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하지 마라
2010년 겨울 나는 극도의 긴장감 속에 교원임용시험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회변화를 주도하는 인재의 양성을 자아실현의 큰 꿈으로 삼아 교대에 진학했고, 4년간 교육학과 교육과정을 배우면서 내 나름의 교육철학을 세우는데 노력했다. 이제 그 결실의 순간을 기다리는 마지막 관문에 다다랐지만, 코 앞에서 낙방의 고배를 마시진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걱정과 초조, 불안으로 잠 못드는 와중에 나는 학교에서 한 남학생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그 남학생이 국가유공자의 후손이라 유공자 가산점을 얻는 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곧 합격이라는 말과 동일했는데, 유공자 가산점은 그 어떤 가산점보다 높아 시험에 절대적으로 유리했기 때문이다. 이 소식을 들은 나와 친구들은 그를 ‘신의 아들’이라며 부러움과 시샘을 드러내곤 했다.
나는 때 아닌 조상님 탓과 그 남학생에 대한 시기심으로 심란했던 와중에 문득 예전에 읽었던 신문기사 하나를 떠올렸다. 독립투사의 후손들이 생활고를 겪고 있어 사회적 관심이 촉구된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전 재산을 모두 사용한 독립투사들은 자신의 가정을 돌볼 여유가 없었다. 그러다 죽기라도 하면 그 아내와 자식만 세상에 덩그러니 남았고, 그렇게 몰락해버린 독립투사의 집안은 대대로 가난과 핍박을 받아오며 힘들게 살아왔다.
백범선생이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면 <5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란 제목으로 통한의 연설을 하지 않으셨을까. 그들이 가족을 뒤로하고 재산과 목숨을 다 바쳐 독립운동에 뛰어든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런 대가도 없이 비극적 역사의 한 가운데에 자신을 산화시킨 그들의 의도와 심정은 무엇이었을까. 백범일지를 읽으니 백범선생께서 그 이유를 대신 전해주는 것만 같았다.
백범선생은 어린 나이에 동학의 접주를 맡아 민중항쟁의 경험을 몸소 느꼈고, 전국 팔도를 돌아다니며 여러 인사와 교류하였다. 한 때는 황해도에서 교육에 종사하며 국권 회복을 위한 기층 민중의 의식을 개혁하고자 노력했다. 국모보수(國母報讐)를 위해 일본 장교를 죽였으며 수감과 탈옥을 반복하며 일제의 탄압에 맞서 싸우고자 노력했고, 국권이 넘어간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항일투쟁을 위한 정치, 외교적 노력에 한평생을 다 바쳤다.
독립정부 청사의 문지기를 꿈꾸었던 소박한 사내가 민족의 지지를 받는 임시정부의 주석까지 지낸 것은 그가 가진 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없이 높은 수준의 문화를 가진 나라에서 자유의 공기를 마시고 내 나라 내 민족 내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세상에서 사는 것. 그런 문화와 국민의 역량으로 세계평화에 일조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선생이 가진 꿈이었다. 선생은 이 꿈을 실현하기 위해 한평생을 다 바쳤다.
그 꿈은 현재 완전하진 않아도 많은 분야에서 실현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K-POP 한류열풍과 세계적인 영화제에서의 작품 수상, 유엔 평화활동 참가, 여러 환경 시민단체들의 인권 및 환경운동 등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수준의 문화를 세계무대에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 꿈을 백범선생만 지닌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선생과는 다른 곳에서 또는 근처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이름 없이 쓰러져간 우리 조상들도 선생과 같은, 또는 보다 더 큰 꿈을 꾸었던 민중이 존재했을 것이다.
선생은 자신과 같은 꿈을 꾸며 작은 일이라도 도우려 했던 민중을 보며, 미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이승을 떠난 그들에게 존경과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대들 없이는 나 또한 없었고 광복 또한 없었음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고, 이를 모든 후손들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연말이 되면 수상식에서 배우나 감독이 나와 꼭 이런 말을 한다. ‘이 영광을 모든 배우와 스텝들에게 돌리겠습니다’. 그 말을 떠올리는 순간 나는 선생이 ‘내 독립운동의 모든 행적과 공을 민중에게 돌리겠습니다’라고 전하는 것만 같았다. 선생과 같이 독립운동을 했던 민중들의 이름까지 모두 거론하면서 그 고마움을 일지에 표현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무명의 민중들, 특히 이명옥, 이정숙 부부의 사건을 듣고는 후손들에게 기념비까지 세워달라고 말할 정도니, 일반 민중에 대한 도움과 행적을 선생은 다른 이보다 더 없이 고맙고 소중하게 여기신 것 같다. 백범이라는 호가 백정 범부가 선생과 같은 한마음 한뜻으로 독립에 대한 열망을 지니길 바라는 마음에 지어진 것처럼, 독립을 열망하는 민중의 정신과 그 행적을 깊이 고마워했기에 그와 같은 기록을 남기셨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해 남긴 기록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면에 숨겨진 선생의 더 큰 뜻이 있음을 나는 짐작할 수 있었다. 예전에 읽은 한국사 관련 서적에서, 저자가 다음과 같은 글을 쓴 기억이 난다. ‘역사에 무임승차하지마라’. 선생은 독립운동사라는 피로 얼룩진 고난과 역경의 순간에 값비싼 요금을 내고 승차하였음에도 주목받지 못한 이들의 명예를 드높이고자 하신 것 같다.
그래서 그 수많은 이들의 이름을 모두 기록해놓으신 것이리라. 그들의 꿈 또한 당신의 꿈과 다르지 않았다는 것, 나의 행적만이 아니라 그들의 행적도 후손들이 기억해야 한다는 것, 마치 선생이 우리에게 남긴 메시지 같았다. 그래서 역사에 무임승차하여 자유와 권리를 마음껏 누리는 우리들에게 경종의 메시지를 남기고자 하신 것 같다. 우리의 흐트러진 정신을 바로 세워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서 말이다.
나또한 같은 생각이다. 선생이 꾼 꿈의 크기는 선생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선생이 그렇듯 그 당시 항일 투쟁에 참여했던 모든 민중과 독립투사들에게는 꿈이 있었다. 서양 열강과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를 집어삼킬 정도로 강력한 힘을 지닌 일본에게 고작 몇 명의 민중이 뭉쳐 만세를 외치고 암살 활동을 벌여봤자 광복이 찾아오겠는가? 절대로 그럴 수 없다.
그 사실을 나는 민중들도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계란으로 바위치기임에도 그들이 자신의 신체를 깨부수며 일제라는 거대한 바위에 노른자를 묻혔던 이유는, 내 자식에게만큼은 이 참혹하고 더러운 식민지의 삶을 물려주기 싫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 자식만큼은 떳떳한 주권 국가의 민중이 되어, 자유를 누리고 주권을 행사하는 사람으로 살게 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런 꿈이 민중에게도 있었기에, 백범선생이 참가했던 동학농민운동이 있었고 3.1 운동이 있었으며 치열한 항일운동의 역사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열정과 꿈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만 한다. 그래야 우리가 다시는 치욕을 겪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선생은 우리에게 이를 가르쳐주고자 했던 것이리라.
원대한 꿈이지만 사실은 이루기 힘든, 거의 불가능한 꿈이었을지도 모른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처럼, 본국도 아닌 타국에서 정치와 외교를 해봐도 이념으로 분열만 되기 십상이고, 밀려들어오는 일본군의 총칼 앞에 매일같이 도망가야 하는 처지였으니 말이다. 이런 사태를 타개하기 위해 선생은 군대를 양성하였다.
그러나 조국 청년이 수없이 많이 사는 조국강산도 아니오, 더군다나 우리와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는 머나먼 중국 땅이니 어떻게 조선청년을 모아 군대를 만들 수 있었겠는가. 100여명도 모으기 힘든 군대를 양성하여 일제에 맞서기란 중과부적이었다. 그러나 선생은 포기하지 않았다. 작은 불씨라도 살리고 커지게 하는 것만이 독립을 이루는 첫 시발점이 되리라 굳게 믿었다.
그 일념으로 자식과도 같은 이봉창, 윤봉길 두 청년을 눈물을 머금고 사지로 보내지 않았겠는가. 이봉창이 의거 직전 ‘영원 쾌락을 향유코저 떠나는 길이니 밝은 낯빛으로 사진을 찍자’고 했던 그 말처럼, 광복군 또한 조국에 영원 쾌락을 위해 기꺼이 목숨 내놓을 각오로 만들어진 결사대였다. 그리고 그 결심을 발휘하기 위한 국내 진공작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애석하게도 작전은 실행되지 못했다. 진공작전이 투입되기도 전에 일제는 미국의 원자폭탄에 무릎을 꿇고 무조건 항복을 외쳤다. 독립의 실질적인 위치에 임정과 광복군이 서있어야 했지만 좋은 때를 놓쳤고, 선생은 이 일을 크게 후회하였다. 후대 역사학자들 또한 선생의 후회를 크게 공감하였다고 한다.
만일 준비된 군대 200명이 광복 직전에 국내로 진격하여 일련의 군사적 조치와 활동이 있었더라면 해방이후 조국 건설에 유리한 자격을 갖추었을 것이란 평가가 있다. 그러나 그 기회를 놓쳤고 미국과 소련에 의해 조국이 양분되면서 군정의 세월을 또 겪어야만 했으니 애석하기 짝이 없는 역사의 한 장면이었다.
이 같은 아쉬움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항상 준비된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역사에 가정이란 없지만, 만약을 생각해본다면 어떨까. 지금 대한민국 국군의 정예화된 장병 200명만 있었더라도 진공작전을 수행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면 임시정부의 존재를 세계적으로 알렸을 것이고 국가단체에 준하는 입장으로 귀국하여 새로운 정부 건설에 보다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을 것이다.
강한 전사로 준비된 국방력이 있어야 다가오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 대목에서 확연히 느낄 수 있었고, 이는 우리 국민과 군인 모두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라 생각되었다. 21개월의 짧은 복무기간이지만 군인의 신분으로서 맡은 임무수행은 물론 평소의 훈련에도 열심히 임해야겠다는 생각을 새삼스레 하게 된 것은 선생의 후회와 통한의 역사가 내게 준 교훈과도 같았다.
역사에 무임승차하지 말아야 한다. 선생께서는 이 사실을 알리고자 수많은 이들의 이름을 적으셨다. 기억하라, 기념하라, 그리고 그 마음을 느껴보아라. 선생의 외침이 귓속을 맴도는 것만 같다. 한번쯤 생각해볼 일이다. 왜 그들이 목숨을 바쳐가며, 재산을 탕진하며, 가족을 내팽개치며 독립운동에 뛰어든 것인지를. 후손된 사람으로서, 자유의 공기를 마시며 자주 국가의 주권을 행사하는 국민으로서, 독립을 위해 희생한 이들의 넋을 기리고 그들의 고통과 아픔을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한다.
유공자 가산점을 받는 학생을 그저 부러움과 시샘으로 볼 것이 아니라, 그 선조들의 값비싼 운임이 있었기에 우리가 존재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들의 조상이 겪었던 참혹한 비극과 고통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또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도록 스스로 다짐해야 한다. 이 자유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님을, 언제든지 다시 잃어버릴 수 있고 이를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군인의 신분인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선생이 남긴 유지를 받들고 되뇌어 정신적으로 무장하고, 훈련을 성실히 수행해 신체적으로 단련하는 일이다. 역사에 당당히 ‘유임승차’하여 내 자신을 떳떳이 하고 내 나름의 애국을 실천할 것이다. 그것은 선생이 그토록 바라던 바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konas)
군수사령부 헌병대 일병 서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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