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필요한가?
생명과 진실과 사랑의 꿈이 죽음과 거짓과 증오의 꿈과 한반도에서 치열하게 부딪치고 있다
동양평화(東洋平和)의 꿈과 대동아공영(大東亞共榮)의 꿈이 공존할 수 있었을까? 안중근(安重根)의 꿈과 이등박문(伊藤博文 이토 히로부미)의 꿈은 공존할 수 있었을까? 안중근은 왜 하얼빈에서 평화의 총탄을 이등박문의 염통에 쑤셔 박아 넣을 수밖에 없었을까? 1945년 8월 15일, 하루 전만 해도 이등박문의 꿈을 북극성으로 고이 가슴에 모셨던 일본의 인간신(人間神)이, 동양 3국의 방자한 승천욱일(昇天旭日)으로서 3대에 걸쳐 피의 축제를 주관하던 일본의 천황이 이등박문의 꿈은 악마의 꿈이었고 안중근의 꿈은 천사의 꿈이었다고 선언했다. 릴리푸트(lilliput) 유인(裕仁 히로히토)은 타이탄(Titan) 맥아더 옆에 다소곳이 반걸음 물러서서 팍스 아메리카나의 꿈을 잿더미 일본의 새로운 꿈으로 받아들였다. 맥아더는 더 이상 회초리를 들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전쟁은 무역으로 바뀌었고 군국주의는 민주주의로 바뀌었다. 유인은 다시 명치유신 이전 제사장의 자리로 돌아갔다. 동이장군(東夷將軍 쇼군)의 자리는 수상(首相)에게 돌아갔다.
처칠의 꿈과 히틀러의 꿈은 공존할 수 있었을까?
이승만의 꿈과 김일성의 꿈은 공존할 수 있었을까?
남재준의 꿈과 이석기의 꿈은 공존할 수 있을까?
<꿈은 필요한가?>
이것은 프랑스의 어느 해 대입논술(바칼로레아 baccalaureat) 문제였다. 아마 한국 대입 수험생에게 이런 문제를 낸다면, 너무 쉬운 문제라 생각하고, 초등학생의 문제라 생각하고 단숨에 초딩처럼 ‘정답’을 써내려갈 것이다. 열이면 열, 백이면 백, 천이며 천, 만이면 만, <꿈은 필요하다>라고 단숨에 결론내리고, 노란 병아리 유니폼을 입던 시절부터 부모님과 선생님과 언론인과 유명인사로부터 천편일률적으로 세뇌 받은 대로 신바람 나게 3시간 걸려도 쓰기 힘든 글을 과거장의 이몽룡처럼 30분 안에 후딱 써버릴 것이다. 답안지를 제출하고 수험장을 나서는 순간, 날개도 없이 일제히 수백 미터 상공으로 날아오를 것이다. 부모님과 선생님과 친구들로부터 칭찬받을 생각에 땀이 촉촉이 배는 손을 연신 바지에 닦으며 카톡으로 ‘ㅋ ㅋ’ 문자 메시지를 동시에 수십 명에게 날릴 것이다.
한국인의 꿈은 아직 조선시대 중기 이후의 꿈과 대동소이하다. 입신양명(立身揚名)은 유일하게 신분상승이 가능했던 양반의 유일한 꿈이었다. 여기서 입신(立身)은 권력과 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권력과 토지였고 양명(揚名)은 과거급제와 당상관이었다. 개인의 출세와 가문의 영광 그 이상은 없었다. 수백 년을 두고 이어온 사색당쟁(四色黨爭)도 입신양명의 한 방편이었다. 보편적인 법률과 예송(禮訟)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더 이상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전쟁의 와중에서도 정적을 물리치기 위해서라면, 하나밖에 없는 전쟁영웅도 자기편이 아니라면 기꺼이 모함하여 거꾸러뜨렸다. 왕도 더 이상 국가의 수반이 아니었다. 당파의 일원으로서, 또는 귀 얇은 꼭두각시로서 국가의 태평이나 백성의 안녕이 아니라 자신의 기득권과 체면을 유지하는 것이 최고의 꿈이었다. 조세체제가 붕괴되거나 말거나, 국고가 텅텅 비거나 말거나, 양반은 제 곳간만 가득 차면 그만이었고 왕은 제 내탕고(內帑庫)만 가득 차면 그만이었다.
안중근의 꿈은 높은 것이었고 옳은 것이었고 아름다운 것이었지만, 그것은 100년 후에도 실현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국가보다 가문, 국민보다 붕당(朋黨)이 높은 위치에 있는 이름뿐인 나라에서는, 고작 3천 명 군인에게 녹봉 줄 여력도 없었던 나라에서는, 조세(租稅)체계가 와해된 나라에서는, 애국심보다는 입신양명이 앞서는 나라에서는, 가장 큰 부의 원천인 토지를 소유한 양반들이 농민들로부터 아귀같이 소작료를 받아(租), 지주로서 또는 관리로서 중간에서 다 떼어 먹고 왕과 그 아래 궁궐 사람들이 호의호식할 정도만 바치고(稅) 밤낮 거룩한 성현의 말씀을 달달 외우며 언행불일치의 지식을 자랑하며 연신 헛기침했다.
나라를 잃고 나서야 조선인은 비로소 애국애족을 입신양명보다 앞세우는 사람들이 일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의 꿈은 독립이었다. 건국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보편적인 꿈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존이, 개인의 목숨보다 귀중히 여기던 성(姓)을 갈더라도 가족이 살아남는 것이 최고의 꿈이었다.
애국심이 전 국민에게서 샘솟듯 일어난 것은 1945년 8월 15일에서 5년이 지난 1950년 6월 25일부터였다. 김일성의 꿈이 얼마나 끔찍한 것이었음을 부모와 형제자매와 이웃의 피로써 깨달은 이후에야 비로소 애국심은 보편화되었다. 일제시대에 이미 시작된 이념전쟁은 독립의 꿈도 서로 양립될 수가 없었다는 것이 그 날에 비로소 명확해졌다. 이승만의 2백만(가족 포함하면 1천만) 자작농과 김일성의 1천만 협동농장 노예는 공존할 수 없음이 3백만의 희생으로 누구에게나 명확해졌다. 자유의 공기 안에서 5천만 국민 모두가 최고존엄의 주인으로서 누리는 평등은 유일무이 최고존엄의 주인이 일개 생산수단으로 소유한 2천만 노예에게 강요하는 평등과 공존할 수 없음이 누구에게나 명확해졌다.
애국심은 보편화되었지만, 분단이 그대로 이어짐에 따라 애국심도 두 종류로 나누어졌다. 자유민주의 꿈과 공산독재의 꿈으로 나누어졌다. 최소한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던 김일성의 꿈이 한국의 대학과 문화계에 노골적으로 떠오른 시기는 1980년대였다. 386운동권의 꿈이 처음에는 둘로 나누어졌지만, 공산종주국과 동유럽의 멸망으로 그 둘이 하나로 합쳐졌다. 황당무계하게 김일성의 꿈이 386운동권의 꿈으로 단일화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처음에 자유민주로 위장했다. 아니, 자유민주에서 자유를 빼고 민주로 생얼굴을 나타냈으니까, 처음부터 위장은 없었다. 죽어도 공부 안 하는 지식인이 속고 가방 끈 짧은 일반국민이 속았을 따름이다. 그들의 민주는 인민민주 또는 주체민주였다.
이승만에서 노태우까지 일관했던 반공(反共)의 꿈은 김일성의 꿈과 양립할 수 없었으므로 정전 후 불과 39년 만에 시장경제와 자유민주가 300년 앞선 서구에 근접하는 기적을 이루었지만, 그것은 김일성의 꿈을 자주평화통일의 꿈으로 간직한 386운동권에게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 친일과 독재로 그들은 일방적으로 끈질기게 시도 때도 없이 매도되었고, 여기에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의 혜택을 톡톡히 본 기득권자들이 하나둘 좌우로 번갈아 눈을 굴리기 시작했다. 386운동권의 꿈이 학계와 문화계와 언론계의 최상위 꿈으로 영글었다. 표적 세무조사와 사주(社主) 인신공격에 의해 조선동아까지 절반 이상 접수된 것이다.
한국에선 지금 공존할 수 없는 두 꿈이, 생명과 진실과 사랑의 꿈 그리고 죽음과 거짓과 증오의 꿈, 이 두 꿈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싸우고 있다. 말과 글과 촛불의 총칼로 싸우고 있다. 이 두 꿈 중 어느 꿈을 초딩 수준의 입신양명 꿈보다 우선하느냐 하는 것은 북한인권에 대한 언행을 보면 알 수 있다. 북한인권에 1만 원이라도 기부한 사람이거나 언제든지 기부할 용의가 있는 사람은 생명과 진실과 사랑의 꿈을 간직한 사람이고, 그렇지 않으면 기껏해야 초딩 수준의 입신양명을 최고의 꿈으로 간직한 사람이거나 386운동권의 꿈을 지상낙원의 이데아로 간직한 사람이다.
방위성금은 수억 원씩 다투어 내던 대기업이, 적화통일되면 하루아침에 몰수될 대기업이,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의 혜택을 가장 많이 본 대기업이 북한인권에는 단돈 10만 원도 공개적으로 내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두렵기 때문이다. 방송과 신문과 포털을 거의 장악한 그들의 눈 밖에 나는 것이 너무나 두렵기 때문이다. 히틀러의 인권탄압에 결코 못지않은 김일성 3대의 인권유린을 데면데면 외면하는 위선적 한국인에게 10년 이상 쏠리는 세계의 따가운 눈총이 두려운 게 아니라, 여중생 2명의 교통사고로도 세계 최강국의 대통령으로부터 기어이 사과를 받아내는 국내의 집요한 문화권력, 말과 글과 촛불을 장악한 국내의 문화권력이 두렵기 때문이다. 밤이면 경제권력에 슬슬 기는 정치권력보다 낮이나 밤이나 386운동권의 꿈을 가슴속 북극성으로 모신 오늘의 무시무시 친북좌파 문화권력이 내일의 저승사자보다 두렵기 때문이다.
최성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