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1월 21일
본 내용은 국방일보 21일자 16면 오피니언란에 게재된 글임.(편집자 주)
1919년 1월 21일은 대한제국의 고종황제가 시해된 날이다. 3·1운동의 계기가 된 고종황제의 독살설은 사망 직후부터 꾸준히 제기돼 왔으나 지금까지 뚜렷한 증거가 없어 학계에서는 공식 인정을 하지 않고 있다.
당시 조선총독부에서는 고종황제의 사인을 뇌일혈로 발표했지만, 고종의 외동딸인 덕혜옹주가 말했다고 하는 자료에는 독살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일제 총독부가 황제를 독살한 이유는 고종이 이준 헤이그 특사와 같은 밀사를 통해 일제의 강점 사실을 계속해서 세계에 알리려 하는 것을 막기 위해 독살을 감행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고종황제가 붕어(崩御)했을 당시 덕혜옹주의 나이가 어려 독살에 대해 정확하게 알았다고 인정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당시 윤치호(尹致昊)의 일기에는 고종의 시신을 직접 본 명성황후의 사촌동생 민영달(閔泳達)이 중추원 참의 한진창(韓鎭昌)에게 한 말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건강하던 고종황제가 식혜를 마신 지 30분도 안 돼 심한 경련을 일으키며 죽어 갔고, 시신의 팔다리가 1∼2일 만에 크게 부어올라 황제의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옷을 찢어야 했으며, 이가 모두 빠져 있고 혀는 닳아 없어졌으며, 30㎝ 정도의 검은 줄이 목에서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고, 승하 직후 궁녀 2명이 의문사했다.”
고종황제의 독살 여부를 일본의 만행으로 따지기 이전에,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해 가했던 것들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잔인했다. 일찍이 을미사변으로 일컬어지는 고종황제의 비(妃)인 명성황후 시해 사건만 하더라도 일본 자객들에 의해 저질러진 천인공노할 참살이었다.
일본공사 미우라가 보낸 수십 명의 자객이 경복궁에서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은 그 살해에 가담했던 무리 가운데 한 명인 에조(英臟)라는 자가 일본으로 비밀리에 보냈다는 보고서를 통해 그 잔악상을 알 수 있다. 그 참혹한 정황을 차마 자세히 기록할 수는 없지만, 그들은 명성황후를 발견하자 여러 명이 칼로 베고 시신을 능욕한 다음, 근처 솔밭으로 끌고 가서 석유를 붓고 불태워 없애버렸다고 적혀 있다.
황제와 국모가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백성들의 참상은 말로 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일본인들의 만행은 우리의 경우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수없이 자행됐다. 최근 중국에서는 일본 만행의 자료들을 속속 공개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는 명령을 받은 일본군들이 어린이까지 모두 살해했고, 일본 군인들이 만주 여성이면 무조건 강간했다는 기록들이 적혀 있다.
한 나라의 황제와 국모를 모두 죽인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이러한 자들이 오늘날 반성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망언들을 쏟아내고 있다. A급 전범은 죄인이 아니라며 A급 전범들이 안치돼 있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아베 총리의 행각은 또다시 그들의 침략야욕의 발톱을 드러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일본은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만드는 수순이 착착 진행되고 있다.
역사는 되풀이된다. 우리가 과거의 역사를 모르면 우리에게는 또다시 참담한 역사가 되풀이될 것이다. 과거의 역사를 모르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이영신 (합동군사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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