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칼럼]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의미
지난 9월 5일, 미국 조지아주 현대차와 LG에너지솔루션 공장 건설 현장에서 벌어진 우리나라 근로자 317명을 포함하여 외국인 근로자를 체포·구금했다는 보도는 우리의 눈과 귀를 의심할 정도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특히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것으로 공장 상공에는 헬리콥터가, 공장 주변엔 장갑차를 비롯해 무장 군용 차량이 곳곳에 배치됐다. 강제로 수갑을 찬 채 버스에 오르는 모습에 우리나라 국민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한미 간의 원활한 협상으로 체포·구금된 지 일주일이 지난 9월 12일에 이들은 무사히 귀국하였다.
필자가 가장 우려한 점은 우리 국민의 안전한 귀국이었고, 그다음은 이 사건으로 인해 한미 동맹의 균열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염려였다. 우리나라는 한미 동맹의 근간이 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통해 오늘날 번영된 대한민국을 이룰 수 있었다고 단언한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우리 대한민국의 흥망성쇠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필자는 진단한다. 이런 차원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될 당시의 상황과 과정 그리고 그 의미를 살펴보는 것도 뜻깊은 것이라고 본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당시 상황과 과정
주지하다시피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모택동과 스탈린의 사주를 받은 북한이 38도선 전역에서 기습 남침하여 동족상잔의 비극이 벌어졌고 무려 3년 1개월간의 혈투 끝에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기습 남침으로 대한민국이 위기에 처하자 UN군이 참전하여 압록강까지 오르고 통일을 이루는 듯 했다. 그러나 중공군이 개입함으로써 전선은 다시 밀리고 결국 현 휴전선을 중심으로 혈투가 벌어졌다. 이에 UN군 측과 공산 측은 어느 한쪽에 의한 한반도 석권은 불가함을 인식하게 되었고,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시작된 휴전 협상은 무려 2년을 끌다가 1953년 7월 27일 드디어 정전협정을 체결함으로써 현재의 휴전선이 그어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정부수립 초기부터 세계 최강국인 미국과 군사동맹 체결만이 우리가 잘살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이를 추진했다. 6·25 전쟁이 UN군 측과 공산 측이 휴전을 위한 회담이 막바지에 이른 것을 알자 이승만 대통령은 고도의 전략을 추진한다. 그는 1953년 4월 9일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에게 북진통일의 의지를 담아 서한을 보낸다. 이를 받아본 미국 대통령은 망연자실(茫然自失)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막대한 전비(戰費)와 많은 전상자로 인해 미국과 자신의 권위와 체면을 구기지 않는 선에서 휴전을 추진하고 있는데 북진통일은 날벼락일 수밖에 없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서한을 통해 “북진통일은 꿈도 꾸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심지어 이승만 정부의 전복과 이승만 제거를 위한 군사작전을 준비하라고 지시하자, 당시 UN군 사령관 클라크(Mark Clark) 장군은 에버레디 작전(Plan Everready)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한국을 중립국으로 하는 방안까지 검토하면서 미국은 어떻게든 한반도에서 발을 빼고자 했다.
국제 정세에 밝은 이승만 대통령은 미군을 한반도에 주둔시키기 위한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다. 바로 반공포로 석방이었다. 1953년 6월 18일, 2만 7천여 명의 반공포로 석방을 단행했다. 이는 이승만 대통령의 단독 명령으로 한국군만으로 북진을 감행하겠다는 결단으로 미국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렇게 될 경우 휴전 협상이 마무리 되어가는 상황에서 미국은 이승만 대통령의 요구인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검토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미국은 이승만과 미 국방부·합참이 원하는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결정하고, 로버트슨 특사를 한국에 보내 이승만 대통령에게 핵심 내용에 대해 설명하고 휴전에 반대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그 내용은 ① 정전 후 한미 양국은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다. ② 한국에 장기적인 군사경제 원조 제공을 약속한다. ③ 한국군을 20개 사단으로 확대하고 해·공군력도 증강해 준다 등 세 가지로 이승만 대통령은 이를 수락했고 이에 따라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이후 1953년 8월 8일 서울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이 가조인되었고, 10월 1일 워싱턴에서 정식 조인되었다. 1954년 1월 15일 한국 국회가 이 조약을 비준했으며, 미국 상원 또한 1954년 1월 26일에 비준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에 그치지 않고 더 많은 것을 미국에 요구했다. 결국 1954년 11월 17일 이승만 대통령의 입회하에 한국 변영태 외무장관과 브릭스 주한 미국대사가 한미합의의사록과 부록에 공식 조인함으로써 우리는 육군 66만 1천 명, 해군 1만 5천 명, 해병대 2만 7,500명, 공군 1만 6,500명 등 72만여 명을 유지할 수 있었고, 필요한 예산까지 지원받게 되었으며 오늘에 이르렀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의 의미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체결되었다. 이 조약 체결로 우리나라는 오늘날 세계가 부러워하는 강국을 이룰 수 있었다. 필자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의미를 크게 네 가지로 생각하며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세계 최강국인 미국과 동맹국이 되었다. 이는 세계 어떤 나라도 함부로 대한민국을 넘볼 수 없는 안전한 장치를 확보한 것이다.
둘째, 굳건한 국방력 강화와 자유민주주의체제를 확립할 수 있었다. 지금 우리나라의 세게 국방력은 6위에 이르렀고, 우리의 방산품은 여러 나라에서 선호하고 있다.
셋째, 경제부국을 이루었다. 정부수립 당시의 최빈국에서 지금은 세계 경제력 10위권에 들었다.
넷째, 문화 융성의 대국이 되었다. 지금 세계를 점령한 “케데헌”을 포함하여 K-팝, K-푸드, K-방산, K-드라마, K-뷰티 등에 세계인들이 열광하고 있는데, 이 또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이 토대가 되었다고 본다. 물론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불만을 가질 만한 점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미흡한 점은 협상과 이해를 통해 미래지향적으로 얼마든지 개선시켜 나갈 수 있다고 판단한다. (konas)
이영석 : 한국의병연구소장, 재향군인회 안보교수, 안보전략연구원 및 논문심사위원
※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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