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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의 통합을 이끈 안창호 선생,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

Written by. 이숙경   입력 : 2019-03-29 오전 9:5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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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안창호(1878.11.9.~1938.3.10.) 선생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29일 밝혔다.

 1878년 11월 9일 평안남도 강서군 초리면 봉상도(일명 도롱섬)에서 태어난 선생은 18세 되던 해에 구세학당 보통부를 졸업하고 조교를 맡아 학생을 지도했다.

 이후 독립협회에 가입한 선생은 귀향해 독립협회 관서지부를 설립해 민권운동에 뛰어들었다.

 1902년 결혼 직후 미국으로 건너간 선생은 리버사이드 일대의 한인지도자로 떠올랐다. 1905년 4월에는 동지들과 함께 조국 광복을 목표로 삼는 미주 한인단체인 공립협회를 창립했다. 1907년 5월 공립협회 제3대 회장으로 선출된 선생은 언론활동과 교육진흥, 실업진흥 등 여러 가지 구국사업을 전개했다.

 이후 공립협회는 1909년에는 하와이 한인합성협회와, 1910년에는 대동보국회와 통합되어 1910년 5월 10일 미주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대한인국민회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선생은 조국 독립을 추구한 국내 비밀결사인 신민회 활동에도 참여했다.

 1913년 5월 13일, 8도 대표를 선정해 민족을 지도해 나갈 수 있는 중견 인물을 배출하기 위한 동맹수련단체로서 흥사단이 출범했다. 선생의 주도로 조직된 흥사단은 무실역행․충의용감․건전인격․단결훈련․국민개업 등을 목표로 독립운동을 위한 조직적 재정후원과 일꾼양성을 통한 민족독립의 사명 완수에 매진했다.

 3·1운동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이라는 결실을 맺자 선생은 1919년 5월 25일에 상하이에 도착해 임시정부의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로 취임했다. 이후 임시정부의 체계를 갖추고 조직적으로 사업을 전개해 나갔다.

 1932년 4월 29일에 윤봉길 의사가 일본인들의 천장절 행사장인 홍구공원에 폭탄을 투척하자, 같은 날 상해 이유필의 집을 방문했던 선생은 민단장으로 오인되어 일본 경찰에 의해 연행됐다.

 이후 국내로 압송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대전감옥으로 이송되는 2년 6개월간의 옥고를 치른 끝에 1935년 2월 10일 가출옥했다.

 곧이어 일제는 국내의 민족운동 일체를 말살하기 위해 1937년 6월, ‘동우회사건’을 일으켰다. 이에 선생을 비롯한 180여명의 동우회 회원들은 종로경찰서로 넘겨져 135일간 집중조사를 받고 8월 15일 예심종결을 거쳐 ‘치안유지법 위반’ 판결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선생은 지병이 악화되어 병보석으로 출소됐으나 1938년 3월 10일 서거했다.

 우리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konas)

코나스 이숙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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