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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칼럼] 1919년의 ‘자유’와 2026년의 ‘안보’ : 스스로 지키지 못하는 독립은 허상이다

제107주년 3·1절을 앞두고

Written by. 이영석   입력 : 2026-02-26 오전 9:4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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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의 독립운동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이 말은 단순한 수사(修辭)가 아니다. 우리 대한민국이 그 증거이다. 1910년 한일 합방 이후 나라 없는 국민이 어떤 고초를 겪어야 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우리의 글과 말을 할 수 없고, 우리의 역사를 배우거나 가르칠 수 없으며, 이름도 일본식으로 지어야 했다. 언론과 집회 또한 모두 통제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농민은 토지를 빼앗겼고, 노동자는 값싼 인력으로 동원되었으며 심지어 태평양전쟁이 격화되면서 우리 국민은 강제로 징용과 학도병으로 끌려갔다. 나라가 없으면 자유 또한 없다. 그리고 자유가 없는 식민지 국민은 하찮게 취급 받으며 죽음으로까지 내몰려야 했다.

1919년 3월 1일, 민족적 차별과 나라를 되찾기 위해 온 국민이 일어섰다. 바로 독립운동이었다. 그 날 울려 퍼진 독립운동은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자유를 되찾으려는 결단이었다. 또 이것은 식민지 민족이 국제정세를 읽고 선택한 전략적 행동이었다. 흔히 3·1운동을 민족적 항거로 부른다. 국가적 관점에서 보면 1919년은 커다란 전환점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세계는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고 있었다.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했고, 이는 식민지인 우리나라에서는 독립에 대한 희망이 되었다. 3·1운동은 일본을 향한 외침이었지만 동시에 국제사회에 보내는 메시지였다. 이는 자유와 독립을 갈망하고, 조선이 완전한 국가임을 선언하는 국민의 외침이었다. 이러한 전략적 사고는 1919년 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이어지는 큰 역할을 했다. 임시정부는 민주공화제를 채택하며 스스로를 ‘국가’로 선언했다. 이는 독립운동이 단순한 저항을 넘어 국가 건설 프로젝트로 전환되었음을 의미한다.

3·1 독립운동의 가장 큰 의미는 全 국민의 동참이었다. 종교계가 단결하였고, 학생들이 조직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여성들도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또한 이 운동은 농촌지역까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독립운동은 이전의 의병운동과는 전혀 다른 근대적 대중 정치운동이 되었다. 그리고 3·1 독립운동은 평화적 시위를 지향하였다. 이는 국제 여론을 의식한 전략이었고,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의도였다. 3·1 독립운동은 정신적 독립의 선언이었고, 정치적 독립의 출발이었으며, 군사적 독립투쟁의 촉매제 역할을 하였다. 3·1운동은 이후 독립을 이룰 때까지 26년간 독립운동의 심리적 기반이 되었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대표적인 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다. 2022년 2월에 발발한 우·러 전쟁은 벌써 4년이 넘도록 이어지고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때 안보전문가들은 러시아가 조기에 승리할 것으로 대부분 예상하였다. 러시아는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면서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핵 보유를 인정한 강국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문가들의 예상과는 달리 이 전쟁은 지루한 소모전 양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우크라이나가 선전(善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가장 큰 이유는 젤렌스키 대통령의 리더십이라고 본다.

개전 초 우크라이나 병력은 50만 명 중 예비군 등을 제외한 정규 병력은 20만 명인 반면 러시아 병력은 정규군만 85만 명이고 이 중 20만 명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전하였다. 장비면에서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탱크는 2,596대와 12,420대, 장갑차는 3,122대와 12,303대로 러시아가 월등히 우세하였고, 이동 로켓발사대 또한 러시아가 3,391대로 우크라이나보다 10배 정도 더 많았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여 미국이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망명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를 거부하였다. 만일 젤렌스키 대통령이 이를 따랐다면 전쟁은 러시아의 승리로 바로 끝났을 것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내가 필요한 것은 차량이 아니라 탄약”이라고 말하며, 수도 키이우가 공격당하는 상황에서 수도를 지키겠다고 각료들과 함께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자 우크라이나 국민이 적극적으로 반응하였다. 이것은 고도의 정치적 행위로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게 되었다. 국민의 지지에 힘입어 동맹국들의 지원도 받을 수 있었고, 지금까지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오늘날의 교훈

1919년의 자유와 2026년의 안보를 살펴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의 지지와 동참이다. 1919년의 독립운동과 오늘날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을 통해 다음과 같은 교훈을 도출할 수 있다.

첫째, 자유와 안보는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튼튼한 국방력이 없고 자유민주주의 수호에 대한 의지가 없으면 주변 강대국은 그냥 두지 않는다. 과거 일제가 그랬고, 오늘날 러시아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 이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

둘째, 굳건한 한·미 동맹이다. 우크라이나는 군사 동맹국이 없기에 러시아가 마음 놓고 침략하였다. 우리나라 주변에는 강대국이 포진해 있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세계 최강인 미국과의 동맹이 절실하다.

셋째, 지휘통제체계를 강화해야 한다. 전쟁 초기 우크라이나 지휘통신체계가 붕괴 되었을 때, 일론 머스크의 스타링크 시스템이 큰 역할을 하였다. 얼마 전에는 불법으로 스타링크 위성 인터넷을 사용해 오던 러시아군이 일론 머스크의 스타링크 시스템을 차단하자 통신 마비에 직면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처럼 전시 지휘통제체계는 매우 중요하다.

넷째, 드론(drone)의 중요성이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기간 중 양국은 정찰 및 표적획득, 목표물 타격 등에 드론을 광범위하게 활용하고 있다. 드론은 실시간 정보 수집은 물론 직접 타격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처럼 우리나라도 드론에 대한 연구와 더불어 군사용으로 개발을 더욱 강화해 나가야 한다. (konas)

이영석 : 한국의병연구소장, 재향군인회 안보교수, 안보전략연구원 및 논문심사위원

※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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