이다. 미군정은 해발 후 국내에서 한인들이 조직한 사설 군사단체들을 통제하고, 미군정 주도하에 건군을 추진하였다. 1945년 11월 군정법령을 통해 국방사령부를 설치하였고, 이어 1946년 1월에는 국내치안과 경비를 담당하기 위해 국방경비대를 설립하였다. 국방사령부는 미군정에서 국방부, 국방경비대는 군대와 같은 것이었다.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를 이러한 국방경비대에 두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 국군은 그 뿌리와 정신적 연원을 찾는데, 깊이 고민하지 않은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일제식민지시기를 만족사가 단절된 것으로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육군사관학교의 연원을 찾고 있는 다음과 같은 글이 그러한 생각을 갖게 한다.

 구한말 신식군대의 간부 양성기관이었던 대한제국무관학교는 원래 美육군 다이 장군 등이 교관으로 있었던 연무공원(練武公院)의 후신이라고 할 수 있으나, 고종의 군대해산령과 대한제국의 붕괴에 이은 일제의 식민통치 등으로 인한 명맥의 단절로 말미암아 광복후 신생 대한민국 국군 창군에는 아무런 연대(連帶)나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따라서 대한민국육군사관학교의 연원을 밝힘에 있어서 대한제국의 무관학교를 그 시초로 삼을 수는 없다.
 
 이는『대한민국육군사관학교30년사』에 있는 내용으로, 육군사관학교의 연원을 설명하기 위해 대한제국의 육군무관학교에서부터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무관학교는 대한제국의 붕괴와 일제의 식민통치로 인해 명맥이 단절되었다는 것이고, 때문에 지금의 육군사관학교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하였다. 일제의 식민지시기를 민족사의 단절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일제식민지시기에 전개된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이 해방 후로 서술이 이어진다. 해방 후 군사단체의 설립을 언급하면서, “육군사관학교는 1946년 5월 1일 남조선국방경비대사관학교에서부터 그 시발점을 삼고 있다. 그러나 우리 국군의 태동기에 공적(公的)으로 설립된 최초의 군간부 양성기관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경비사관학교의 전신인 군사영어학교까지 소급하지 않을 수 없다”라 하고 있다. 육군사관학교의 연원을 국방경비사관학교에 둔 것이고, 그 연원을 군사영어학교로 소급한 것이다.
 
 위의 사례에서 보듯이, 일제식민지시기를 민족사의 단절로 보고, 국군과 육군사관학교의 뿌리와 연원을 국방경비대와 군사영어학교에서 찾고 있다. 일제식민지시기에 민족사가 단절된 일이 없다. 한국민족은 일제시대에도 살아 있었고 일제에게 빼앗긴 국토와 주권을 되찾기 위해 국내외 각지에서 치열하게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민족의 대표 기구이자 독립운동을 총괄하기 위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였고 수많은 독립군 부대들과 광복군을 조직하여 일본군과 싸웠다. 이러한 항일독립운동은 다른 민족이 해준 것이 아니다. 한민족이 자신의 나라를 되찾기 위해 투쟁하였던 한민족의 역사이다.

  대한제국 국군과 독립군을 계승하여 창설한 광복군

  1940년 9월 17일,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국군으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시간적으로 보면,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지 30년이 지났을 때였다. 그렇지만 임시정부는 광복군을 창설하면서, 자신들이 광복군을 창설한 것이라고 하지 않았다.

 한국광복군은 일찌감치 1907년 8월 1일 군대해산시에 곧 이어 성립한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적인(敵人)이 우리 국군을 해산하던 날이 곧 우리 광복군 창설의 때인 것이다.

 이는 광복군 창설식장에서, 외무보장 조소앙이 광복군을 창설하는 경과를 설명한 내용이다. 광복군은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하던 그 날 창설된 것이라 하고 있다. 대한제국 군대는 1907년 8월 1일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하였다. 그러나 대한제국 군인들은 이를 거부하고, 남대문 일대에서 일본군과 격렬한 항전을 전개하였다. 이후 대한제국 군인들 상당수가 만주지역으로 이동하여 독립군을 조직하여 일본군과 치열한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다. 임시정부는 이러한 대한제국 국군을 계승하여 광복군을 창설한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인적(人的)으로는 독립군의 맥락을 계승하여 광복군을 창설하였다. 총사령과 참모장을 비롯하여 광복군의 주요 간부들은 대부분 만주에서 독립군을 조직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던 독립군 출신들이었다. 총사령 이청천은 서간도에서 신흥무관학교 교관과 서로군정서, 그리고 1930년대에는 북만주에서 한국독립군을 조직하여 서란현전투·쌍성보전투·경박호전투 등 수많은 대일항전을 전개하였던 인물이다. 참모장 이범석도 북간도 북로군정서에서 활동하였고 김좌진과 함께 청산리대첩을 거둔 독립군이었다. 이외에 황학수·김학규·이준식·이복원·고운기 등 간부들도 모두 만주에서 대일항전을 전개하였던 독립군 출신들이었다.
 
 임시정부는 정신적으로 대한제국의 국군을 인적으로는 독립군을 계승하여 광복군을 창설하였다. 임시정부가 광복군을 창설하면서 독립군을 계승하고자 하였던 고민은 참모장을 인선하는 과정에서 잘 나타난다. 참모장을 인선할 때 김구는 김홍일을 천거하였다. 김홍일은 윤봉길의거 때 폭탄을 만들어 주었던 인물이었고 귀주강무당을 졸업한 후 중국군에 입대하여 중국군 소장이란 고위급 장교로 복무하고 있었다.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한 추천이었다. 그러나 참모장에 임명된 것은 이범석이었다. 독립군을 계승한 광복군을 창설하기 위해 만주에서 독립군으로, 특히 청산리대첩을 거둔 이범석을 참모장에 임명한 것이다.

  정신적으로 광복군을 계승한 국군

  해방 후 국군을 창설할 때도 임시정부와 같은 고민이 있었다. 국군을 창설하는 데 중요한 문제는 세 가지였다. 건군에 필요한 인적 자원, 건군의 주체, 국군의 정신적 연원이 그것이다. 인적 자원은 독립군과 광복군을 비롯하여 일본군·만주군·중국군 출신 등이 그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건군의 주체와 정신적 연원에 대한 문제는 간단치 않았다.
 
 일제의 식민지지배로부터 해방을 맞아 국군을 창설하면서 그 정신적 연원을 일본군이나 만주군에 두거나 또 이들을 건군의 주체로 할 수 없었다. 일본군 대좌 출신으로 국군창설에 고문 역할을 하였던 이응준의 “어제까지도 나는 일본군 고급장교 신분이었다. 그러한 사람으로 조국이 해방되었다고 해서 세상 표면에 나서서 날뛴다는 것은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었다”는 말처럼 그것이 민족적 양심이고 정서였다.
 
 미군정에서 조차도 건군을 추진하면서 광복군을 기용하고자 하였다. 미군정은 이응준의 자문을 받았지만 일본군 출신들을 내세우지 않았다. 초대 통위부장을 교섭하기 위해 버나드 대령을 상해로 보내 광복군 총사령 이청천과 면담하였다. 그리고 통위부장에 임시정부 참모총장인 유동열, 조선경비대 사령관에 광복군 제2지대장 출신인 송호성을 각각 임명하였다. 미군정에서 통위부는 국방부, 조선경비대는 군대와 같은 것이었다.
 
 통위부와 조선경비대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국방부와 국군이 되었다. 그리고 정부가 수립된 후 미군정이 군사권을 대한민국 정부에 이양하였다. 대한민국의 초대 국방부 장관은 광복군 참모장과 제2지대장을 지냈던 이범석이었다. 통위부장 유동열은 국방부 장관 이범석에게 미군정이 행사하던 군권을 넘겼다. 미군정의 군권이 임시정부 참모총장 출신에 의해 광복군 출신인 국방부 장관에게 이양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범석이 국방부 장관이 되면서 광복군 출신들이 육군사관학교와 국군에 입대하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광복군 출신들이 육군사관학교 교장을 연이어 맡기도 했다. 제6대부터 제9대까지 교장을 맡았던 최덕신·김홍일·이준식·안춘생은 모두 광복군 출신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제헌헌법과 1987년 개정헌법에서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였음”을 명문화 해 놓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과 뿌리를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두고 있다는 것을 천명한 것이다. 임시정부의 군대가 광복군이었고 대한민국 정부의 군대는 국군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국군은 그 뿌리를 광복군에서 찾고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동안 역사학계에서는 독립운동사와 현대사에 대해 괄목할만한 연구들이 이루어져 왔다. 이를 통해 의병·독립군·광복군으로 이어져 온 민족사의 맥락에서 국군이 창설되었다는 것, 그리고 국군의 정신적 연원과 뿌리는 광복군에 두어야 한다는데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이제 국군에서도 이를 이론적으로 체계화하여 국군의 정신적 연원과 뿌리를 정립시키는 일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그 방안의 하나로 국군의 정통성 및 뿌리와 관계있는 날을 찾아 국군의 날을 새로이 제정할 필요가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현재 국군의 날인 10월 1일은 1956년에 제정한 것으로 6. 25전쟁 때 육군이 양양에서 38선을 돌파한 날을 기념한 것이다.

 이 날을 특별히 기념하는 것은 당연하고도 필요한 일이지만 이를 국군의 날로 기리는 것은 국군의 정통성이나 뿌리를 찾는데 커다란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임시정부가 광복군을 창설한 9월17일, 이 날을 국군의 날로 고려해 볼 것을 제안한다.

한시준(단국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안보가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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