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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청년 이봉창, 일제 심장에 폭탄을 퍼붓던 날

1월8일은 이봉창 의사가 일본 동경에서 조선침략과 민족말살의 주범 일왕을 향해 폭탄을 던진 이봉창 의사 제85주년 의거일
Written by. 이현오   입력 : 2017-01-08 오후 1: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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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赤誠(적성)으로써 祖國(조국)의 獨立(독립)과 自由(자유)를 回復(회복)하기 爲(위)하야 韓人愛國團(한인애국단)의 一員(일원)이 되야 敵國(적국)의 首魁(수괴)를 屠戮(도륙)하기로 盟誓(맹서)하나이다』<大韓民國 十三年 十二月 十三日 宣誓人韓 李奉昌 韓人愛國團 앞>

 이봉창 의사가 두터운 천위에 붓으로 써 내려간 국한문혼용체 선서문이다. 암울한 조국의 현실 앞에서 그저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는 나약함이 아닌 적성(赤誠 : 참된 정성)으로 일제강점기에 대한 청년의 기상을 떨친 강인한 의지가 내포된 글이다. 51자의 짧은 글귀지만 담겨진 의미는 장대하고 웅대하다. 자신을 바쳐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자유를 되찾겠다는 절절함이 그대로 묻어난다.

 이봉창 의사가 일왕을 폭탄으로 암살하려고 한 거사(擧事) 직전에 맹세한 자필서 내용이다.

 오늘(1.8)은 일제 강점하 식민통치아래 일본제국주의 심장부인 동경(도쿄)에서 침략의 원흉 일왕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투척해 일본은 물론 중국과 전 세계에 한민족의 자존과 독립의 의지를 만천하에 알린 이봉창 의사((1901. 8. 10~1932. 10. 10)가 의거를 결행한지 85주년이 되는 날이다.

 1932년 1월8일 당시 서른한 살의 애국청년 이봉창은 일본의 요요기 연병장에 서 있었다. 일제의 서슬퍼런 총칼 앞에 무참히 짓밟히고 스러져간 조국 조선의 처절함을 일왕을 제거함으로써 조선의 처지를 세계만방에 알리고 독립을 앞당기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의 꿈은 좌절되고 청년 이봉창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만 했다. 1월8일은 이봉창 의사가 히로히토 일왕에게 폭탄을 던진 독립의거 일이자 세계에 조선 청년의 기개를 떨쳐 일으킨 날이기도 하다.

 

 1920년대 당시 조선은 1919년 3·1독립만세 이후 일본의 조선총독부가 지금까지의 잔혹한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전환하면서 조선인에 대한 회유정책을 기반으로 우리민족을 사회문화적 기반으로 흡수하면서 나아가 일본인화 시키기 위한 활동이 전개되던 시기다. 이른바 조선인의 일본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였다. 친일 민족화 시도인 것이다.

 더불어 이 시기는 독립운동이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펼쳐지던 시기이기도 했다. 김원봉 단장의 지휘로 결성된 의열단조선총독부(김익상, 1921), 동양척식주식회사(나석주, 1926),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김상옥, 1923) 등의 활동이 결행되었고, 중국에서는 상해임시정부가, 미국에서는 흥사단과 국민회가 일제의 식민지배에 항거하여 민족단결을 위해 노력하였다.

 다만 이 시기에도 일제는 치안유지법을 제정해 공산주의자 등 사상운동가와 총독부 반대 인물을 탄압하는 것은 여전했다.

 이런 시점에서 이 의사의 독립을 위한 구국(救國의 의지 또한 커져 갔다. 의사는 당시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했던 서울 용산에서 출생해 일인들로부터 받는 민족의 모멸과 핍박을 지켜보면서 스스로의 의기를 키운 강인한 대한청년이자 당시 임정과 독립운동단체, 한인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은 민족정기의 화신이기도 했다.

 출생당시에는 유복한 집안이었으나 일제에 토지를 빼앗겨 가정형편이 어려워 보통학교를 졸업 후 가정을 돌보기 위해 굳은 일을 다하다 일본으로 건너가 외판원으로, 주유소 등지에서 막일을 하면서 민족차별의 높은 벽에 부딪히며 나라 없는 설움과 수모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일련의 시련은 그를 더욱 강하게 변모케 했다.

 그러던 중 의사의 심정변화와 거사(巨事)의 뜻을 품게 하는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1928년 11월 일왕 즉위식에 참관했다가 국한문 편지를 소지했다는 이유로 15일 동안 구금되면서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새삼 느끼면서 남은 인생을 나라를 되찾는 일에 헌신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상해로 건너가 김구 선생을 만나 일왕 폭살 의거계획을 논의한 후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1931년 12월 말, 다시 일본 동경으로 들어가 일왕이 1월8일 동경 요요기 연병장에서 신년 관병식(觀兵式 : 지휘관이 군대를 검열하는 의식) 참석 정보를 입수하고 이 날 오전 11시 44분 신년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일왕 행렬을 향해 수류탄을 투척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거사는 성공하지 못하고 일경에게 체포되고 만다. 비록 의사의 거사는 실패했으나 일제 수뇌부에 대한 경종과 세계를 놀라게 하였으며 특히 중국신문들이 대서특필하는 쾌거였습니다. 또한 침체 일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인들의 독립의지를 불태우는 불씨가 되었음은 의사가 남기고 간 숭고한 결실이기도 했다.

 의사의 거사 3개월 후인 4월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윤봉길 의사의 장거가 이어지고, 독립운동단체와 임시정부에 용기와 희망을 주었으며, 소원했던 중국과의 관계도 진전하는 등 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봉창 의사가 독립운동 투신을 위해 상해에 와서 한 말이 이렇게 전한다.

 “제 나이 이제 서른한 살입니다. 앞으로 서른 한 해를 더 산다하여도 지금보다 더 나은 재미는 없을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0년 동안 인생의 쾌락이란 것을 대강 맛보았습니다. 지금부터는 영원한 쾌락을 위해 독립사업에 헌신할 목적으로 상해에 왔습니다.”

 그러면서 한인애국단 가입 선언문에서 "나는 참된 정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_ 대한민국 13년(1931년) 12월 13일 선서인 이봉창"

 그런가 하면 거사를 위해 일본으로 떠나기 전 의사의 결연하면서도 세상을 초월한 듯한 말이 백범일지에는 이렇게 전해진다. “​​​기념사진을 찍을 때에 내 얼굴에 처연한 빛이 있던 모양이어서 이봉창이 나(김구)를 돌아보고 말하길, ‘제가 영원한 쾌락을 얻으러 가는 길이니 우리 기쁜 낯으로 사진을 찍읍시다’ 하고 빙그레 웃음을 띠기에 나 역시 그를 따라 미소를 띠고 사진을 찍었다.

 청년 이봉창의 ‘쾌락’은 암울한 조국의 현실과 그 현실 속에서 이합집산하고 있는 민족에게 ‘영원한 삶’이 무엇인가를 일깨워주며, 자신의 생명을 던져 조국광복의 제단위에 바치겠다는, 소(小)를 탐하기보다 대(大)를 위해 ‘죽어서 영원한 쾌락을 얻는’ 영생의 삶이 무엇인가를 온몸으로 보여준 것으로 가슴을 적신다. 더불어 오늘의 현 시점에서 우리가 처한 현실과 현상을 새삼 돌아보게 하는 의사의 의거일인가 한다.(konas)

이현오 / 코나스 편집장. 수필가(holeekv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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